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20화 (12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3. 미심쩍은 일(1)

3. 미심쩍은 일

두 손이 묶여 있는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창살 사이로 비쳐오는 햇빛 아래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흐리멍덩하고, 팔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외고 있었고, 그녀는 상처 입은 팔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화창한 5월의 햇살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내렸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무심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다시 조금 있다가 퀭한 눈으로 햇빛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원호는 그녀를 제압하느라 팔을 다쳐 팔을 부여잡고 있는 건장한 남자 간호사를 향해 물었다.

- 아직도 그 상태인가?

- 네. 진정제를 주사해서 조금 안정이 되었지만, 상태는 그대로입니다.

- 휴~. 알았네.

남자 간호사는 팔이 욱신거리는지 팔을 풀며 갔다. 원호는 문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젠장.

10층 복도 간호사실 앞에서는 언성은 높지 않았지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수간호사는 전화기를 들어 담당 의사를 호출하고 있었다. 석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수간호사가 전화를 끊기만을 기다렸다. 흰 가운을 입고 머리가 헝클어진 의사 한 명이 다가와서는 수간호사에게 물었다. 그의 가슴에는 정신과 이원호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 무슨 일이죠?

그러자 수간호사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는 듯이 말했다.

- 이 분께서 1001호 환자 분과 면회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원호는 석호 쪽을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1001호 환자분이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그 환자는 면회가 금지된 환자인데요?

원호의 말에 석호는 표정을 풀며 대답했다.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분의 부탁을 받고 얘기를 전하러 왔습니다.

원호는 1001호 환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 얘기요? 그 분과 얘기를 나누신다고요?

- 그렇습니다. 가족분의 얘기만 전달하면 됩니다.

석호의 말에 원호는 어이없어 했다.

- 그 환자분의 상태를 잘 모르시고 오셨나 보네요. 그 분은 어느 누구와도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분 딸을 제외하고요.

하지만 원호는 석호의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 네.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분 딸의 말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 딸의 말이요?

원호는 그 환자의 딸 역시 병원에 입원 중인 것을 알고 있었다. 1001호는 VIP 중에도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환자가 입원하는 곳이라 그와 관련된 사항은 모두 체크가 되어 있었다.

- 혹시 의사십니까?

원호는 딸의 말을 전하러 왔다면 그녀의 딸 주치의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은 엉뚱했다.

- 아닙니다. 신부입니다.

원호와 간호사는 석호를 훑어보았다. 캐주얼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가슴에 꽂고 머리에는 왁스를 바른 전형적인 날라리 모습이었다. 원호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 지금 저보고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겁니까?

하지만 석호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 의심나시면 신원을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원호는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1001호 환자를 진료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어디서 날라리 같은 인간이 찾아와서 신부네, 면회네 떠드는 게 기분이 나빴다.

- 댁이 신부님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석호는 원호의 말투가 바뀐 것을 알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분의 딸의 말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원호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 그건 안 됩니다. 아까 말씀하셨듯이 그 분은 아무하고도 말씀을 나누지 않는다면서요? 딸을 제외하고는.

원호는 이 정신 나간 신부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 혹시 그 분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시고...

석호는 원호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 악령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문제입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원호는 약간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지만 병원 규정 상 면회는 금지입니다.

원호는 이 말을 하고는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섰다. 그 때 뒤에서 석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혹시 이원호 씨 아닌가요?

원호는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 네. 그런데요. 어떻게...

그러다가 자신의 가슴을 보고 픽 웃으며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 제 명찰을 보셨군요. 그럼 전 이만...

- 최세현 씨의 부탁까지 얹어서 해도 안 되겠습니까?

이 말에 원호는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원호는 석호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최세현 씨를 아세요?

석호는 그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호는 ZEN 심리 센터에서 퇴사하고 이곳으로 오면서 세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지만, 지금 있는 백호 정신병원의 원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기에 세현의 추천서가 이곳에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미리 연락을 하지 그러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원호는 전화를 끊으며 석호에게 말했다.

- 제가 오해했네요. 신부님께서도 진작 말씀을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 아! 죄송합니다. 진작 말씀드릴 것을 그랬습니다.

원호의 원망 섞인 말에 석호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그 분을 종교적으로 접근해 보고 싶으시다고요?

