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9화 (12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5. 운명의 순환(1)

5. 운명의 순환

검은 장막이 드리운 방 안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어두웠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낮이었지만 이 방만은 그러한 시간과는 무관하여 보였다. 방 안에 있는 가재도구라곤 침대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침대라고 이름만 붙였을 뿐이지 그것조차도 다 헤지고 찢어져 그냥 넝마더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손발이 묶인 열일곱의 소녀가 애처롭게 묶여 있었다. 그러나 최베드로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녀의 표정은 돌변하였고 마치 늑대가 상대를 위협하듯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최베드로를 노려보았다. 최베드로는 들고 들어간 촛대를 소녀와 조금 떨어진 바닥에 내려놓았다. 촛불의 일렁거림으로 인해 방 안의 그림자는 기괴하게 흔들렸고 방 안의 분위기는 어둠보다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최베드로는 소녀가 묶여 있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최베드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고, 소녀를 내려다보는 눈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소녀는 최베드로가 다가오자 더욱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고, 최베드로를 향해 위협을 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최베드로는 밖에서 기다리는 일남을 안으로 불렀다. 일남은 최베드로의 목소리를 따라 어둔 방 안으로 들어왔고 안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동도 없는 최베드로를 보고 일남은 저절로 그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 무슨 일이시죠?

일남이 안으로 들어와 최베드로의 옆에 서서 소녀를 쳐다보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 이... 이건...

최베드로는 일남을 보고 손가락을 들어 입을 가렸다. 일남은 그런 최베드로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 통역해 주십시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떡였다. 최베드로는 소녀를 쳐다보며 가슴에 걸린 십자가를 손에 쥐었다.

- 너는 누구냐?

최베드로의 말을 일남이 중국어로 물었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 없이 그들과 반대쪽 방향으로 누웠다. 일남은 초조한 듯이 소녀를 향해 다시 물었다.

- ?是??(너는 누구냐?)

그런데 그 순간 소녀의 몸이 휙 돌면서 최베드로와 일남 있는 쪽으로 달려들 듯 튀어 올랐다. 일남은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최베드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 악령이로구나.

최베드로가 그렇게 말하며 일남을 흘끗 쳐다보았다. 일남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 ?是魔鬼。(너는 악마구나.)

일남의 말에 소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뚝 멈추더니 최베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최베드로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 네 놈은 누구냐?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한 말이었다. 일남이 최베드로에게 말을 전하자 최베드로는 소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 나는 중요하지 않아. 네 놈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최베드로의 말을 일남이 전하자 소녀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미친놈.

일남은 그 말을 최베드로에게 그대로 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베드로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욕이라는 걸 알았다.

- 네 놈은 다른 부류로군.

최베드로의 말을 들은 일남이 그 말을 전하자 소녀는 최베드로를 향해 침을 뱉었다. 최베드로를 향해 날아오는 침이 최베드로의 옷에 닿자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남은 그 모습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최베드로를 쳐다보자 최베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일남은 살면서 이렇게 무서운 경험을 자신이 했던가 생각했다.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대는 격전장을 겪어봤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거나 민첩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부분이었다. 일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최베드로는 그런 소녀의 이마를 짚더니 침대 위로 눕혔다. 최베드로의 손길에 소녀는 침대로 눕게 되었고 최베드로는 소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

- 不要?我!(건드리지 마!)

소녀의 외침을 일남이 재빨리 통역을 했지만 최베드로는 묵묵히 소녀의 얼굴 아래로 손을 내렸고 목덜미를 쓸었다. 그러더니 손이 양 젖가슴 사이에 가 닿았다.

- 快?!我??了?!(꺼져! 죽여 버릴 거야!)

일남은 통역할 정신조차 없었다. 소녀는 발광하듯이 몸을 뒤틀었고 최베드로는 날카로운 눈으로 소녀의 전신(全身)을 훑었다. 최베드로의 손이 복부에 와서 닿자 소녀는 더욱 몸을 들썩였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최베드로는 여전히 무표정한 태도로 소녀의 배를 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최베드로의 손이 소녀의 몸에서 떼어지자 소녀는 자리서 벌떡 일어마 최베드로를 물려고 하였다. 최베드로는 몸을 살짝 돌려 소녀의 공격을 피하고는 일남에게 말했다.

- 이제 대강 알았으니 나갑시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은 장막을 걷고 방 밖으로 나왔다. 장막 바깥에는 소녀의 가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최베드로와 일남을 쳐다보았다. 최베드로는 알남에게 고개를 한 번 끄떡하며 말을 했다.

