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2. 미궁 속으로(1)
2. 사건의 진행
슈테판은 컴퓨터 앞에서 메일 박스를 열었다. 복잡해 보이는 HEX 코드들이 보였다. 그러자 슈테판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책상 안에 넣어 두었던 USB를 꺼내어 컴퓨터에 꽂았다. 그리고 아이콘 하나를 클릭하자 화면 가득 복잡하게 보이던 코드들이 조합이 되며 짧은 두 줄의 글이 보였다.
- 봉인된 문서 찾았음. 삭제 후 메일 전송하겠음.
슈테판은 빙그레 웃었다. 이럴 때 자신의 옆에 최베드로가 없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일이 복잡하게 꼬이려고 그러는지 마르티노 신부가 중국에서 죽은 사건 때문에 최베드로 신부가 중국으로 떠나 슈테판은 홀로 바티칸에서 싸워야 했다.
- 모두들 힘든 시기이군.
바티칸 회의실에는 여러 사제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슈테판이 아우렐리오 정보 국장의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슈테판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퍼져서 바티칸에서는 교황과 경비원들을 제외하고는 다 알고 있다는 말까지 돌았다. 슈테판은 그 상황이 난감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회의에 참여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몹시 흥분한 베네딕토가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 이건 명백한 도발 행위입니다.
그 말에 다른 사제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슈테판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옮겼다. 그런 그를 보며 베네딕토는 더욱 열을 올리며 소리쳤다.
- 이건 바티칸에 대한 도전이자, 하느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저희가 이것을 이대로 묵과한다면 결국 우리는 그들에게 하찮게 보일 뿐입니다.
이 말에 모두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슈테판은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베네딕토에게 말했다.
- 아직 밝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단정짓는 건...
그러나 슈테판의 말에 베네딕토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 슈테판! 당신의 그 발언은 마치 그들을 두둔하는 말 같구려.
베네딕토의 도발적인 말에 슈테판은 오히려 담담하게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 그럴 리가요. 오히려 저는 이번 일을 오판하여 행동하면 오히려 우리가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웃음에 빈정이 상했는지 베네딕토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 지금보다 더 웃음거리가 된 적은 없소이다.
평소 같았으면 베네딕토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떡이거나 아니면 이맛살만 찌푸리던 슈테판은 이번에는 강하게 말했다.
- 아직 대외적으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베네딕토는 크게 '허~'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제들에게 말을 했다.
- 그들이 그 문서의 암호를 해제하고 해석이라도 하는 날엔...
베네딕토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그러자 슈테판이 한마디 했다.
- 그 봉인된 문서는 교황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해석해서 공표하기 전까지는 추기경님도 저도 모르는 내용입니다.
그러자 베네딕토가 핏대를 높여 가며 슈테판에게 소리쳤다.
- 그러니 중요하다는 것이오. 그 봉인된 문서가 세상에 알려지면 엄청난 혼란이 찾아올 것이오.
이 말에 여러 사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커다란 비밀이 이미 새어나간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슈테판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러한 슈테판의 모습을 본 베네딕토는 마치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여러 사제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자 슈테판은 베네딕토를 향해 말했다.
- 혼란이라... 베네딕토 추기경님께서는 그 문서의 내용을 알고 계신 듯이 말씀하십니다. 그 문서가 세상에 나오면 큰 혼란이 생깁니까? 저는 그 문서의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히려 문서의 내용에 따라 혼란이 아니라 안정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말에 베네딕토는 당황을 했다.
- 그... 그건..
슈테판은 베네딕토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 베네딕토 추기경님께서는 그 문서의 내용을 아십니까?
이 말에 여러 사제들이 웅성대며 베네딕토를 쳐다보았다.
-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기에 혼란이 찾아온다고 말씀하시는지요?
그러나 베네딕토는 당황하며 말을 약간 더듬었다.
- 그... 그건... 제가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중요한 내용이니까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그것을 봉인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혼란이 온다고 한 것입니다.
그 말에 슈테판은 또다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그렇다면 그 내용의 공개로 인해 혼란이 올지, 아니면 사람들의 호기심을 해결하는 정도일지는 베네딕토 추기경님께서도 모르시는 일이군요.
