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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17화 (11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2. 미궁 속으로(2)

804호 병실은 여전히 어둠에 쌓여 있었다. 환한 여름빛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것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에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변했다.

- 그래서 안 된다는 건가요?

그러나 그러한 목소리의 변화에도 석호는 여전히 나지막하게 말했다.

- 아마도. 바티칸에서도...

이 말에 목소리는 분노한 말투로 말했다.

- 바티칸에서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알고 있어요.

-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러신 거죠?

석호의 말에 이번에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석호는 이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이건 부탁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 협박이건 부탁이건 이 일을 해 주셔야 할걸요.

그 목소리에 석호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다.

-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나요?

이 말에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냉소적으로 바뀌었다.

- 안 해주셔도 돼요. 제가 전화해서 친구에게 문서를 공개하라고 하겠어요.

이 말에 석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 문서가 공개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비웃었다.

- 그 문제야 바티칸에서 해결해야죠. 제가 그렇게 수없이 메일을 보냈지만, 여전히 신부님과 같은 답변뿐이었으니까요.

- 음...

석호는 이제야 일주일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메일을 보내는 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결국 바티칸에서 무시했던 것이 이번 사단의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석호의 침묵에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다시 날카롭게 바뀌었다.

- 이제 볼 일 다 보셨으니 가보세요. 그리고 여기에 오신 건...

석호는 그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달래듯이 말했다.

-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겠습니다. 우선 제가 알고 있는 의사분과 한 번 찾아가서 확인해 보고, 의식이 필요하다면 바티칸에 정식으로 보고하고 제가 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괜찮으시겠죠?

이 말에 목소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의사요? 이미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요? 그 사람들은 항상 같은 말을 하죠.

석호는 그 말을 부정하며 도리질을 했다.

- 그 분은 다를 겁니다.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겁니다.

- 그렇다면....

석호의 말에 어린 여자의 목소리는 조금 생기에 찼다. 석호는 그 타이밍에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 네. 그렇게 하면 그 분이 문서를 폐기하도록 해 주십시오.

석호는 일부러 '그 분'을 힘주어 말했다. 이 말에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희귀병 연구 센터 앞에 서 있는 하얀색 스포츠카 안에서 필두는 화가 많이 났는지 씩씩거리며 앉아 있었다. 석호가 차에 타자 필두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저 안에 들어가서 제가 얼마나 모욕을 당했던지..

그 말에 석호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다녀왔습니다만... 무슨 일이?

그러자 필두는 속사포처럼 말을 했다.

- 디비라는 사람은 없답니다. 저까지 이상한 취급당하고.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필두의 말에 석호는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 그렇습니까? 제가 잘못 알았나보네요. 디비가 아니었나?

석호는 그러면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 어쩌면 이 병원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석호의 말에 필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네? 무슨....

- 저도 연락을 받은 것이라... 다시 전화해서 물어봐야겠습니다.

석호의 말에 필두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다시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 음..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빨리 전화하십시오. 길 잃은 어린 양을 빨리 찾아 도와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필두의 말에 석호는 필두를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그러게요. 수도사님같이 열정적인 분과 함께 할 수 있다니 제겐 더없는 영광입니다.

석호의 말에 필두는 호탕하게 웃었다.

- 저는 하느님의 사제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제 몸을 다 바쳐야지요.

그러나 석호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수도원 일도 바쁘실 텐데 이 일로 제가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제 수도원으로 모셔다 드리고 확실히 알아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필두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 수도원이 문제가 문제입니까? 길 잃은 어린 양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지요. 제가 도울 수 있을 만큼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석호는 당황을 했다.

-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그러나 필두는 단호하게 말했다.

- 아닙니다. 길 잃은 양을 구원해야죠.

그러고는 의자에 푹 눌러 앉으며 로브를 뒤집어썼다.

- 도착하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그동안 성령께 기도를 드리고 있겠습니다.

ZEN 심리치료센터 앞에서 스포츠카가 멈추었다. 석호가 차에서 먼저 내리자 필두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따라 내렸다. 그리고는 햇빛이 창문에 비추는 건물을 눈을 찡그리며 쳐다보았다. 필두는 건물을 쳐다보다가 석호 옆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 여기도 병원입니까?

필두의 말에 석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필두는 신기한 듯이 건물의 입구를 쳐다보며 떠들어댔다.

- 이 병원입니까?

병원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석호가 대답했다.

- 아닙니다. 이 병원에서는 뭐 좀 알아보려고요.

필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 음... 길 잃은 어린 양에 대해서 알아보러 오신 거군요.

필두의 말에 석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습니다!

ZEN 심리치료센터는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너무나도 깨끗한 공간이었다. 넓은 대기실에는 탁자와 의자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책들이 꽂아져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환한 햇빛이 들어와 실내는 무척이나 밝았다. 마치 북 카페와 같은 분위기여서 필두는 안으로 들어오자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석호가 한 탁자로 가서 앉자 필두는 허겁지겁 따라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 진짜 여기가 병원입니까?

