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1. 빠져나간 정보(3)
- 오는 동안 너무 더워서요... 서울로 가실 때 저도 같이 좀 가면...
필두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당연히 모셔다 드려야지요. 그런데 제가 먼저 들를 곳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그 곳에 들렀다가 가도 괜찮겠습니까?
석호의 말에 필두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말했다.
- 아무렴요. 먼저 들르셔야죠.
석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필두는 석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성당 뒤켠에 세워진 차를 보자 필두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 이.. 이게..
- 모두 주교님의 배려 덕분이지요.
날렵한 스포츠카에는 선글라스를 쓴 남자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로브를 뒤집어 쓴 남자가 나란히 앉았다. 로브를 쓴 남자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앞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픽 웃었다.
- 사제님께서는 이런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십니까?
필두가 퉁명스럽게 묻자 석호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 다 주교님 덕분입니다. 저의 이러한 행동을 이해해 주시니까요.
- 아니. 스포츠카는 둘째치고라도 사제님께서는 외부로 나가시는데 사제복도 입지 않으시고.
- 그것 역시 주교님 덕분입니다.
- 말끝마다 주교님, 주교님 하시는데 그 주교님께서는 사제의 행동이나 복장에 대해 교육은 안하시나요?
필두는 석호의 세련된 옷차림과 어울리는 스포츠카가 내심 못마땅했다.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금욕적이고 또 외양보다는 마음을 가꾸는데 노력하였다. 일개 수도사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사제 서품까지 받은 신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 저희 주교님께서는 저에 대한 교육에 그다지 신경을 쓰시지 않는답니다.
석호의 말에 필두는 발끈했지만, 그냥 외면하며 말했다.
- 서울로 가신다기에 같이 탔지만, 제가 평소에 듣던 사제님의 모습이 아닙니다요.
필두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석호는 필두의 반응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차 안에서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는 필두를 보며 한마디 했다.
- 더우신데 로브라도 벗으시지요.
그러자 마치 못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하느님의 종이 이정도로 괴롭지는 않습니다.
- 그래도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 그럼 에어컨이라도 켤까요?
사실 차에 탔을 때 에어컨을 켜려고 했지만, 필두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 같은 수도자들이라도 아껴야 한다며 한사코 말렸다.
- 아니 됐습니다. 저는 서울 올라갈 때까지 눈 좀 붙이겠습니다. 도착하면 깨워 주십쇼.
필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의자 깊숙이 뉘었다.
- 네. 그러시지요. 아침부터 피곤하셨을 텐데요.
석호는 필두의 자리의 창문을 조금 내려주었다. 인간적으로 너무 더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필두는 흠흠 거리며 석호를 쓱 한 번 보고는 외면했다.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을 때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그 때 창밖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신기한 듯이 차를 쳐다보았다. 가슴이 깊이 파여 가슴골이 보이는 여자는 스포츠카에 탄 사람들이 궁금했는지 지나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차 안을 쳐다보았다. 석호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가 옆에 앉은 필두를 보았다. 필두는 횡단보도에 서 있던 여자를 쳐다보기 시작하여 차 앞을 지나쳐 반대편을 갈 때까지 고개를 돌리며 보고 있었다.
- 흠흠. 하느님의 종인 수도자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인을 그리 빤히 쳐다보시면 안 되지요.
석호의 말에 필두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 아니. 안 봤습니다.
- 저 노란색 스커트 입은 여자를 보지 않으셨나요?
- 노란색이라뇨? 빨간색인....
사실 그 여자의 스커트 색깔은 빨간색이었다. 석호는 필두를 놀리려고 괜히 잘못 말했던 것이다. 필두도 석호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채고는 순간적으로 입을 닫았으나 이미 빨간색이라고 말하고 난 후였다.
- 아! 빨간색이었군요.
- 에이. 전 잠이나 잘 테니 이따 깨워주십쇼.
필두가 다시 로브를 뒤집어쓰고 눕자 석호는 피식 웃었다. 조금 후에 필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석호는 그런 모습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짓고는 에어컨을 켰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저녁 일이 떠올랐다.
