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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7화 (12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4. 진행된 사건(5)

원호는 세현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좀 그런 게 있어. 내가 풀지 못한 숙제를 풀어줬다고 할 수 있지.

세현의 알 수 없는 말에 원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편 정신병원 지하 주차장에는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과 석호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세현 씨가 가능하다고 해서 무작정 찾아왔지만, 시간이 길어지는 걸로 보아 무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로브를 뒤집어 쓴 소라가 석호에게 말을 했다.

- 저 아줌마랑 친해요?

소라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토라진 목소리였다. 석호는 소라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음... 친하다기보다는 저 분이 제 고민을 들어주시지요.

석호의 말에 소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 저도 신부님 고민 들어드릴 수 있어요.

석호는 그런 소라를 룸미러로 쳐다보며 말했다.

- 고마워요. 하지만 지금은 엄마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놀라서 대답했다.

- 네. 알겠어요.

그 때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는 세현의 모습이 보였다. 세현은 석호와 소라가 앉아 있는 차 앞으로 와서 얘기를 했다.

- 30분이에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세현이 뒷문을 열어주자 로브를 뒤집어 쓴 소라가 냉큼 내렸다. 세 사람이 원호 앞으로 다가가자 원호는 조금 당황하며 말을 했다.

- 저.. 로브 쓰신 분은...

세현은 그 순간 웃으며 말했다.

- 바티칸에서 파견된 뛰어난 사제님이라고 알면 돼.

원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원장님 부탁이지만 제가 허락할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밖에 없습니다. 병실 CCTV를 제어할 수 있는 시간이 30분 내외여서요.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호는 지수가 있는 1001호를 향해 걸어가면서 석호나 세현이 들으라고 얘기를 했다.

- 이건 비밀로 해야 합니다. 병원 안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특히 엑소시즘 같은 것은 더더욱 금지되었으니까요.

원호의 말에 석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알겠습니다.

그 때 세현이 말을 받아서 이었다.

- 엑소시즘이라... 나도 정신과 의사로 엑소시즘이 궁금했는데...

세현의 말에 원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원장님 많이 변하셨네요. 예전에 저한테는 의사로서의 사명감은 의학적인 것에 있다고 하셨는데...

원호의 말에 세현이 웃으며 말했다.

- 나이 먹으면 그렇게 돼.

세현의 말에 원호가 놀란 듯이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아직 한창 젊으신데요. 저랑 같이 있을 때보다...

원호의 말에 세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 이유를 아는 석호가 말을 끊으며 얘기를 했다.

-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니까 모두 조금 떨어져 계셔야 합니다.

석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로브를 뒤집어 쓴 소라는 그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걱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때 석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요.

석호의 말에 알 듯 모를 듯 소라가 고개를 끄떡였다. 1001호의 문을 살짝 열자 안에서 지수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냄새가 나는구나. 또. 으히히히. 아주 더러운 냄새가...

석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세현과 원호가 뒤따라 들어왔다. 뒤에 로브를 뒤집어 쓴 소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수는 침대에 두 손, 두 발이 묶인 채 머리가 산발이 된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라는 충격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도저히 자기가 알고 있는 엄마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소라가 받은 충격을 짐작한 석호가 소라의 옆에서 조그맣게 말을 했다.

- 엄마가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 왔지만, 의식을 보기는 힘들 겁니다. 밖에서 기다려도 돼요.

석호의 말에 소라는 크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니에요. 볼 거예요. 엄마가 치료되는 걸 볼 거예요.

소라의 말에 원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그냥 수도사라고 알아두면 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게.

원호는 지수의 딸이 희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그녀의 딸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 세현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원호가 느끼기엔 세현이 의사로서의 자격도, 냉정함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 때 석호가 조금 큰 소리로 얘기를 했다.

- 그럼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모두 구석에서 있어야 합니다.

석호는 세현을 한 번 흘끗 보며 소라에게 조그맣게 얘기를 했다.

- 저... 저 아줌마 옆에 있어요.

소라는 긴장을 했는지 석호의 농담에도 웃지를 않고 고개만 끄떡였다. 모두 한 걸음 물러서자 석호가 가방 안에서 성수와 성경을 꺼냈다. 지수는 눈이 뒤집히며 소리를 질렀다.

- 오냐. 왔느냐. 히히히. 네 놈이 어떤 걸 준비했는지 보자. 저 의사 놈처럼 약만 먹이고, 바늘로 찔러만 댈 테냐?

석호는 지수의 말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성경책을 꺼냈다. 그리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조그맣고 낮은 목소리로 올리는 기도는 곁에서 듣는 사람도 왠지 모르게 성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수는 혼자 낄낄거리며 말했다.

- 그 놈 고약하구나. 히히히. 네 놈에게선 새로운 냄새가 나.

그러다가 고개를 휙 돌려 로브를 뒤집어 쓴 소라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 네 년은 뭐야? 냄새가 안 나. 냄새가...

지수의 말에 소라는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세현이 소라를 끌어 자신의 옆에 바짝 끌어 붙였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소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 긴장하지 마요.

