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6화 (126/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4. 진행된 사건(4)

석호의 말에 소라는 피식 웃었다. 흐린 불빛에서 웃고 있는 소라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져 보였다. 세 사람이 준비를 마치자 필두는 석호를 보고 마치 큰 임무를 띤 사람처럼 고개를 한 번 끄떡였다. 석호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떡이자 필두는 큰 목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기도를 하던 필두가 시간이 점점 흐르자 감정에 사로잡힌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평소 필두를 재미있는 수도사라고만 알았던 세현조차도 필두의 통성기도에 넋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필두는 주변을 잊은 채 무아지경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세 사람이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로브를 쓴 사람이 석호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리고 세현 역시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된 채 빠른 걸음으로 석호의 뒤를 따랐다. 담당 의사가 뒤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 기도는 다 끝나셨습니까?

빠른 걸음으로 걷던 석호와 세현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석호 등에 업힌 수도사를 보고 놀라며 말을 했다.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세현은 의사 앞으로 가서 길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하셔서 탈진하셨어요.

그 말에 의사는 찬탄의 눈길로 로브를 쓴 수도사를 보았다.

- 음... 과연... 아까 밖에까지 우렁찬 기도 소리가 들렸는데...

세현 역시 진심으로 말했다.

- 저렇게 열정적인 수도사님은 저도 처음 봐요.

세현의 말에 의사는 수도사에게 다가오려고 하며 말했다.

- 그럼 회복실에 가셔서...

그러자 석호가 시계를 한 번 흘깃 보고 말했다.

-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워낙 바쁘시고, 은밀하게 행동하시는 분이라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가는 차 안에서 힘을 차리시고, 다음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의사는 측은한 눈길로 로브를 쓴 수도사를 보며 말했다.

- 아! 성령으로 충만하신 것도 힘든 일이군요.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저를 위해서도 기도를 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네요.

그러자 석호가 말했다.

- 네. 제가 부탁드려보겠습니다.

석호와 세현은 급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라타자 소라는 안에 품고 있던 선글라스를 꼈다. 마스크도 하고 로브로 최대한 자신의 몸을 감쌌다. 세 사람이 병원을 빠져나갈 때 804호 안 어두운 병실 구석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화면에는 야한 영화가 나오고 있었고 그 화면을 뚫어지게 보며 필두를 침을 삼켰다.

- 꿀꺽...

필두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혼잣말로 말했다.

- 어린 양을 구하는 일이니까 괜찮은 거야. 사제님도 그렇다고 하시니까...

차에 올라탄 석호와 세현은 한숨 돌렸다. 석호는 차에 시동을 걸면서 세현에게 말을 걸었다.

- 선생님도 거짓말을 잘 하시네요.

그 말에 세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 그래도 신부님만큼은 아니죠. 호호. 담당 의사가 거절할 것까지 계산해 놓으시다니 신부님이 아니면 사기꾼이 되셨을 것 같아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웃었다. 그런데 그때 세현이 잠시 뜸을 들이며 걱정스러운 듯 얘기했다.

- 그런데 괜찮으실까요?

석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 잠시니까 괜찮을 겁니다만...

석호의 뒷말에 세현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물었다.

- 겁니다만?

석호는 세현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 워낙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라...

- 그런데요?

석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 우리가 밤까지 돌아오지 못한다면... 혹시 밤에 통성기도를 올리실 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석호의 말에 세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에이. 아무리 그래도 몰래 숨어 계신 분인데...

하지만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 하긴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라..

세현의 말에 석호와 세현이 같이 웃기 시작했다. 뒷좌석에서 부대 자루같은 로브가 꿈틀거리며 말소리가 들렸다.

- 냄새가 고약해요.

석호는 그 말에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보았다.

- 최대한 깨끗한 걸 입고 오시라고 했는데....

세현 역시 뒤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 조금만 참아요.

소라는 로브 안에서 눈만 살짝 드러낸 채 쀼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데 신부님.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소라의 말에 석호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의자 뒤로 시선을 돌렸다.

- 옆에 계신 그 아줌마는 누구에요?

소라의 말에 석호는 잠시 당황했고, 세현은 소라의 다소 공격적인 말투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얼굴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 아줌마라뇨.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에요.

석호는 이내 말을 이었다.

-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에요. 의사 선생님이시지요.

석호와 세현의 말에 소라는 더욱 쀼루퉁해서 말했다.

