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13화 (113/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1. 빠져나간 정보(2)

사방이 온통 어두운 방은 어디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둠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 화면도 조도가 가장 낮은 상태여서 희미한 불빛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온몸을 이불로 감싼 채, 얼굴마저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린 채 하얀 손은 화면에 나오는 것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 됐어.

노트북 화면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많은 화면들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폭풍의 눈에 들어온 것 같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하얀 손은 재빠르게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했다. 검은 스크린 위로 암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나오고, 그 아래에는 무언가 빠르게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다. 하얀 손은 노트북을 펼쳐서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 아래로 내렸다. 어둠에 익숙한 듯 침대 아래로 노트북을 잘 밀어 넣었고, 침대보로 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잘 덮었다. 그러자 사방은 온통 어둠에 휩싸였다. 하얀 손은 익숙하게 장갑을 벗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 베개 아래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모든 게 준비가 다 끝나. 이제...'

하얀 손은 하루 종일 긴장한 탓이었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지만 사방은 커튼을 쳐 놓은 것처럼 여전히 어두웠다. 하얀 손은 익숙한 어둠에 늘 그러했다는 듯이 문 앞으로 다가가 그 앞에 놓인 식기를 들었다. 그리고 아래에 놓인 점자 쪽지를 손으로 읽었다.

- 오후 2시.

하얀 손은 어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눈살을 찌푸렸다.

- 또 뭘 하려고...

하얀 손은 한숨을 내쉬고 음식 카트를 밀어 침대 앞으로 왔다. 손으로 더듬거리며 음식을 먹고는 다시 마스크를 쓰고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하얀 장갑도 다시 착용하고는 침대 아래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 화면에는 알지 못할 코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코드들이 사라지자 'access complete'라는 문장이 나왔다. 그러자 화면에는 마치 보고서와도 같은 것이 보였다.

- 그럼. 이제 시작이군.

하얀 손은 곧 한 웹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그러고는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번역해 주실 분 찾습니다.'

그러고는 해독한 문서의 일부를 올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노트북에는 여러 창이 떴다.

- 라틴어군요. 그런데 부분적으로 고대 라틴어도 보이고.

- 번역기에서는 불가능 수준이로군요.

- 중간 중간엔 고대 게르만어도 있는 것 같네요.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으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맡아서 하겠다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한 쪽지가 도착했다.

- 지금 이 문서는 봉인해야 할 것으로 교황의 계승자만이 본 문서의 내용을 풀이할 수 있으며 교황은 그 내용을 절대 외부로 노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쪽지가 떴다.

- 아주 위험한 문서군요.

하얀 손은 그 쪽지에 대꾸를 했다.

- 위험한 물건이에요. 그래서 번역을 해 주실 건가요?

- 그렇게 하면 저에게 이로운 게 뭐가 있죠?

새로운 쪽지가 도착하자 하얀 손은 잠시 머뭇거렸다.

- 사례비와 교황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드리지요.

- 훗. 위험한 문서의 대가치고는 너무 싼데요.

- 사례비가 많을 거예요.

- 그런가요? 한 십억 정도 되나요?

이 쪽지에 하얀 손은 잠시 멈췄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 하얀 장갑을 물다가 이내 타이핑을 쳤다.

- 네. 십억을 드리지요.

- 음...

이 대답에 이번엔 반대편이 잠잠했다.

- 두려우신가요?

도발적인 질문이었지만 상대방은 여전히 침묵했다. 이윽고 쪽지가 한 장 떴다.

-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email protected]

- 장난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우선 일부만 보낼게요.

하얀 손은 마우스 포인트가 움직이며 이메일 주소를 클릭했다. 그러나 다른 화면에서는 쪽지를 보낸 사람의 정보를 수집하는 화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손은 메일로 문서 일부를 첨부했다.

- 충북이라...

하얀 손은 접속한 사람의 IP주소를 확인하고는 메일로 문서의 일부를 보냈다. 그리고 그 IP 주소와 관련된 사항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충청도 한 지역의 오래된 성당 앞 텃밭은 여느 해보다 더 풍성하게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텃밭에는 텃밭에서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젊고 잘생긴 신부가 땀을 닦고 있었다.

- 이만하면 올해도 괜찮은 편이군.

신부가 허리를 펴고 자신이 가꾼 채소들을 자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저 멀리서 로브를 쓴 수도사 한 명이 젊은 신부에게 다가오자 쓴웃음을 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 이제 이렇게 한가로운 생활도 끝이로군.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뚱뚱한 수도사가 신부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첩보원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왠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 장석호 신부이십니까?

수도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석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석호는 그의 행동에 보조를 맞추듯이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을 했다.

- 그렇습니만...

- 저는 서울에서 온 오필두 수도사입니다. 신부님께 은밀하게 중요한 일을말씀드리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석호는 그의 행동이 우스웠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뿐더러 오늘처럼 날씨도 더운 날에 로브를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나타난 그가 왠지 웃겨 보였다.

- 은밀하게라...

