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2. 미궁 속으로(3)
- 요즘은 어째 잠잠하네.
한수의 말에 철구가 시큰둥하게 한수를 쳐다보았다. 한수는 코를 한 번 훌쩍이며 말했다.
- 거 뭐시기 있잖아. 너도 요즘은 사무실에서 잠잠하고.
철구는 한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 왜? 내가 요즘 사무실 일에 충실한 게 불만이야?
철구의 말에 한수가 코를 팽 풀며 말했다.
- 너는 말을 해도 항상 그렇게 싸가지 없게 얘기를 하냐? 기억은 돌아왔는데 싸가지는 안 돌아왔나 보네.
한수의 말에 철구가 보던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몸 안 좋으면 먼저 들어가.
철구는 코를 훌쩍대는 한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새로운 사무실에서 곧잘 버틴다고 생각했었는데, 나간 지 육 개월 만에 짐을 싸들고 원래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더니 그대로 사무실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 거 참. 새 건물이라고 담배도 맘대로 못 피우지, 그렇다고 술을 마실 수 있나, 새로 뽑은 놈은 경찰서만 들락거리고, 비서라고 뽑은 기집애는 술집 여직원같이 생겨 먹어서...
새로운 사무실에서 한수는 '심부름센터'나 '흥신소'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든다며 '고민 상담소'라고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했었다. 그리고 어디서 양아치 같은 놈 하나와 한수 말대로 술집 여종업원 같은 여자를 하나 뽑아 놓고는 고급스럽게 운영을 한다며 정장 차림을 고집했다. 하지만 일을 맡는 족족 경찰에 걸리거나 상대방의 고소 협박으로 일을 접어야 했고, 개업한 지 두 달 만에 파리만 날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 두겠다고 나갔고, 결국 한수 혼자 4개월 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다. 임대료가 나가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왔을 것이었다.
- 송충이는 역시 솔잎이 최고야.
한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제일 먼저 했던 말이었다. 철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수를 쳐다보았지만, 한수는 당연히 자신이 와야 할 곳에 왔다는 듯이 짐을 풀며 얘기를 했다.
- 임대료는 반반 부담. 오케이?
철구는 어처구니없었지만 철구도 한수가 없는 동안 나름 쓸쓸했기에 한수가 온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 에이취...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한수가 푸념하듯이 얘기를 하자 철구가 그 말을 받았다.
- 개만도 못한가 보지.
철구의 말에 한수가 '이런 썅...'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너 그러다 언제 나한테 된통 맞는다.
한수의 말에 철구가 웃으며 말했다.
- 내가 죽기 전엔 힘들꺼유.
철구의 말에 한수는 구시렁거리며 웃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 가는 거야? 가면 간다고 말을 하던가.
철구의 말에 한수가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 개만도 못한 놈이 어떻게 말을 하냐?
- 가서 푹 쉬셔.
한수가 밖으로 나가자 철구는 낮에 받은 원 회장의 전화를 곰곰이 생각했다.
'중국에서 의심되는 일이 있는데 이리로 올 수 있겠소?'
철구는 자신이 새마음 병원이나 톰슨 병원을 알아보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알아보려고 해도 정보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철옹성인지 일체의 정보가 외부로 새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철구 역시 신분을 바꾼 상태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 어렵군.
철구는 이 일을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오랜만에 지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사무실은 한동안 장 신부의 거처였지만, 장 신부 무슨 일인지 충청도로 간 이후로 빈 사무실이 되었다. 가끔 세현이 청소를 하러 내려오긴 했지만, 워낙 깨끗한 곳이었기에 따로 청소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철구는 사무실 안에 있는 원탁 테이블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었건 이번 일을 그들과 상의를 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세현이 아래로 내려왔다.
- 할매, 왔어?
철구의 말에 세현이 철구를 째려보았다.
- 할매라고 하지 말랬죠?
- 눈 나오겠네. 그만 째려 봐.
철구의 말에 세현이 구석으로 가서 커피를 타며 말했다.
- 장 신부님은 통화가 안 되던데, 연락 온 거 있나?
철구의 말에 세현이 얘기를 했다.
- 아까 사무실에 오셨었는데, 그들과 관련된 어떤 일이 있다면서요.
- 그래?
철구는 다시 석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변명조로 말을 했다.
- 전화 드렸어야 하는데, 아까 일이 좀 있어서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 상의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지금 오실 수 있습니까?
철구의 말에 석호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했다.
- 한 30분 후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여기 일을...
철구는 석호의 뒤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 ...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해 주시옵고...
철구는 그 목소리에 놀라 석호에게 물었다.
- 누구시죠?
전화기 너머에서는 빠른 걸음 소리와 당황한 석호의 목소리가 같이 들렸다.
- 성령이 충만하신 수도사님 목소리입니다.
그 때 전화기 너머로 또 다시 아까의 목소리가 들렸다.
- 신부님, 어디 가십니까?
석호는 당황하며 철구에게 말했다.
- 여기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가겠습니다.
석호가 전화를 끊자 철구는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 침착하신 분이 왜 이리 당황을 하시지? 수도사는 누구야, 또.
철구의 말에 세현이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세현이 웃자 철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할매는 왜 웃어?
철구의 말에 세현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아까 낮에 병원에 온 수도사님일 거예요.
세현은 낮에 병원에서 있었던 소동을 떠올리며 철구에게 얘기를 했다.
- 아까 낮에 신부님이 수도사님 한 분하고 같이 오셨거든요. 그런데 정말 웃긴 분이셔서..
철구는 입맛을 다시며 세현이 타준 커피를 마셨다.