- 아! 그러세요? 두 분이 되게 친한 거 같네요.

소라의 말에 세현은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친하죠. 저는 신부님의 유일한 절친인걸요. 안 그래요?

- 하하하. 그런가요?

석호가 소라에게 장난을 치느라 하는 말에 석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소라는 화가 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 신부님은 아줌마랑 사이가 좋구나.

이 말에 세현은 새침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 아줌마가 아니라니까.

하지만 소라는 그런 세현의 눈치를 외면하며 말했다.

- 신부님이 이런 아줌마 취향일 줄은 몰랐어요.

석호는 소라의 말에 당황하였고, 세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라에게 말했다.

- 에? 아니. 아줌마 취향이라니. 그런 말은 신부님을 모욕하는 거에요.

석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세현이 말을 했다. 로브 안에 있는 소라는 당황하며 말했다.

- 모욕이 아니라... 신부님께서...

세현은 그런 소라에게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

- 신부님께 사과하세요. 아무리 어려도 신부님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세현의 말에 평소 그런 충고를 들어본 적 없는 소라는 조그맣게 얘기를 했다.

- 죄... 죄송해요...

그러더니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그런 소라에게 문득 미안해져서 말을 걸려고 하는데 먼저 소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런데... 아줌마, 신부님 좋아해요?

소라의 말에 세현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이 되었고, 석호 역시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었다.

- 네? 그게 무슨...

그 때 석호가 입을 열었다.

- 오늘 일이 많을 테니까 두 분 다 좀 쉬시죠. 도착하면 깨워드릴게요.

세현은 소라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차가 한참동안 달리자 뒷좌석에서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석호가 룸미러로 로브를 쓴 소라를 한 번 보더니 말을 했다.

-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럴 거예요. 병원에서는 치료만 하려고 하지 인성 교육 같은 건 안 하니까요.

석호는 그 말에 쓴 입맛을 다셨다. 세현은 뒷좌석에 누워 있는 소라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일수록 인성 교육이 더 필요하죠. 나을 수 있다. 남들처럼 살 수 있다. 이런 거요.

세현은 그렇게 누워 있는 소라를 보며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 고통스러울 거예요. 저 알레르기는 피부가 타들어가는 고통이거든요.

세현은 어느 틈엔가 아예 뒤를 돌아 소라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호는 그런 세현과 뒷좌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그런 고통을 평생 안고 가는 게 더 슬픈 일이죠.

세현은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 앞으로 세현 씨가 자주 지켜봐 주세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포르피린증이라... 어렵네요...

세현이 창밖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세현은 자신처럼 평생을 지니고 가야하는 병을 안고 있는 소라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아니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외부 활동도 가능하다는 면에서 소라가 더욱 아프고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고통이었지만, 앞으로의 삶도 나아질 보장이 없다는 게 더 서글픈 일이었다.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얼마를 달려 도착한 원호의 사무실 안에서 세현은 원호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현재 뚜렷한 치료법도 없잖아.

세현의 말에 원호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을 했다.

- 그렇다고 종교로 치료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 같은데요. 원장님한테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원호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나도 전에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그런데 다들 포기하는 상황이잖아. 안 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세현의 말에 원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 그건 제 의견보다 지수 씨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먼저에요.

원호의 말에 세현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 지금은 남편보다 주치의의 의견이 우선이야. 치료의 목적이니까.

세현은 자신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치료의 방법이 바뀌면, 아니 이런 종류의 치료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현이 보기엔 지금 지수의 상태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남편을 설득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 혹시 지수 씨가 앓고 있는 병이 무병(巫病)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세현의 말에 원호는 고개를 저었다.

- 현재 무병은 실체가 없는 거잖아요.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따지고 보면 그것 역시 정신병의 일종이잖아요. 뭐 검증이 안 되는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요.

세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라도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세현은 조금은 단호하게 얘기를 했다.

-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약물 치료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종교의 힘을 빌려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아주 원시적이긴 하지만 말야.

원호는 세현이 왜 그렇게 고집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뭐 그건 그렇다고 쳐도요. 원장님께서 왜 저 사제 일에 열심히 나서는지 모르겠네요.

원호의 말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왜? 원호 씨한테도 내가 저 신부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세현의 말에 원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세현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 나중에 말해 줄게. 나 저 신부님께 큰 빚이 있어. 구원을 받았달까?

- 구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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