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4화 (12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4. 진행된 사건(2)

석호는 불을 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어린 목소리의 격한 반응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구석에 놓인 의자를 들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 알겠습니다.

석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 목소리는 떨리는 듯이 물었다.

- 확인하셨나요?

석호는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일 만큼 크게 고개를 끄떡였다.

- 네. 확인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말했다.

- 아...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거 맞죠?

하지만 석호는 그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당신 어머니는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목소리는 그 말을 부정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신부님도 보셨잖아요.

석호는 그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고 단호하게 얘기를 했다.

- 예. 봤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아주 멀쩡한 정신으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은 채 말했다.

- 신부님께서 성력(聖力)이 강하셔서 그런가 봐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도와주세요.

석호는 그 목소리에 잠깐 침묵을 하다 입을 열었다.

- 제가 생각할 때, 당신의 어머니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석호의 말에 그 목소리는 다소 떨렸다.

- 네? 무슨 말씀이세요?

석호는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하면서 얘기를 했다.

- 당신 어머니는 당신 얘기를 할 때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고, 그때 제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 하지만 당신과도 처음에 얘기를 시작했잖아요!

그 목소리에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건 저 때문이 아니라 저희 어머니 때문에 대화를 나눴다는군요.

석호의 말에 어린 목소리는 석호에게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얘기를 했다.

- 어쨌든 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저희 엄마와 얘기를 하신 분이잖아요.

- 그래서 당신이 나가서 당신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석호의 말에 어린 목소리는 무언가 불안한 듯이 말을 꺼냈다.

- 그... 그런데 제가 무슨 도움이 되죠?

석호는 그 말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풀어 놓았다.

- 당신이 옆에서 같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과 같이 있으면 제 정신으로 돌아오지요.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의 어머니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들어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악령인지 아니면 정신 분열인지 혹은 다른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악령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악령을 퇴치해 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저는...

석호의 말에 그 목소리는 다소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석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더 이상 저 혼자는 어렵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어린 목소리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이 결연하게 말했다.

- 좋아요. 같이 가겠어요. 하지만 먼저 신부님께서 저를 보고 놀라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 목소리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놀라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반대편 커튼 뒤에 불이 켜졌다. 그 빛에 커튼의 그림자 기괴하게 퍼져보였다. 눈앞에 꽃모양이 가득한 침대를 보였다. 그 위에는 작은 노트북이 하나 놓여 있었고, 침대 아래에는 큰 데스크톱 컴퓨터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노트북 앞에는 작은 체구의 사람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고, 선글라스를 써서 더 기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자 빨간 눈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석호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성경에서 보았던 악마의 모습과 같았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얼굴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거북이 등껍질처럼 보이는 얼굴에 고름 같은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모습이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 놀라셨죠? 제 모습이 이래서?

그녀의 말에 석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 아닙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아직 어린 소녀라는 것이네요.

그러나 석호의 말에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사진을 들어 석호에게 주었다.

- 저 원래 이런 모습 아니었어요.

석호는 그녀가 건넨 사진을 보았다. 중학교 1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가 정면을 향해 웃고 있었다.

- 빛 알레르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석호에게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했다. 석호는 그 사진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보았다.

- 빛 알레르기? 혹시 광과민증(光過敏症) 같은 건가요?

석호는 예전에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소녀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단순한 광과민증인데, 그녀가 햇빛이 있을 때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어둠 속을 떠도는 귀신'이라고 불렀었다. 밤에만 밖으로 나와 행동하는 그녀가 악령에 들었다면 그 지역 신부에게 요청을 했고, 그래서 석호와 최베드로가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광과민증' 환자였고, 밖에서 뛰놀고 싶어 했던 소녀는 햇빛이 사라진 밤에만 밖으로 돌아다녔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석호의 말에 어린 목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 의사 말로는 포르피린증(porphyrias)이라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저처럼 햇빛이 아니라 형광등 불빛만 비춰도 이렇게 되는 경우는 처음이래요.

석호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대개 포르피린증은 혈액 때문에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혈액을 수혈하고, 햇빛에 노출되지 않으면 되는 병인데, 이렇게 격리 수용이 될 정도라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석호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노트북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 아! 그럼 컴퓨터는?

그녀는 선글라스와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 이것만 있으면 되죠.

- 그래도 빛이 세어 들어갈 텐데.

석호의 말에 그녀는 혀를 쑥 내밀었다가 집어넣으며 말했다.

- 그래서 제 모습이 이래요. 원래는 노트북 사용 금지에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 몰래 감춰 두고 쓰고 있어요.

- 음...

목소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석호가 미더웠는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저랑 같이 엄마를 치료하러 가실 거죠?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네. 그럼 준비할 것도 있으니까 모레 데리러 오겠습니다.

석호가 그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뒤에서 조용하게 목소리가 들었다.

- 저 3년 만이에요...

석호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돌아서 그녀를 보았다.

- 3년 만에 처음으로 나가고, 3년 만에 처음으로 엄마를 만나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흐느꼈다. 진물과 함께 피눈물이 그녀의 뺨에 흐르고 있었다. 석호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석호는 그녀 앞에 앉아서 그녀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석호의 품에 안겨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 엄마를 고치려면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강해져야 본인의 병도 고칠 수가 있어요.

석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떡였다.

- 네. 고마워요. 그리고 파일은 지울게요.

그녀의 말에 석호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친구에게 연락해서?

석호의 말에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 네? 네...

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그럼 잘 부탁해요. 모레 데리러 올게요. 디비 양.

그녀는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네. 그리고... 제 이름은 소라에요.

석호는 고개를 돌려 고개를 한 번 끄떡였다.

- 네. 알겠습니다. 소라 양!

석호의 말에 소라는 눈물을 닦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에 희미하게 켠 등을 껐다.

- 안녕히 가세요. 신부님.

병실 밖으로 나온 석호는 병실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입으로 조용하게 기도를 하였다. 마지막에 '주님의 힘으로 이 어린 양을 구원해 주소서. 아멘' 소리만 명확하게 입 밖으로 내며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는 목에 걸린 십자가를 꾹 잡아 쥐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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