필두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마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듯이 예쁜 찻잔을 자신들의 놓고 있었다.

- 네. 여기도 병원입니다.

석호와 필두가 자리에 앉자 간호사가 다가왔다.

- 신부님 오랜만이시네요.

그 간호사는 석호에게 알은척을 했다. 그러자 석호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네. 반갑습니다. 세현 씨는 안에 계시죠?

석호의 말에 간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럼요. 아까 전화 받으시고 저희한테 신부님께서 오시면 바로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아직 상담 중이셔서 조금 있다가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간호사가 옆에서 얘기하는 동안 필두는 간호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예쁜 아가씨가 석호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신부가 이렇게 여자를 홀리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간호사는 석호와 얘기를 하다가 고개를 돌려 석호의 앞자리에서 로브를 뒤집어 쓴 채 음흉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필두를 보고 깜짝 놀랐다.

- 이 분은...

간호사의 말에 필두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 저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수도사입니다.

필두의 말에 석호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고, 간호사는 놀란 표정을 풀지 못했다.

- 아.. 네... 그럼 제가 커피 가져다 드릴 테니까 얘기 나누세요.

간호사는 필두를 보고는 황급히 말을 마치고 프런트 쪽으로 갔다. 간호사가 가자 필두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석호에게 물었다.

- 병원이라면 수술실도 있고, 간호사도 돌아다니고... 여긴 병원이 아니라....

- 여기도 병원이 맞습니다. 단지 심리 치료를 하는 곳이지요.

- 그런데 저 간호사 분은 신부님을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석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커피를 가지고 나와서 두 사람 앞에 놓고는 다시 황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몇몇 간호사들이 석호와 필두 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 저 신부님은 왜 신부님이 됐을까?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안타까워.

한 간호사의 말에 다른 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러게. 저 신부님 처음 온 날 난 꿈까지 꿨다니까. 저런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신부가 됐는지...

- 그런데 같이 온 저 사람 좀 웃긴 것 같아.

- 좀 웃기다고? 많이 웃겨.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라. 저 사람이 치료 받으러 온 거겠지.

이 말에 커피를 가져다 준 간호사가 말했다.

- 그러니까. 오늘은 저 수도산가 하는 분이 치료받으러 온 것 같아. 뭐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한다나?

- 길 잃은 어린 양? 하하하.

간호사의 말에 다른 간호사들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 너무 크게 웃지 마. 듣겠다.

- 하하하.

멀리서 간호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석호는 왠지 그 분위기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필두를 쳐다보았는데 필두는 아무 생각 없이 커피만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 커피 맛이 좋습니다. 예쁜 간호사가 타줘서 그런가요? 하하하.

석호는 그런 필두를 보며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꾹 참았다. 그 때 진료실 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세현이 석호 쪽으로 다가왔다. 필두는 점점 다가오는 세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점점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예쁘다...'하고 말해 버렸다. 석호에게 다가오던 세현은 필두를 먼저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앞에 앉아 있는 석호를 보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세현의 웃는 모습에 필두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 반가워요. 신부님? 충청도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저 같은 중생을 구제하러 오셨나요?

세현의 농담에 석호는 같은 농담으로 받아쳤다.

- 중생은 불교에서 구하는 분들이고, 저는 길 잃은 양을 인도하는 것이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크게 웃으며 옆에 있는 필두 쪽으로 눈을 돌리고는 석호에게 물었다.

-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죠?

석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필두는 석호의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 길 잃은 어린 양을 구하러 온 수도사입니다.

그러자 세현은 석호를 보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 길 잃은 어린 양이요?

그 말에 또다시 필두가 나서서 말했다.

- 네. 길 잃은 어린 양입니다. 어쩌면 외국 양일지도 모릅니다. 디비라고.

필두의 말에 석호는 어깨를 으쓱했고, 세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외국 양? 디비? 그게 무슨 말이시죠?

세현의 말에 필두는 더 이상 대답할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 했다. 그 때 석호가 나서서 세현에게 필두를 소개했다.

- 이 분은 오필두 수도사님이십니다. 시온(Zion) 수도회 소속이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시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아. 그러셨군요. 혹시 오늘은 이 분이 치료를 받으시는 건가요?

세현의 말에 필두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 멀쩡합니다. 그리고 심리 치료보다는 길 잃은 양을 구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필두의 행동에 석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세현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필두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로 웃었다.

- 하하하하하하!

필두에게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석호와 세현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 번잡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 아니에요.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 네. 악의는 없는 분입니다. 제가 수도님께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 잘못이라뇨?

세현의 말에 석호는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석호의 표정을 살피던 세현은 다른 질문을 했다.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 어쩌면 그들과 연계된 일일지도 모르는데요.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 그들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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