- 신부님도 이상한 걸로 고생이 많으시군.
철구는 혼잣말처럼 얘기하고는 눈을 감았다.
- 신부님 오면 깨워줘.
철구의 말에 세현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 비서를 하나 두시죠.
철구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딱딱하게 굴지 말고 좀 해 주쇼.
그러더니 세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안락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얼마 되지 않아 코를 골았다. 세현은 그런 철구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런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또 다시 미안해졌다. 하지만 세 사람은 암묵적으로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철구 역시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찾는 일이 우선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들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분노를 안으로 갈무리했다. 세현은 철구에게 미안했지만, 세현 역시 그들을 찾아 자신의 과거를 알아내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분간은 그런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이러한 감정 때문에 세현은 가끔 혼자 우울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얼마 후 석호가 안으로 들어오자 세현이 철구를 깨우지 않았지만, 철구는 저절로 눈을 떴다.
- 오셨어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민망한 듯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 네. 낮에는 죄송했어요.
낮에 세현의 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성령을 충만히 한다며 큰 목소리로 통성기도를 한 필두에 대한 사과였다.
- 아니에요.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철구는 기지개를 켜며 석호를 보며 말했다.
- 오셨어요.
석호는 철구를 보며 웃으며 다가갔다.
- 잘 지내셨어요?
기지개를 다 편 철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보시다시피.
철구의 말에 석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철구는 석호가 자리에 앉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 질질 끌지 않고 얘기할게요. 원 회장이 중국으로 와달랍니다.
철구의 말에 세현과 석호가 철구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다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철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저만요. 중국에서 뭔가 찾으셨나봐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세현을 한 번 쳐다보고는 철구를 보며 말했다.
- 아! 저도 뭔가 잡은 것 같아서요. 그들과 직접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스러운 일이 있어서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 한국에서도 철구 씨가 필요하겠지만, 원 회장님께서 발견한 정보라면 좀 더 확실한 일 같으니까 그쪽으로 가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석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현을 쳐다보았다. 철구도 세현을 쳐다보자 세현은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 그.. 그렇게 하세요. 제가...
세현의 반응에 석호가 말을 했다.
-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한 배를 탔어요. 한 팀이란 얘기죠. 그러니까 세현 씨의 의견도 중요해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말을 이었다.
- 할매가 반대하면 안 갈게. 하지만 내가 있는 동안 책임져야 해.
철구의 말에 세현이 당황하며 말했다.
- 책임이라뇨? 무.. 무슨..
세현이 당황을 하자 철구가 웃으며 말했다.
- 애인도 있는 사람이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냐?
- 뭐에요?
세현의 반응에 철구가 말했다.
- 그럼 모두 같은 생각인 걸로 알고 중국으로 갑니다.
- 언제 나가세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어깨를 으쓱하고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 전화하면 아마 바로 가지 않을까요? 내일이라도?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럼 저랑 세현 씨는 이곳의 일을 처리할 게요. 아! 그리고 중국에 가시면 제 친구 마르티노 신부가 있을 거예요. 제가 마르티노한테 따로 연락해 놓을 테니까 같이 일하시면 좋으실 거에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인상을 찌푸렸다.
- 아! 그 잘생긴 외국인 신부님이요? 전 독고다이가 편한데...
철구의 말에 석호가 말했다.
- 서류 정리나 뭐 시다바리 일 시키시면 돼요.
석호는 바티칸에서도 알아주는 엘리트 신부인 마르티노를 보조로 활용하라는 자신의 말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철구와 세현이 정작 놀란 건 바티칸에서 공부한 석호의 입에서 '시다바리'란 말이 나오자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세현이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시다바리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얘기를 했다.
- 네. '친구'인가 그 영화 보니까, '내가 니 시다바리가.' 그러던데요.
석호의 말에 웃음이 없는 철구도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석호는 철구를 웃긴 자신의 말에 뿌듯해 하며 철구에게 말을 했다.
- 아무튼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연락을 드릴 게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얘기를 했다.
- 그럽시다. 나도 중국에서 알아보는 대로 전화할게요.
그 날의 회의가 끝나고 다음 날 아침 원 회장에게 전화를 건 철구는 그날 저녁 비행기로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 한수는 중국으로 가는 철구를 보며 투덜거렸다.
- 일도 바쁜데, 이번엔 중국이야?
철구가 사무실을 나올 때 한수의 투덜거림을 들은 철구가 캐비닛을 열며 말했다.
- 이거 내일 어떤 돈 많은 아줌마 하나 올 거니까 그 아줌마 주면 되고. 그리고 사례비로 오백 준다고 했으니까 그거 쓰면 되고.
철구의 말에 한수가 서류를 받아들며 말했다.
- 그래? 오백이면... 뭐 당분간 갔다 와도..
철구가 문을 열고 나가며 말을 했다.
- 갔다 올 테니까 사무실 문만 닫지 마쇼.
철구가 나가자 한수가 뒤에서 소리쳤다.
- 죽지 말고 와! 너 없으면 사무실 망하니까.
철구는 한수의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한수가 창문을 열고 위에서 철구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 야! 올 때 그 곰발바닥인가? 그거 하나 가져와라.
철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 한수를 쳐다보았다. 한수는 그 표정에 민망한 듯이 다시 얘기를 했다.
- 힘... 힘들면 빼갈이라도 하나...
철구는 고개를 저으며 시장통을 빠져나갔다. 그런 뒷모습을 보며 한수는 한숨을 쉬었다.
- 냉정한 새끼. 에라 모르겠다. 오늘은 탕수육에 빼갈이나 먹자... 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