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19화 (11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2. 미궁 속으로(4)

철구는 인천항으로 차를 몰았다. 철구가 도착하자 철구를 기다리던 선장이 철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 회장님께서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철구는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그냥 선원으로 위장해서 가는 게 편하니까 그렇게 하죠.

선장은 피식 웃었다.

- 회장님 말씀대로군요. 아무튼 서류는 저희가 다 준비를 해 두었으니까 일단 배로 오르시지요.

철구는 배 위로 올라가 선원들과 같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러자 선원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 철구는 선원들 틈에 끼어서 조업도 하고, 해경 검문도 받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중국에 입항하였고, 상해에 있는 원 회장의 거처로 향했다.

- 어서 오세요.

철구를 보다 원 회장은 반가운 듯이 철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고, 철구는 원 회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건강이 회복되셔서 다행입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작게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를 지었다.

- 죄 많은 육신이 아직 할 일이 남았나 봅니다.

원 회장은 그러더니 철구를 데리고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철구의 앞에 자신이 앉더니 입을 열었다.

- 오자마자 일 얘기라서 미안합니다만...

철구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 어차피 일하러 온 거니까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음... 그럼 일단 이걸 보세요.

원 회장은 철구 앞에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철구는 그 파일을 받아 들고 펼쳐보았다. 안에는 기괴하게 생긴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철구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원 회장은 철구의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원보 병원으로 온 아이들입니다. 원보 병원이 전국에 있는 산부인과들과 연계되어 있어서 희귀병이나 기형인 아이들이 이곳으로 와서 치료를 받지요.

철구는 고개를 끄떡이며 또 한 장을 넘겼다. 그리고 마지막 장까지 읽은 후 파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어떻습니까?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 글쎄요. 기형인 아이들이 특이하긴 하지만, 사실 중국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원보 병원장의 말에 따르면 지금 보신 그 파일의 사진과 같은 기형은 자연적으로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강한 방사선에 노출이 되었거나 아니면 특이한 유전자 구조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말입니다.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파일에서 봤습니다만, 방사선과 유전자 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다시 고개를 끄떡였다.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철구는 원 회장의 부탁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 그런데 저는 광둥어(???)는 못 합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그건 걱정 마십시오. 지금처럼 베이징어(北京語)를 하시거나 그냥 한국어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조사하거나 통역하는 사람을 하나 배치하겠습니다.

철구는 입맛을 다셨다. 혼자서 일하는 것에 익숙한 철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 회장의 의심에는 일리가 있었기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철구는 오면서 내내 궁금했던 사항에 대해 물었다.

-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 이 일은 중국 내에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제게 말씀을 하셨지요?

철구의 물음에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 철구 씨. 전 살아오면서 딱 두 사람을 믿었습니다. 하나는 저의 모든 일을 같이 했던 최 사장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지금 한국에서 세현 씨와 같이 있는 무영입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원 회장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원 회장은 고개를 돌려 철구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런데 이제 세 명이 되었습니다. 바로 철구 씨죠.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절 잘 아시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껄껄 웃었다.

- 알지 못하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지요? 믿는 건 제 의지니까요. 누군가를 알아야 믿을 수 있다면 저는 저도 믿지 못할 겁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웃으며 말했다.

- 제가 회장님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돈을 노리고 사기를 칠 수도 있지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

- 뒤통수라... 철구 씨 같은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는다면 제가 영광일 겁니다.

원 회장은 철구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철구 씨의 눈. 그 눈은 보통 사람의 눈이 아닙니다. 제가 살면서 본, 어쩌면 유일한 눈입니다. 저와 같은 범부(凡夫)가 범접할 수 없는 눈이지요.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조금 시니컬하게 말했다.

- 어차피 도망자에, 심부름센터 직원일 뿐이죠.

철구의 자조 섞인 말에 원 회장은 고스란히 그 말을 받아서 얘기했다.

- 저 역시 살인자에, 졸부일 뿐입니다.

철구는 그 말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 회장님껜 말로는 못 이기겠네요.

원 회장은 철구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 다른 걸로는 다 이길 수 있으니까 그것 하나로 실망하지 마십시오.

철구는 원 회장의 말에 크게 웃었다. 자신도 오랜만에 넓은 가슴을 만난 것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예전 박 형사나 임 박사를 만났을 때 느끼는 존경심과는 다른 자신보다 차원이 높은 정신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에게 철구는 원 회장의 웅대한 기상을 느낄 수가 있었다.

- 감사합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일입니다.

원 회장은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비서를 불렀다.

- 오늘은 늦었으니 저와 같이 식사라도 하고 내일부터 일을 하시지요.

비서가 들어오자 원 회장은 철구와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구는 회장과의 식사가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회장이라면 고급 식당에서 격식을 차리고 먹는 것으로 예약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꺼려졌다. 그러나 비서가 원 회장과 철구를 데리고 간 곳은 조그만 한국 식당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삼겹살과 소주가 놓여 있었고, 한 쪽 구석에서는 족발을 삶고 있었다.

-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무영의 말로는 이런 곳을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철구는 원 회장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 감사합니다. 저야 이런 곳이 좋지요.

원 회장은 철구와 앉아서 얘기를 꺼냈다.

- 지금 중국에도 한류 열풍이 불면서 이런 곳이나 치킨집이 하나 둘 씩 들어서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중국에서 이런 프랜차이즈를 하나 맡아서 하시는 건 어떤지요?

철구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 배려는 감사하지만 그 기회가 언제 될지 모르겠네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 아무튼 오늘은 맘 놓고 드셔도 됩니다.

철구는 그러마 하며 원 회장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어색함이 없이 서로에 대해 얘기를 했고, 철구는 고개를 끄떡이며 원 회장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철구는 자신의 얘기 중에 왜 자신이 그들을 뒤쫓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했을 뿐이었다. 자기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한(恨)은 누구에게 토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도 했지만, 철구는 자신의 과거를 될 수 있는 한 적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우리라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 철구 씨는 철두철미하군요.

원 회장은 술이 한 잔 들어가서 조금 취기가 오를 때 쯤 얘기를 꺼냈다. 철구는 무슨 말인가 싶어 원 회장을 쳐다보았다. 원 회장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좋은 태도입니다. 이거 갈수록 철구 씨가 마음에 드니 어떻게 하지요? 하하하.

철구는 그 말 안에 숨은 의미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이미 철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철구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든 그거야 앞으로의 일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원 회장은 앞에 놓인 소주를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무서운 사람이구나. 회유나 넘겨짚는 것에 넘어오지 않을 정도로.'

원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 한국 소주가 참 맛있군요. 앞으로 다른 술 마시지 말고 이걸 마셔야겠군요.

철구는 원 회장의 너스레에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 저도 중국으로 선뜻 못 건너온 이유가 바로 이 놈 때문이었습니다.

- 하하하. 그럴 만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의중을 살피며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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