- 아무튼... 이것은 바티칸의 심각한 위기요! 빨리 범인을 색출해서 그 녀석들의 존재를 없애야 합니다.
베네딕토는 서둘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베네딕토와 행동을 같이 하는 다른 사제들도 슈테판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밖으로 따라 나갔다. 슈테판은 낮게 한숨을 쉬며 그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 어찌 저렇게...
슈테판의 낮은 읊조림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묻혀 사라졌다.
베네딕토의 사무실은 온갖 성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네딕토는 다른 것은 모두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으나 성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부임했던 아프리카 북부에서 바티칸으로 올 때 그가 구했던 성물들은 챙겨왔다. 베네딕토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 앞에 서 있는 아우렐리오 정보 국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쥐 죽은 듯이 서 있었다. 그의 이마에서는 덥지도 않은데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베네딕토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정보국장을 보고 말했다.
- 그래서 지금 슈테판 추기경이 그 일을 맡아서 한단 말이오?
- 네. 그렇습니다. 조만간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라고...
아우렐리오의 말에 베네딕토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조만간 문서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라...
- 어디선가 문서를 찾아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심증을 굳히듯이 아우렐리오에게 물었다.
- 슈테판 추기경이 이단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단 말씀이시오?
그러자 아우렐리오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베네딕토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를 했다.
-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아우렐리오가 말끝을 흐리자 베네딕토는 안달을 하듯 말했다.
- 의심스러운 것?
- 네. 얼마 전에 저에게 봉인된 문서가 곧 파기될 것이니까 염려 말라고 했습니다. 그냥 저를 안심시키시려고 하는 말씀인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나 베네딕토는 집요하게 아우렐리오에게 캐물었다.
- 슈테판 추기경이 어떻게 그걸 자신한단 말이오?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아우렐리오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베네딕토는 여전히 다그쳤다.
- 무슨 말씀이시오? 빨리 말해 보시오.
- 이것은 바티칸 법률을 어긴 행동이라서...
아우렐리오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슈테판의 일이라 머뭇거렸다. 그러자 베네딕토는다소 은밀하게 말했다.
- 내가 다 덮어 주리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시오.
이 말을 들은 아우렐리오는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슈테판 추기경의 행동이 의심스러워서 인터넷 캐시 파일과 메일 유입 경로를 확인하다가...
- 그런데요?
자신의 직속 명령권자를 의심하여 그를 조사했다는 것이 내심 꺼림칙했지만, 베네딕토 추기경이야말로 차기 교황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알고 있기에 그를 믿으며 말을 했다.
- 한국에서 발송된 메일이 있었습니다.
- 한국에서? 그럼 또 예전에 그 말도 안 되는 메일 말입니까?
베네딕토도 한국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오는 메일을 알고 있었다. 바티칸에서는 애써 그 메일을 무시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메일을 꾸준히 보내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사람을 파견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메일 발신 서버가 다르고, 또 메일 용량이 아주 작은 것으로 보아 다른 메일 같았습니다.
- 다른 메일이라면?
아우렐리오는 마음을 굳힌 듯이 말을 했다.
- 제가 슈테판 추기경에게 해킹을 실행한 곳이 아시아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메일을 받았다는 것은...
- 그럼 그들과 연락을? 메일 내용은 어떻게 된단 말이오?
하지만 아우렐리오는 더 이상 대답할 수가 없었다.
- 메일 내용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아주 짧은 단문이라는 것만 용량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베네딕토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치며 혼잣말 하듯이 말했다.
- 슈테판 추기경이 그들과 내통을? 그렇다면 평상시의 행동이 모두?
그러나 그 말에 아우렐리오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아직 섣불리 단정해서 행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을 문제 삼아 저와 추기경님을 몰아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우렐리오의 말에 베네딕토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들고 긴 숨을 쉬었다.
