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30화 (13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5. 운명의 순환(2)

최베드로는 지갑을 꺼내 채소를 사며 여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최베드로의 웃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돈을 받았다. 최베드로는 채소를 들고 가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재빠르게 살폈다. 여전히 주변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고, 최베드로는 무언가 위협감을 느끼며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최베드로는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특이하게도 시장 안에는 아까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이 몇몇 보였고, 최베드로가 지나가자 재빠르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 뭐지?

최베드로는 구불구불한 시장길을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그 때 최베드로 앞에 웬 건장한 남자 네 명이 나타났다.

- ?是??(넌 누구냐?)

그들 중 한 명이 최베드로를 노려보며 물었다. 최베드로는 그를 보며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 Just a tourist who came.(그냥 관광 온 사람입니다.)

최베드로가 영어로 대답을 하자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더듬거리는 말로 말했다.

- Foreigners can not come in here!(외국인은 여기 들어올 수 없어!)

최베드로는 무언가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 옆에 서 있던 사람 둘이 최베드로에게 팔짱을 끼고 시장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최베드로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막연하게 그 넋을 잃은 아이들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최베드로는 이러한 행동이 자신이 중국에 왔음을 알리는 꼴이었다는 것을 이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날 최베드로가 다시 방을 찾았을 때에는 여자 아이의 표정이 크게 바뀌어 있었다. 어제 봤던 여자 아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변하였다. 그 아이를 보고 놀란 것은 일남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다른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제는 정말 미친 듯한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완전히 다른, 아니 다르다기보다 마치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보였다. 비록 성숙한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요염함은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색기마저 흐르는 모습이었다. 일남은 그 모습에 자심도 모르게 주춤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본능이 위험을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 나약하고 여려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생사를 오가는 싸움에 노출되어 살아온 자신의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 조금은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더 의아한 것은 최베드로의 반응이었다. 분명 여자 아이의 모습이나 태도가 크게 바뀌었음에도 대하는 태도나 표정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차갑고, 더 차분하게 바뀌었다. 일남이 보기엔 그건 냉정한 판단이나 이성적인 사고와는 다른,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것과도 같은 차분함이었다. 일남은 그런 최베드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아이가 변했군요.

일남의 말에 최베드로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 그렇군요. 더 심각해졌군요.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보기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모습이었기에 다시 물었다.

- 네? 오히려 어제보다 정상처럼 보이는데요?

최베드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겉으로 보기엔 어제보다 많이 나은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건 마음의 병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히건 다른 마음의 병이건 외모를 통해 먼저 드러나긴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외모를 통해 드러나지 않을 때, 이번 경우에는 감추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요. 저렇게 자신의 외모를 통해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경우가 더 심각한 상황이죠. 혹시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저는 여인이 풍기는 색기와 묘한 귀기를 느꼈습니다.

일남은 그제야 자신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일남은 아까보다 조금 더 놀란 표정으로 최베드로에게 물었다.

- 그러면 지금이 어제보다 더 위험한 상황인가요?

최베드로는 일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여자 아이를 보며 말했다.

- 그 위험이 여자 아이에 대한 것이면 어제보다 나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저희를 향한 것이면 어제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일남은 그 말에 경직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그렇다면 악령이 맞는 것이군요?

최베드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행동 패턴은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경우는 아주 이질적이군요. 새로운 상황입니다.

일남은 이런 경우가 최베드로에게도 새로운 상황이라는 말을 듣고는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지금까지 본 최베드로는 이 방면에서 최고라고 여겨졌는데 그런 사람에게조차 새로운 상황이라면 도대체 이건 뭔가 싶었다.

- 이질적이라뇨?

일남은 최베드로에게 질문을 하다가 갑자기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는 사과를 했다.

- 죄송합니다. 신부님. 제가 주제넘게 계속 질문을 했군요.

그러나 최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닙니다. 저는 아주 좋습니다. 대개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많이 하서든요.

그러면서 일남을 슬쩍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제 제자였다면 크게 칭찬해 주었을 겁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최베드로는 여자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 전혀 다른 이유는 우선 우리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얘기를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요. 만약 악령에 사로잡혔다면 저런 반응은 나오지 않지요.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여자 아이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어요.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냥 어제보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단 하루 만에요. 더욱이 묘하게 풍기는 색기는 저 나이 때 여자 아이가 보일 수 없는 페로몬의 농도를 보여주고 있지요. 그리고 얼굴도 어제와는 다르게 변했지요.

최베드로의 말을 듣고 일남이 여자 아이를 살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방에 들어온 그 짧은 시간에 그 모든 걸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최베드로가 대단해 보였다. 어쩌면 이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남은 최베드로를 쳐다보았다. 최베드로는 조심스럽게 여자 아이의 옆으로 다가갔다.

- 넌 누구냐?