필두는 석호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필두의 눈빛은 결연해 보였다. 석호는 그런 필두를 향해 말했다.

- 그런데 지금 그 복장이 제일 눈에 잘 띄는 것 아시는지요?

석호의 말에 필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말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 은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석호는 그런 필두가 안쓰러워 더운 텃밭이 아닌 사제실로 데리고 가며 말했다.

- 더우시죠? 안으로 들어가셔서 로브를 벗으시지요.

성당은 따로 냉방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늘했다. 높은 천장과 오래된 성물들, 그리고 일렬로 놓여 있는 때 묻어 있는 의자들이 이 성당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오자 필두는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 좋은 성당이군요. 입구에서부터 성령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고 사제실로 향했다. 그러나 필두는 마치 이런 성당에 처음 온다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왼쪽 벽에 세워진 마리아상을 보면서 감탄했다.

- 아! 이것이 그 유명한 마리아상이군요.

- 저희 성당의 자랑입니다.

이 성당에는 누군지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조각가가 마리아상을 만들어서 몰래 두고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마리아상은 돌로 조각했는데 희한하게도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리아상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기의 마리아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해마다 이 마리아상을 보기 위해 많은 성도들이 이 성당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온기의 마리아상을 직접 본 필두는 자신도 모르게 감격하며, 마리아상에 손을 대려 했다.

- 수도사님. 이쪽입니다.

석호의 말에 필두는 화들짝 놀라 석호 쪽으로 갔다. 석호는 커피를 두 잔 타서 소파로 다가왔다. 필두는 사제실 안도 신기한 듯이 이것저것을 보며 손수건으로 대머리에 흥건한 땀을 닦아냈다. 그러다가 석호를 보고는 잊어버린 일이 생각이 났는지 다시 표정을 굳혔다.

- 서울에서 내려오시다니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지요?

그 말에 필두는 결연하게 말을 했다.

- 너무나도 엄청난 일이어서...

필두의 말에 석호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엄청난 일이라뇨? 교황님께서 파티마의 예언처럼 암살 위협이라도 당하셨나요?

하지만 석호의 말에 필두는 고개를 저었다.

- 무슨...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서울에서 얘기를 듣자마자 이 사실을 신부님께 전하려고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석호는 그 말에 빙그레 웃었다.

- 아! 그러시군요.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은데요? 설마 바티칸이 해킹이라도 당했습니까?

석호의 말에 필두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말을 더듬었다.

- 그... 그건...

그러자 석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 설마 봉인된 파티마의 예언이 해킹당한 건가요?

- 아니 신부님께서 그걸 어떻게...

필두는 석호의 말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석호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필두를 바라보았다.

- 감이죠. 훗.

- 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필두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 이 먼 곳까지 오시기 전에 전화를 하시지 그러셨어요.

- 그... 그것까지는...

석호는 필두의 행동이 몹시 우스웠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대놓고 웃을 수가 없어서 그냥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석호는 지난 밤 받은 쪽지를 떠올렸다.

- 번역이 다 됐습니다. 메일로 보내드릴까요?

쪽지를 보냈으나 상대방에게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 사례금은 언제 보내주실는지요?

다시 쪽지를 보냈으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일이 틀어진 것 같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가 여전히 대꾸가 없자 노트북을 접으려고 할 때였다.

- 저를 속이셨죠?

쪽지가 한 장 떴다.

- 속이다뇨?

- 신부님이 사례금을 요구하는 건 좀 심한 것 같은데요.

석호는 당황했다. 최대한 자신을 숨겼지만 바티칸 메인 컴퓨터를 해킹한 해커에게는 역시 상대가 되지 않았다.

- 하긴. 저도 신부님인 걸 알고 원본을 보냈어요. 사실 저는 신부님이 번역해 주시길 바랐거든요.

- 그게 무슨 말이죠?

- 사실 언어학자들도 저한테 접촉을 했지만, 그치들은 믿을 게 못되니까요.

- 그런데 왜 하필...

- 신부냐구요?

- 네.

- 음... 그건 제 친구 때문이에요. 저는 그런 문서 따위는 관심이 없거든요. 친구가 꼭 신부님께 부탁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 그럼 번역한 이 문서는?

이 질문에 당돌한 쪽지가 왔다.

- 신부님은 원본을 지워야 하지 않나요?

석호는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범인이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 네. 저의 임무는 그것입니다.

그러자 '하하하'라는 쪽지가 뜨더니 갑자기 바탕화면이 사라졌다. 석호는 재빨리 대응하려고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두운 화면에는 이상한 코드들이 마구 뜨다가 사라지면서 한 문장만 남았다.

'한길병원 희귀병 센터 804호'

사실 수도사 한 명이 내려온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아침 일찍 떠날 생각이었지만, 수도사가 내려온다기에 석호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이렇게 힘들게 내려오셨는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은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요.

석호의 말에 필두는 손사래를 쳤다.

- 아닙니다. 바쁘신 신부님을 제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필두의 말에 석호가 필두를 쳐다보았다. 필두는 뭔가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