- 아무튼 고생했습니다. 정보를 더 알게 되면 저에게 지체 없이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티칸의 운명이 정보국장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자 아우렐리오는 허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아우렐리오는 베네딕토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아우렐리오가 나가자 베네딕토는 깍지를 끼고 혼자 읊조렸다.
- 슈테판이 이단들과 내통이라...
베네딕토는 의미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바티칸에서는 봉인된 문서 해킹 사건을 내부자와 공조한 사건으로 규정하였다. 매튜와 에드워드는 절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아우렐리오를 포함한 베네딕토 일파는 이들과 공조하여 외부로 정보를 빼돌린 것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들을 심문해서 그 배후 세력이 누군지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다른 사제들에게 얘기를 했다. 이 말에 바티칸은 발칵 뒤집혔다.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된 것이고 그의 공모자가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말은 곧 그 사람은 그들과의 연계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의심을 받고 있는 사람이 엑서더스 세력을 몰아낸 슈테판이라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분노케 하였다. 매튜와 에드워드가 지금은 부정하고 있지만 곧 그 사실을 밝힐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슈테판이 복도를 지나칠 때 베네딕토가 여러 사제들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베네딕토의 말에 놀라운 듯이 성호를 그었고, 어떤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슈테판이 앞을 지나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슈테판이 살짝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고 할 때 베네딕토가 슈테판에게 말했다.
- 슈테판 추기경께서는 내부에 공모자가 있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베네딕토 추기경의 도발에 다른 사제들은 놀라서 모두 슈테판을 쳐다보았다. 슈테판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 그 말이 사실이라면 아주 놀라운 일이로군요. 아주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에 베네딕토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띠고 말했다.
- 아직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이단 행위를 한 자가 누군지 밝혀지면...
말의 중간을 끊고 슈테판이 말했다.
- 밝혀지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베네딕토는 잔인한 표정으로 말했다.
- 세상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오.
베네딕토의 말에 슈테판보다 다른 사제들이 더 놀랐다. 그러나 슈테판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베네딕토에게 말했다.
- 내부 공모자가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이러한 헛소문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내분의 이유를 따져 묻고, 책임을 물어야지요.
슈테판의 말에 베네딕토는 호탕하게 웃었다.
- 그야 이를 말입니까? 슈테판 추기경님, 우리 내기 한 번 할까요?
베네딕토의 말에 슈테판보다 다른 사제들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저는 내기에 익숙지 않지만, 베네딕토 추기경님과의 내기라니. 더욱이 내기나 도박이라면 하느님의 영을 어기는 행위라며 펄쩍 뛰시던 분이...
슈테판의 비아냥거림에도 베네딕토는 여전히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제가 물질로 내기를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내기 제안은 하느님께서 어느 쪽에 미소를 지어주실까에 대한 내기입니다.
- 그렇다면 내기가 아니로군요. 그냥 각자의 판단이지요.
- 내기가 아니어도, 이제 조금 있으면 누가 옳은지 알 수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은 내기에서 지겠지요. 그리되면.
베네딕토는 그 순간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힘을 주어 말했다.
- 한 명은 빛을 보지 못할 테지요.
베네딕토의 엄청난 말에 옆에 있던 사제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여전히 슈테판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전 일이 있어서 이만.
슈테판이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자 베네딕토는 인상을 쓰며 주변 사제들에게 말했다.
- 조만간 저 오만한 가면을 벗겠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그러며 성호를 그었다. 베네딕토가 성호를 긋자 다른 사제들도 같이 성호를 그었다. 슈테판은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서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바티칸이 돌아가고 있는 것에 몹시 속이 상했다. 베네딕토와 같은 강직한 사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욕망에 사로잡힌 것같이 보여 안타까웠다. 좋은 동료로 같이 지낼 수 있었지만, 조만간 콘클라베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슈테판은 컴퓨터를 켜고 메일 박스를 열었다. 그리고는 USB를 꽂았다. 그러자 석호의 메일이 보였다. 이번엔 다소 긴 메일이었는데, 메일을 읽던 도중 슈테판은 전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다 말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치직거리는 잡음이 잠깐 스쳐지나갔다. 슈테판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했다.
- 도청이라니. 심하군.
슈테판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