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4. 진행된 사건(1)
4. 진행된 사건
해가 지고,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도심에는 사람이 많았다. 명동 성당 주변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히려 낮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긴 여름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서울에서의 삶이 낮보다 밤에 더 자유로워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은 해가 지자 집으로 들어가기보다 밖으로만 나오는 것 같아 보였다. 석는 멀리 보이는 성당을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오랜 만이라 그런지 명동 성당이 낯설게 느껴졌다. 석호가 명동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저마다 한마디씩 쑥덕거렸다.
- 잘 생겼다. 신부는 아니겠지.
지나가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 얘는. 신부가 저렇게 입고 다니니?
친구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기 다니는 신자인가 보네. 나도 이참에 성당이나 다녀볼까?
- 풋. 정신 차려.
석호에게 그런 말들이 들려왔지만 한 귀로 흘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제관 앞에는 석호의 연락을 받고 윤 주교가 나와 있었다.
- 장석호 신부. 어서 오시게.
윤 주교와 악수를 나눈 석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그간 무고 하셨는지요? 제가 명민하지 못해 주교님께 자주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윤 주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그야 자네가 바쁜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윤 주교는 석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웃었다.
- 그나저나 여전히 사제복은 벗어놓고 다니는군.
석호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주교님.
- 죄송할 게 뭐 있나. 다만 의복으로 인해 자네가 사제라는 신분을 망각할까봐 걱정이지.
윤 주교는 석호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바티칸에서 한국으로 왔을 때의 얘기라는 것을 알고 석호는 얼굴을 붉혔다.
- 설마. 그럴 리가요.
석호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공항에서 가방을 분실하는 바람에 사제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성당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 때 성당에서 이런저런 잡무를 보던 여자 아이 한 명이 석호에게 한눈에 반해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이 후에 사제라는 것을 알고는 삼일 밤낮을 울고불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엄밀히 따지면 석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 때 이후로 윤 주교는 석호를 놀리느라 임무 차 사복을 입을 때면 석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 그나저나 오필두 수도사님께서 귀찮게 하지 않았나?
윤 주교의 말에 석호는 웃으며 말했다.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셔서 제가 배울 점이 많습니다.
윤 주교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 바티칸에서 온 공문을 오필두 수도사님께서 먼저 보고는 장석호 신부님의 이름을 듣고 흠모해 왔다면서 꼭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보내게 됐지.
- 전 그리 흠모할 사람은 아닌데요.
석호는 그 말에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그런가? 하지만 내 제자 중에는 자네가 가장 뛰어나긴 하지.
- 주교님의 올바른 가르침 때문이지요.
- 입에 발린 소리.
-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 주교님.
- 하하하. 자네한테 오랜만에 선생님 소리를 듣는구만.
석호는 자신의 말실수를 평소에는 타박하던 윤 주교가 만족한 듯 웃자 윤 주교를 쳐다보았다.
- 나도 이제 늙나보이.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자네처럼 스스럼없이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는 이를 보면 반갑고, 즐거우니 말이야.
윤 주교의 말에 석호는 윤 주교를 보았다. 전보다 더욱 흰 머리가 많아졌고, 주름진 얼굴로 인해 더욱 노쇠해보였다.
- 그런데 하는 일은 잘 되는지?
윤 주교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얘기를 했다.
- 그냥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는 중입니다.
석호는 그런 윤 주교를 향해 미소를 띠었다.
- 그렇군. 이번 일은 바티칸에서 특별히 관심이 많은 것 같네.
그러고는 윤 주교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베네딕토 추기경님께서 직접 전화를 다 하셨다네.
석호는 베네딕토 추기경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윤 주교를 쳐다보았다.
- 베네딕토 추기경님께서도 알고 계시는군요.
윤 주교는 그런 석호를 보며 걱정스럽게 얘기를 했다.
- 그런데 조금 다른 쪽으로 알고 계시더군. 하긴 뭐 그런 오해야 늘 있어왔던 것이니까.
- 또 슈테판 추기경님을 몰아세우고 계시겠군요.
석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윤 주교는 오히려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 슈테판 추기경님이야 워낙 훌륭하신 분이니까, 그런 것쯤이야 쉽게 넘기시겠지. 또 조만간 콘클라베(Conclave)에서 슈테판 추기경님께서...
윤 주교의 말에 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제가 보기엔 그런 욕심은 없으신 분입니다.
석호는 그 말을 끊으며 말했다.
- 나도 알고 있지. 하지만 운명이란 건 욕심과 관련 없이 흘러갈 수도 있다네. 이번에 최베드로 신부 역시 주교로 올라선다는 말이 있다네. 물론 본인이 거절하겠지만...
석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 주교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관 앞에 도착했을 때, 윤 주교는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피곤하셨을 텐데 들어가서 쉬게나. 그리고 자네가 여기로 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소포도 하나 와 있네.
-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주님과 함께 평안한 밤 되십시오.
