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8화 (12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4. 진행된 사건(6)

- 그래..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나봐.

원호는 세현이 그렇게 인정을 하자 더 할 말이 없었다.

- 제가 알던 원장님의 모습이 아니군요. 조금 실망입니다.

세현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만 끄떡였다.

- 그 병원 담당의랑 알고 있어서 좋게 마무리 했기에 망정이지...

그러면서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신부님. 아무리 그래도 중환자를 그렇게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석호는 원호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석호의 말에 원호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 그 넋 빠진 수도사가 통성기도를 크게 해서 빨리 알아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여긴 치료실도 없는데.

지수가 기절을 했을 때, 원호는 지수의 상태보다 소라의 상태가 더 심각하다는 걸 알고 소라가 입원해 있는 병원 쪽으로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 병원에 있는 소라 담당의가 원호와 대학 동창이었고, 그 쪽으로 이미 특수 차량을 병원으로 이미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걱정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 수도사 하나가 미친놈처럼 울부짖어 대서 가봤더니 환자가 없더라구. 그 때 감이 오더라구. 엄마를 보기 위해 빼돌렸구나하고.

원호는 전화를 끊고 암실에 소라를 잠시 대기시키다가 특수 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돌려보내고 석호와 세현을 사무실에서 만나 한소리를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 아무튼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원호는 다소 불쾌한 듯이 세현과 석호에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현이 따라 일어나며 밖으로 나왔다.

- 원호 씨,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세현의 말에 원호는 조금 퉁명스럽게 얘기를 했다.

- 원장님,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이 얘기를 바꿨다.

- 그런데 원호 씨도 보지 않았어? 딸을 만났을 때 바뀌는 지수 모습 말야.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원호가 세현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그러나 세현도 지지 않고 얘기를 했다.

- 그게 중요한 거야. 물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건 잘못된 일이지만, 지수 씨가 어떤 약물이나 상담에도 효과가 없었는데, 딸을 보니까 나아졌잖아.

세현의 말에 원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지만, 솔직히 가망 없는 환자입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이 발끈하며 얘기를 했다.

- 그게 의사가 할 말이야?

하지만 원호도 답답하다는 듯이 얘기를 했다.

- 딸을 만나서 잠깐 호전된 건 어쩌면 갑자기 생긴 모성애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모성은 의학적으로도 특이한 경우니까요. 하지만 만약 계속 딸과 있는다고 해서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세현은 원호의 말에 수긍을 했다.

- 맞아. 그렇겠지.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세현의 말에 원호가 의아한 듯이 얘기를 했다.

- 왜 지수 씨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많으시죠?

원호의 말에 세현이 입술을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하나 가늠을 하고 있을 때, 원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혹시...

원호의 의심스러운 말투에 세현은 그에게 무언가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그냥 개인적인 관심이야. 무병 환자에 대한 치료에 대해 알아보고 있거든.

세현의 말에 무언가 잘못된 것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원호가 깜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 그렇군요.

- 얼마 전 병원으로 상담 온 사람이 내가 봤을 때, 무병 초기 증상 같았거든. 그래서 신부님께 부탁드려서 다른 환자를 알게 된 거지.

세현의 말에 원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원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지만 세현은 무시를 하고 자신의 얘기를 이었다.

- 그런데 생각보다 무섭네. 뭐 마스터랑 원호 씨가 의학적으로 접근했는데 실패했고, 신부님이 의식을 거행했는데 실패했으니... 이제 무당한테 신내림을 받는 것 외에는 없는 건가?

세현의 말에 원호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런 미신에 환자를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아까는 가망 없는 환자라면서? 가망 없는 환자에게 뭔들 못하겠어? 지수 씨 남편에게 알려서 신내림이라도 해봐야지.

세현이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자 원호가 뒤에서 소리쳤다.

- 그건 안 됩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돌려 원호를 쳐다보았다. 원호는 얼굴마저 빨개지면서 얘기를 했다.

- 신내림이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남편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이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 남편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원호 씨가 어떻게 알아? 저런 최악의 상황에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수단까지 가는 게 가족이야.

세현의 말에 원호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 원장님께서 이 결과에 대해 책임지실 겁니까?

세현은 원호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 얘기를 했다.