옆에 서 있던 원호 역시 세현의 옆으로 조금 다가가 붙었다. 세 사람이 조금 가깝다 싶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한 쪽 구석에서 기도를 끝낸 석호가 지수 곁으로 다가갔다.

-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석호의 말에 지수의 눈이 커지면서 말했다.

- 히히히. 예수쟁이... 하지만 피는 못 속여. 히히히히.

지수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이며 지수에게 얘기를 했다.

- 몸에 깃든 악령을 몰아내려 왔습니다.

석호의 말에 지수가 갑자기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 악령? 히히히히히히... 내가 악령이라고? 히히히.

지수의 그러한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석호는 한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다른 손에는 성수를 쥐었다. 그리고 지수 앞에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에게 성령의 힘을 내려 이 모진 고문에 시달리는 여인을 구원하게 하소서.

석호의 우렁찬 목소리를 비웃듯이 지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성령의 이름? 네 놈의 힘을 감추고 남의 힘을 빌리고 있구나.

석호는 지수의 말을 무시하고 지수에게 성수를 뿌리며 외쳤다.

-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힘으로 이 불쌍한 여인을 구원해 주소서.

그러나 성수를 맞고도 지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지껄였다.

- 네 이놈. 예수쟁이 탈을 뒤집어 쓴 네 놈이 과연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 네 놈의 피도 알고 있으렷다.

석호는 지수에게 다가서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좀 더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 이 여인의 영혼을 정화하시어 주님의 품에 안기게 하소서. 거룩하신 베드로께서 반석 위에서 성령을 이었듯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힘으로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지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 으하하하하. 가소롭구나. 네 놈이 그저 바라는 이가 그들이란 말이냐. 내가 악귀란 말이냐. 네 이놈. 네 놈도 얼른 엎드려 절을 하거라.

그 순간 석호가 쥔 십자가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외쳤다.

-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이 여인은 구원하도록 힘을 주소서.

석호의 외침에 지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소리를 질렀다.

- 네 이놈! 그래. 네 놈이 믿는 힘이 어떤지 구경이나 해보자. 으하하하. 네 놈은 나를 몰아낼 마음이 없구나.

지수가 그렇게 말을 하자 지수가 묶여 있던 침대가 마구 들썩거렸다. 석호는 손에 힘을 주어 지수의 머리를 누르며 기도를 이어갔다. 침대의 흔들림과 지수의 몸의 떨림이 멈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지수의 팔에 힘이 들어가 팔을 묶고 있던 줄이 풀리며 걸려 있던 쇠가 튕겨 나갔다. 그 튕겨 나간 걸쇠 중 하나가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향해 갔다. 세현이 나서서 막으려고 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소라의 팔에 스치고 지나갔다.

- 악!

소라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석호와 세현, 원호가 모두 놀라서 소라 쪽을 쳐다보았다. 원호가 얼른 로브를 쓴 소라의 팔을 걷었다.

- 안 돼요!

소라가 외치며 팔을 덮으려고 했지만 형광등 아래로 소라의 팔이 그대로 드러났다. 진물이 흐리고 거북 등껍질 같은 소라의 팔이 드러나고, 그 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석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 불 꺼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벽에 있는 스위치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지수가 마구 비명을 지르며 세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무서운 힘으로 세현을 밀어냈다. 그리고 소라 옆에 있던 원호 옆으로 다가가 원호마저 벽으로 밀어버렸다. 소라는 얼른 자신의 팔을 로브로 덮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미친 표정을 한 지수가 소라의 로브에 손을 대고 있었다. 석호는 재빨리 몸을 던져 지수를 막으려 했지만, 지수는 달려오는 석호를 밀쳐냈다. 석호는 그 반동으로 벽 쪽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 안 돼!

석호가 안타깝게 외쳤지만, 지수는 소라의 로브를 벗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지수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던 침대 시트를 소라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걸쇠들을 던져 형광등을 깨뜨렸다. 펑펑 소리가 나며 형광등이 깨지자 병실은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비추는 곳 외에는 모두 어둠에 휩싸였다. 사방은 어두워졌지만, 지수의 행동은 뚜렷하게 보였다.

- 아... 아가.. 우... 우리 아가...

지수는 소라 앞에 주저 않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트로 감싼 소라를 팔로 감싸 안았다.

- 우리 아기.. 불쌍한 우리 아기...

지수의 울부짖음에 소라 역시 지수의 품에 안긴 채 울먹였다.

- 어... 엄마...

그 순간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안 돼... 우리 아기는... 절대..

그러다가 평온한 표정이 되어 시트로 덮은 소라를 보며 말했다.

- 우리 아기... 불쌍한 우리 아기... 엄마가... 엄마가...

- 어... 엄마..

그 순간 지수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수는 놀라운 힘으로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의식의 끈을 놓았는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자신을 안고 있던 엄마가 쓰러지자 소라는 놀라서 앞에 있는 엄마를 흔들었다.

- 엄마! 일어나.. 엄마.. 엄마...

원호의 사무실에는 풀이 죽어 있는 석호와 세현, 그리고 무언가 화가 잔뜩 난 원호가 있었다. 원호는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아무리 원장님이어도 이건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세현은 원호가 화를 낼만 하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떡이며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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