석호의 말에 윤 주교는 빙그레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석호 방으로 들어가자 묵직한 소포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포에는 보내는 이의 주소는 없고 수취인 주소만 있었다. 석호는 전에도 이런 소포를 받아본 적이 있어서 신중하게 소포를 열었다. 소포에 먼저 귀를 가져다 대고 소리를 들어 보았다. 사방이 조용하여 자신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포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석호는 허리를 숙여 소포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희미하게 잉크 냄새가 났고 종이 냄새가 날 뿐 아무 이상이 없었다.
- 후. 내가 예민한 건가?
석호는 소포를 한 번 흔들어 보고는 아무 이상 없음을 알고 소포를 열었다. 안에는 의사복과 패스 카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한 줄의 편지가 프린트되어 있었다.
- 검색 강화. 직접 통과 요망.
석호는 그 프린트를 보고는 인상을 조금 썼다.
- 도대체가...
침대 맡에 앉아서 소포를 덮고 석호는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석호는 오늘 자신의 과오와 그릇된 행동들을 반성하는 기도를 올렸다. 성당 안으로 들어오던 윤 주교는 그런 석호를 뒷모습을 보고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는 조용히 성당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 석호는 일찍 성당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른 사제들에게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죄송했지만, 이번 일이 더 중요했기에 석호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니 그보다도 분명 아침이 되면 오필두 수도사가 자신에게 찾아오리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귀병센터 로비에 선 석호는 하얀 가운을 입고 목에 패스 카드(Pass card)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보안 요원들이 서 있는 검색대 앞으로 다가갔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석호에게 쏠렸다. 이 병원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잘생긴 의사의 출현에 석호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어느 과에서 일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석호는 그럼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건장한 경비원 옆을 지나 검색대에 패스카드를 댔다. '삑'하는 소리가 나며 검색대 문이 열리고 석호가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더 다가가 자동문 쪽으로 가려고하자 뒤에서 건장한 경비원이 석호를 불렀다.
- 저 선생님?
석호는 긴장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돌아볼 때에는 굳은 얼굴을 풀고 말했다.
- 네?
경비원은 석호를 보며 조금 의심하듯이 말했다.
- 어디 가시지요?
석호는 그 말에 순간 긴장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므로 솔직하게 말했다.
- 8층으로 갑니다. 오늘 처음 부임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 오늘 처음 오셨다고요?
석호의 말에 보안 요원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네. 그렇습니다.
석호의 말에 경비원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모니터와 석호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석호는 내심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좋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차하면 검색대를 뛰어 넘어 정문 쪽으로 달리겠다고 마음을 먹고 검색대 쪽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검색대 앞에서 뛰어넘어가려고 할 때 경비원이 환하게 웃으며 석호에게 말했다.
- 아! 오늘 오시기로 한 정호석 박사님이시군요. 미리 성함을 말씀해 주셨으면 오해 안 했을 텐데요. 하하하.
경비원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석호 쪽으로 다가 왔다.
- 아! 네.
경비원은 석호에게 다가가서 다른 쪽 방향으로 손짓을 하며 말했다.
- 엘리베이터는 이쪽 복도에 있습니다. 그 쪽은 계단인데, 얼마 전부터 공사하느라 폐쇄되었거든요. 저는 이 병원에 근무하시는 분은 다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해서 그쪽으로 가시길래 누구신가 했죠. 오늘 처음 오셨으니 모르실 만하죠. 하하하.
-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석호가 미처 몰랐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얘기를 하자 경비원은 가볍게 목례하며 말했다.
-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경비원은 석호에게 호의를 얻고자 하는 말이었는지 좋은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 네? 아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석호는 엘리베이터를 타자 긴장이 풀렸다. 패스 카드와 의사복이야 준비할 수 있지만 신원까지 확실하게 위조를 해 둔 것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석호도 항상 예상외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가슴이 떨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석호는 804호 병실 앞에 서서는 숨을 고르며 노크를 했다.
- 잘 들어오셨네요.
이어 어린 목소리가 들려 왔고, 석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어두운 병실에는 저 멀리 희미한 노트북 화면 불빛만 보였다. 석호는 그 불빛을 따라 안으로 걸어 들어가 침대 옆에 섰다.
- 본인이 직접 하신 겁니까?
석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어린 목소리는 조금 당황한 듯이 말했다.
- 친구가요.
석호는 목소리를 깔고 대답했다.
- 그 친구 분 대단하네요.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하고. 아니 예측보다는 전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러자 어린 목소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컴퓨터만 있으면 다 되니까요.
그 목소리에 석호는 낮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그 전에 불 좀 켜고 얘기를 나누면 안 되겠습니까?
석호는 어둠에 조금씩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사방이 어두워서 뭐가 뭔지 구분이 안 되었다. 석호가 두리번거리며 벽 쪽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어린 목소리는 격하게 소리쳤다.
-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