최베드로가 한국어로 묻자 여자 아이는 특유의 색기 넘치는 표정을 하고 최베드로를 쳐다만 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최베드로는 다시 물었다.

- Who are you?(넌 누구냐?)

최베드로의 질문에 여자 아이가 최베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 我王明。(저는 왕밍이에요.)

최베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 You are not Wang-ming.(너는 왕밍이 아니야.)

최베드로의 말에 여자 아이는 깔깔대며 웃었다.

- 或者???王明??(왕민이 아니면 어때요?)

최베드로는 그 말에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최베드로는 한국어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여자 아이는 또다시 배시시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 ?是??(넌 누구냐?)

최베드로가 중국어로 묻자 여자 아이는 또다시 깔깔 웃으며 말했다.

- 我任雪 。(저는 런쉐에요.)

최베드로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또다시 다른 여자 이름을 대는 동문서답 같은 상황이 몇 번 반복되었다. 일남은 옆에서 최베드로와 여자 아이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최베드로에게 물었다.

- 이상하지 않습니까?

최베드로는 일남을 돌아보지 않고 얘기를 했다.

- 이상하다기보다 아주 이성적으로 저희를 희롱하고 있는 겁니다.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을 더 잇지 않았다. 최베드로는 여자 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 원하는 게 뭐지?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을 듣고 멍하니 있다가 화들짝 놀라 중국어로 말을 했다. 여자 아이는 일남의 말을 듣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 ?在,言?了。 (이제 말이 통하는군.)

여자 아이는 좀 더 농염한 눈빛으로 최베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 我想要?。(난 당신을 원해.)

일남은 여자 아이가 무슨 의도로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최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뒷말은 차마 신부인 최베드로에게 전하기 힘들었다. 최베드로는 일남을 보며 괜찮으니 얘기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일남은 자신의 얼굴이 붉어지며 얘기를 꺼냈다.

- 한 번도 여자를 품어본 적 없는... 당신의 동정을 원한다..고 그럽니다.

최베드로는 일남의 말에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그래도 큰 동요없이 말을 했다.

- 내 동정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일남이 여자 아이에게 말을 전하자 여자 아이는 더욱 색기를 풍기며 말했다.

- 네 동정을 얻으면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일남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최베드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우습군. 내 동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게 너를 낫게 할 수는 없지.

일남이 최베드로의 말을 전하자 여자 아이가 크게 웃어 젖혔다.

- 너.의.동.정.이.필.요.해.

여자 아이의 입에서 너무나도 정확하게 한국어가 나왔다. 일남은 여자 아이의 입에서 한국어가 나오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최베드로를 쳐다보았다. 최베드로는 표정의 변화 없이 여자 아이를 쳐다보았다.

- 너.의.동.정.이.필.요.해.

여자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최베드로는 일남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일남이 조금은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다.

- 한국어를 합니다. 저 아이는 네이멍자치구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아입니다. 진짜 악령이...

최베드로는 무언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여자 아이는 절대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행동들이나 말들은 마치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어렵군요.

최베드로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리고 일남과 함께 호텔로 왔다. 그리고는 바티칸으로 전화를 걸었다. 슈테판 추기경과 한동안 얘기를 나누던 최베드로는 일남에게 얘기를 했다.

- 내일 엑소시즘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은 흠칫 놀랐다.

- 그렇습니까?

- 오늘은 준비할 게 많군요. 잠시 저 혼자 있도록 하겠습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이 고개를 끄떡였다.

-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전화 주십시오.

일남은 최베드로가 방으로 들어가자 밖으로 나왔다. 최베드로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았다.

'마르티노가 이렇게 당한 것이구나.'

최베드로는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아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 부딪혀 보는 수밖에.

최베드로는 가방을 열어 내일 할 엑소시즘 준비물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앉아서 끝없는 기도를 올렸다. 죽은 마르티노에 대한 기도와 여자 아이를 위한 기도, 그리고 한치 앞도 모르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기도를.

다음날 아침 최베드로는 일남과 함께 여자 아이에게로 갔다. 여자 아이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두 손과 발은 묶인 지 오래 되었는지 끈 부분의 피부가 변색이 되어 있었다. 최베드로는 여자 아이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꼈다. 최베드로가 여자 아이 옆에서 기도를 올렸다. 여자 아이의 부모들 역시 최베드로 옆에 서 있었다. 일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여자 아이가 눈을 뜨며 모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부모에게 소리를 쳤다.

- 出去。 有味道的猪?。(나가. 냄새나는 돼지들아.)

여자 아이의 부모가 놀란 눈으로 딸을 쳐다보며 울었다. 여자 아이의 엄마가 여자 아이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하자 엄마를 향해 침을 뱉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렀다. 최베드로는 부모를 보며 말했다.

- 나가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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