- 병원이라... 왜 병원이지?
한참을 자다가 필두는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더니 석호를 보며 말했다.
- 혹시 주무셨습니까?
석호는 웃으면서 말했다.
- 저는 계속 운전하고 왔는데요.
- 그럼 누가 코를... 혹시 제가 코를 곤 겁니까?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놀라 깨고서는 엉뚱한 소리를 하자 석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 잠들 때서부터 코를 고셨는데요.
- 네? 저는 수도원에서도 조용히 잠들기로 유명한데... 제가 코를 골다니...
- 많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 흠흠... 육체보다는 정신이 피곤해서 그럴 겁니다.
석호를 보던 필두는 또다시 못마땅한 듯이 말했다. 그런 필두를 보며 석호는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 오필두 수도사님. 뭐 하나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석호의 말에 필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저 같은 수도사가 스포츠카를 몰고 멋지게 차려 입으신 신부님을 도와드릴 수나 있나요?
그러자 석호는 좀 더 진지한 말투로 필두에게 말했다.
- 수도사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길 잃은 어린 양을 돕는 일이니까요.
'길 잃은 어린 양'이라는 말에 필두는 석호를 보며 사명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음... 길 잃은 어린 양을 돕는 일이라구요? 그렇다면 당연히 하느님의 사제로 그런 일은 맡아서 해야지요. 무슨 일인가요?
한길병원 주차장은 한산한 가운데 의사들과 간호사들만 지나 다녔다. 입구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붉은 색으로 쓰여 위압적으로 보였다. 멋진 스포츠카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이 저런 차를 몰고 다니나 하는 호기심 때문인지 발걸음을 멈추고는 스포츠카를 주시했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로브를 쓴 수도사인 걸 알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다시 한 번 차와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을 의식이라도 했는지 로브를 쓴 수도사는 황급하게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필두는 병원 프런트에 서서 안내원에게 은밀하게 말을 걸었다.
- 저...
안내원은 컴퓨터를 주시하다가 앞에 사람이 온 것을 알고 상냥한 표정으로 '무엇을...'까지 얘기하다가 놀라서 그 사람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필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디비 씨의 병실을 알고 싶습니다.
필두는 이 일을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말에 목소리를 최대한 깔아서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안내원에게는 더욱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 네? 누구시라고요?
- 디비입니다. 디비.
필두의 말에 안내원은 당황하면서도 컴퓨터 환자 검색에 '디비'라는 환자를 입력해보았다. 그러나 그런 환자는 나와 있지 않았다.
- 그런 환자분은 없는데요.
그러자 필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그냥 디비라고 하면 안다고 하시던데.
필두의 말에 안내원은 '잠시만요'하고는 다시 한 번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 그런 분은 안계시네요.
그러자 필두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며 혼자 읊조렸다.
- 디비라는 이름이 없다. 이상하네. 분명히 디비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안내원은 확인하듯이 말했다.
- 디비라는 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필두가 고개를 들며 넓적한 얼굴을 안내원에게 들이밀었다. 땀이 범벅이 된 얼굴이 앞으로 다가오자 안내원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에 신경 쓰지 않고 필두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 아! 그렇다면 다비인가?
안내원은 필두의 행동에 놀랐지만 다시 한 번 자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 다비요? 그럼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는 검색되지 않았다.
- 그런 환자도 없습니다.
그러자 필두는 막무가내로 말했다
- 없으면 포비나 호비, 캐비, 나비 뭐 다 찾아 주십시오.
필두의 말에 안내원은 당황하며 뒤쪽에 서 있던 경호원들을 쳐다보았다.
- 그렇게 막연하게 말씀하시면...
하지만 필두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단호하게 말했다.
- 꼭 찾아야 합니다. 길 잃은 어린 양이거든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영혼을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필두의 말에 안내원은 어이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 네? 저 그건...