-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 그럼 우리 병원으로 트랜스퍼(transfer)해. 내가 끝까지 책임질 테니까.

- 원장님!

그러나 이번에는 세현이 원호를 다그치며 말했다.

- 물론 의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인 줄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최후의 방법이잖아. 원호 씨도 알잖아. 검증은 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강신무(降神巫)가 존재한다는 걸. 나도 지금까지 의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원호 씨도 치료와 회복에 대한 확신이 없잖아? 그렇다면 의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세현의 말에 원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자신보다 의학적 지식이나 임상 경험이 풍부한 세현에게 의학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도 무의미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 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원호의 말에 세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주치의로서 소견인가?

- 네.

- 알겠어. 주치의로서의 소견은 받아들이지. 하지만 남편을 설득하는 일에 대해서는 주치의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얘기한 방법을 택할 때에는 내가 주치의로서 책임을 지도록 할게.

세현의 말에 원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 때 사무실 안에서 석호가 조금 경직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 이번 일은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석호가 인사를 하며 세현을 쳐다보자 세현 역시 원호에게 마지막 얘기를 했다.

- 의사는 환자를 위한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아무튼 오늘 일은 나도 미안해.

석호와 세현이 멍하니 서 있는 원호를 두고 병원 밖으로 나섰다. 차에 탔을 때 석호가 세현에게 말을 꺼냈다.

- 슈테판 추기경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세현은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싶어 석호를 쳐다보았다.

- 원래 엑소시즘을 거행하기 위해서는 바티칸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고, 그 이후에 의식을 거행할지의 여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일은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화를 내시진 않았지만,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 무슨 말씀이죠?

- 제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저버렸다고 하시더군요.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었다고 얘기를 하니까 오히려 제 행동이 그 아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 것이라고 그러시더라구요. 그 의식을 거행하는 순간 아이는 '엄마'가 진짜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믿게 되고, 그 때문에 더 마음의 상처가 될 거라는...

석호의 말에 세현은 할 말이 없었다.

-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이번 일이 해결되면 바티칸으로 돌아가 처벌을 받을 생각이에요.

세현은 조금 넋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석호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부추겨서 이런 행동을 하게 한 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되었다.

- 신부님 잘못만은 아니에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 슈테판 추기경님께서는 아이의 마음을 잘 다독여 주라는 얘기만 하셨는데... 저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아서요. 어쩌면 눈앞의 것만 따르다가 더 큰 걸 놓친 것 같아요.

석호는 시동을 걸고 서울 쪽으로 향했다.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한참을 창밖만 보던 세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 원호 씨 행동이 이상했어요. 지수 씨를 실험 대상으로 여기는 듯 했어요. 마치 그들처럼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세현은 정면을 쳐다보며 얘기를 했다.

- 지수 씨한테 강신 의식을 할 예정이에요.

그 말에 석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 무당의 운명이라는 말인가요?

세현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제 생각에는요. 저는 사실 신부님께서 하시는 엑소시즘이나 무당들의 굿 같은 것은 믿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경우와도 일치하지 않더라구요. 이럴 때 의사로서 아직 한계를 느껴요.

- 세현 씨가 한계라고 얘기한다면 현재 의술의 한계겠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 아무리 지식을 주입받고,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해도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그 말끝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석호 역시 입을 꾹 다물며 인정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 지수 씨 굿을 할 때에는 저 혼자 갈게요.

지수의 말에 석호가 빠르게 대답했다.

-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저 역시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하거든요.

세현은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런데 굿으로도 안 되면 어떻게 하죠?

세현의 말에 석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그것보다 두려운 건... 어쩌면 지수 씨가 무병이 아닐 경우입니다. 아까 세현 씨의 말처럼...

석호는 다음 얘기가 두려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세현 역시 석호가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고 있는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 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일이죠.

두 사람이 탄 차는 어느새 강남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저 멀리 세현의 사무실이 보이자 석호가 얘기를 했다.

- 날짜가 정해지면 말씀해 주세요.

- 네. 조심해서 가세요.

세현이 차에서 내리자 석호는 소라가 있는 병원을 향해 갔다.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었을 오필두 수도사와 자신이 상처를 준 소라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다.

- 아직 수양이 부족해...

석호는 혼잣말을 지껄이고는 병원 쪽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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