- 악령에 사로잡힌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에 의아한 듯이 최베드로를 쳐다보았다. 최베드로는 다시 한 번 일남을 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을 가족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가족들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 그럼... 무.. 무엇입니까?

소녀의 아버지가 묻자 최베드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행동 패턴은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악령에 사로잡힌 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신체 변화나 또 신성 모독이나 방언 같은 걸 보이지 않는군요. 일단 며칠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소녀의 엄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에도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최베드로는 그럼 가족들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일남도 최베드로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 무시무시하더군요.

일남의 말에 최베드로는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 처음 보신 것치고는 담이 크시군요. 저는 처음에 도망쳐 나왔습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일남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저도 사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신부님은 대단하시군요.

일남의 말에 최베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 고통을 받는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더한 것도 해야 하는 임무지요.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간 자신이 보아온 원 회장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적 경지를 느꼈다. 일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최베드로에게 물었다.

- 그런데 신부님.

최베드로는 일남이 입을 열자 일남을 쳐다보았다. 일남은 최베드로와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 깊어 끝단 데는 모를 것 같은 눈이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기분이었다. 일남은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했다.

-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보기엔...

최베드로는 일남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영화에서 보면 악령에 사로잡힌 이가 저렇게 행동을 하지요. 하지만 행동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지요. 일단 몸 안에 이질적인 존재가 있으면 신체 활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상한 행동은 기괴한 행동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 소녀는 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답니다. 아까 제가 통역을 부탁했지요? 악령에 사로잡힌 이는 통역이건 다른 나라 말이건 못 알아듣거나 혹은 모두 알아듣지요. 그런데 소녀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는 알아듣는데 제 말은 못 알아듣는 걸 보면 확실히 다른 성격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 그렇군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일남은 진심으로 최베드로에게 감복을 했다.

- 그런데 왜 며칠간 보자고 하셨지요?

최베드로는 일남의 말에 잠깐 침묵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 저의 제자 마르티노 때문입니다. 분명 그 녀석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군요. 그럼 며칠간 쉴 만한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일남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최베드로를 데리고 동네에서 그나마 가장 시설이 좋은 모텔로 갔다.

- 워낙 낙후된 동네라...

일남이 민망해 하며 말을 하다 최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잠만 잘 수 있으면 됩니다. 이곳도 저에게는 궁전 같군요.

일남은 최베드로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일남은 살면서 처음으로 이런 신부가 있는 성당이라면 공안의 눈을 피해서라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럼 쉬십시오.

일남이 문을 닫고 나가자 최베드로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무언가 있다. 하지만 그게 뭐지?'

최베드로는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한낮에서 해가 약간 기울었지만 여전히 날은 환했다. 최베드로는 길을 걷다 시장이 보이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일남은 가급적이면 중국에서는 혼자 다니지 말라고 당부 아닌 당부를 했지만 최베드로는 이곳의 상황과 분위기를 알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시장 안은 여느 시장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만 이국적인 먹거리들과 중국어만이 이곳이 중국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최베드로는 시장을 걷다가 시장 안쪽에 있는 채소 가게 앞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린 여자 아이가 마치 넋이 빠진 것처럼 멍하게 채소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두 눈은 풀어져 있었고, 어깨는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선 침이 흘러내리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베드로는 여자 아이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파느라 소리를 치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물건을 가게 안으로 옮기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 이 여자 아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조그만 관심은커녕 마치 이곳은 시장 안과 격리된 공간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 저 여자 아이는 뭐지?

최베드로는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 아이에게 주변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그 여자 아이가 원래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거나 다른 하나는 관심을 두면 안 되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최베드로는 가만히 멈춰 서서 여자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분주하던 손길이 서서히 멈추며 시장 안의 사람들이 모두 최베드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최베드로는 모두의 눈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최베드로는 침착한 표정으로 여자 아이가 앉아 있는 앞에 놓인 채소를 들고 말했다.

- ?是多少价格?(이것은 가격이 얼마입니까?)

그러나 여자 아이는 최베드로를 보며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최베드로는 그런 소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안에 있던 여자가 뛰어나오며 말했다.

- ??什?要出??(왜 밖에 나온 거야?)

여자는 어린 여자 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최베드로에게 물었다.

- ??什??(뭐 사려구요?)

최베드로는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아까 손에 들었던 채소를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여인은 손가락 세 개를 펴며 말했다.

- 3元。(3위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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