- 길을 잃은 영혼은 올바른 길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디비인지 다비인지 아무튼 그 사람을 만나서 함께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빨리 찾아주세요. 지금 한 시가 급합니다.
필두가 안내 데스크 앞에서 혼자 열심히 떠들 때 그의 옆으로 병원 경호원들이 걸어왔다. 필두 혼자서 떠들다가 옆에 있는 그들을 의식하고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 무슨 일이시지요?
그러자 필두가 당당하게 그들에게 말을 했다.
- 길 잃은 양을 찾습니다. 그 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이죠.
필두의 말에 경호원이 다른 경호원에게 눈짓을 주며 말했다.
- 안내원께서 그 분을 찾으시는 동안 잠깐 저희랑 사무실에 가서 기다리시지요.
그러나 그 말을 필두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 그럴 수 없습니다. 길 잃은 양이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하지만 경호원 중 선임인 듯한 사람이 다른 경호원에게 말했다.
- 이봐 뭐해. 이 분 모시고 사무실로 가자구.
그러더니 필두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는 사무실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필두는 안내 데스크를 향해 팔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 안 됩니다. 저는 수도사로서 임무가...
필두가 경호원들에게 잡혀가는 모습이 보이고 데스크 쪽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석호는 비상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필두는 계단을 오르며 멀어져 가는 필두의 목소리를 향해 조그맣게 '죄송합니다.'하고 읊조렸다. 8층 계단 방화문 앞에 섰을 때, 석호는 방화문을 정확히 반만 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 뭐 이렇게 까다로워.
그리고 재빨리 801호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문틈으로 보니 방화문이 서서히 닫혔다. 방화문이 완전히 닫히자 801호 문을 반쯤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빨리 움직여 건너편 병실인 820호로 들어갔다. 석호는 마치 자신이 첩보원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 병실 한 번 가는데 뭐 이렇게 어렵게 가야 되는 거야.
석호는 801호 문이 닫히자 다시 820호 문을 다시 반쯤 열었다. 석호는 8층은 희귀병 중환자들 병실이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을 금지하고 또 24시간 CCTV를 틀어 놓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내용을 쪽지로 받았을 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쪽지의 내용처럼 8층은 최첨단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석호는 묵묵히 그 말을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8층 코너를 돌자 앞쪽 끝에 804호가 보였다. 그 복도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어두웠다. 석호는 복도로 들어서자 804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804호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병실 안도 몹시 어두웠다. 창문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새어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커튼이 두껍게 쳐져 있었다. 석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어두운 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구석에서는 킥킥 소리와 함께 어린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남의 방에 들어 올 때는 노크를 해야죠.
석호는 그 목소리 깜짝 놀랐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 아! 미안합니다. 저는 어두워서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그리고 석호가 문을 닫고 나가려고 하자 다시 목소리만 들렸다.
- 친구에게 연락은 받았어요. 저를 도와주실 분이라고.
그 말에 석호는 조용히 몸을 돌려 어둠을 응시했다. 여전히 어두웠지만 어느 정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두운 공간 중간에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 글쎄요. 도와드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석호는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어린 목소리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 제 친구가 도와주신다고....
석호는 여전히 다소 냉담한 반응으로 보였다. 한눈에 이 어린 소녀가 해킹의 주인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둠의 악당 흉내를 내듯 어두운 병실에서 얘기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정도의 해킹 실력이면 자신이 그렇게 첩보원 흉내를 내며 들어오지 않아도 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의도적으로 놀린 행동이 괘씸했다.
- 자세한 말씀을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석호는 방문을 닫고 구석에 놓인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리고는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 너무 어두운데 불 좀 켜도 될까요?
석호가 벽을 더듬으며 불을 켜려고 하자 날카롭게 외쳤다.
- 안 돼요!
석호는 이런 장난을 그만 두고 싶어서 한 마디 하려다가 눈에 힘을 주어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희미하게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안 돼요! 불 켜면.
그 말에 석호는 그냥 의자에 주저앉았다.
- 그럼 말씀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