- 그런 것보다 딸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분은 아무하고도 말씀을 나누지 않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원호는 다소 심란한 표정으로 석호를 보다가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아닙니다. 저만 가서 만나 뵈면 안 되겠습니까?

석호의 거부에 원호는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이내 석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 음... 괜찮습니다. 현재는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까 아마도 해를 줄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원호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해를 주는 일이요?

- 아까 그 분은 본인이 악마라면서 간호사의 팔을 물어뜯기까지 했습니다.

- 그렇군요.

원호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 아까 상황을 남편 분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편의 부탁을 받고 온 무당인 줄 착각했습니다.

- 전 그 분의 남편은 모릅니다. 그저 딸의 말만 전하러 온 것입니다.

석호는 담담하게 말을 했다.

- 아! 그러시군요. 음... 그 분 남편은 이 일을 모르시는 게 낫겠군요.

- 네. 그럼 저는 병실에 잠깐 가보겠습니다.

석호가 말을 마치고 문을 열며 나오려고 할 때 뒤에서 원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만약 악마를 퇴치하실 생각이시라면 저를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위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석호는 문 밖으로 나가다 말고 원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 악마는 없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행동뿐이지요.

석호는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1001호 문 앞에 석호가 다가가자 안에서 괴성이 들렸다. 목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괴로운 목소리가 목이 잠긴 것처럼 거칠게 들려 왔다.

-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

석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물었다.

- 신지수 씨? 괜찮으십니까?

석호의 말에 커다란 눈을 가진 지수가 잡아먹을 것처럼 석호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괴로운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가 아닌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놈은 냄새가 안 나는구나.

그 말에 석호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농담을 했다.

- 네. 올 때 샤워하고 왔거든요.

그 말에 지수는 미친 듯이 웃었다.

- 하하하하! 이번에 냄새는 안 나는데 정신이 묶인 놈이 왔구나.

석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 어찌 보면 그렇지요.

- 다른 냄새가 나. 다른 냄새가...

지수는 두 손을 묶는 환자복을 입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거렸다. 침대 위에서는 대단히 위태로운 행동이었지만, 지수는 떨어지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멈췄다.

- 넌 예수쟁이로구나.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네. 맞습니다. 하지만...

석호가 다음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지수가 중간에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 예수쟁이라. 예수쟁이... 그런데 너한테선 다른 냄새가 나는데...

석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는 자신이 할 말을 했다.

- 따님의 얘기를 전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자 지수는 눈이 커지면서 온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 으... 으악.. 악....

지수는 컥컥거리며 목이 막힌 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좀 전보다 더욱 고통스러운지 몸이 활처럼 휘었다. 그러면서도 딸의 이름을 불렀다.

- 따... 딸... 미... 미라...

석호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지 않고 재차 말을 했다.

- 네. 당신의 따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말을 가져왔습니다.

지수는 몸을 마구 비틀었다. 쇠사슬로 묶여 있는 침대가 들썩거릴 정도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석호는 여전히 차갑게 그 옆에서 서서 말했다.

- 의사를 부를까요?

그런데 그 때 그녀의 몸이 잠잠해지더니 아까의 광기에 사로잡힌 눈이 사라지고 온화한 눈으로 바뀌었다.

- 제... 제 딸의 말이라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평범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딸의 말이라는 것에 떨림이 느껴졌다. 석호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랐지만 차분하게 대답했다.

-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지수는 고개를 크게 가로 저으며 말했다.

- 무슨 말이시죠? 제 딸은 만날 수 없을 텐데요.

석호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만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꼭 전할 말이, 아니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수는 그 말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힘없이 말했다.

- 미... 미라는.. 잘 지내죠?

석호는 미라의 상태가 어떤지 몰랐지만, 적어도 지금은 모르는 사실도 아는 것처럼 말해야 할 것같이 느껴졌다.

-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수는 두 손이 묶여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석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 무슨 말을 전하라던가요?

석호는 그 말에 지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꼭 말을 전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수 씨의 상태를 확인해 보라고 하더군요.

- 제 상태를 확인하라고요?

- 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석호는 그제서야 자신이 신부라는 것을 밝혔다.

- 따님께서는 지수 씨가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합니다.

- 악령이요. 그럴 수도 있죠.

지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 무슨 말씀이시지요?

- 최근에는 제 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는데, 당신과 마주 하니 가슴을 짓누르던 것이 가라앉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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