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3장 - 1. 빠져나간 정보(1)
제 3 장 단절된 삶
1. 빠져나간 정보.
사무실은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구석 자리의 몇몇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퇴근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컴퓨터가 켜져 있는 자리에도 사람은 앉아 있지 않았고, 컴퓨터 팬 소리만 낮고 희미하게 들렸다. 모니터는 환한 화면이 아니라 검은 바탕에 흰 색 글자들만 가득했고, 마치 무언가 복잡한 연산을 하듯이 커서가 깜빡이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이제 곧 끝날 거야. 갑자기 생긴 일이라 미안해.
덩치가 커다란 남자 하나가 자신의 손 안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전화기에 대고 연신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옆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걸어갔다.
- 내일은 반드시 시간을 비워 놓을 테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덩치가 커다란 남자는 핸드폰을 보며 '제길..' 하고 외치더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에 먼저 들어온 남자가 덩치 큰 남자에게 웃으면서 얘기를 했다.
- 거봐. 결혼은 귀찮은 거야.
그러자 덩치 큰 남자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 갑자기 일이 생긴 걸 어떻게 하라고.. 나 원참..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 말을 받았다.
- 맥스한테 부탁해 보지 그랬어?
덩치가 큰 남자가 사무실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 맥스한테? 그 자식 요즘 연애에 빠져서 일과도 망치고 있는 거 몰라?
- 아무리 그래도 아들 생일인데 부탁하면 들어주겠지.
덩치가 큰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 젠장. 왜 갑자기 문서 변환 명령이야. 한참 가만히 있다가.
- 매튜. 어차피 할 일이었잖아. 나야 말로 웬 날벼락인지 모르겠어.
매튜는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러게 말야. 오늘 우리 둘 다 일진이 사납군. 아무튼 어쩔 수 없지. 에드워드, 보안 서버 쪽은 괜찮아?
매튜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화면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 뭐 별 일은 없어.
매튜는 자신의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화면의 게이지가 65%에서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매튜는 늘어가는 숫자를 쳐다보다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때 매튜의 눈에 'Security Warning'라는 경고 문구가 보였다.
- 무슨 일이야?
에드워드는 서브 컴퓨터의 자판을 빠르게 치며, 시스템의 상황을 정상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한 쪽에서는 IP를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었다.
- 어떤 애송이 하나가 치고 들어오는군.
에드워드는 자신의 콧수염을 문지르며 빠르게 타이핑을 쳤다. 그리고 다른 모니터에 나오는 IP들을 필터링하고 있었다.
- 해킹?
- 매번 있는 일이지.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지 또 어떤 놈이 침투해 왔어.
에드워드라고 불리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매튜는 에드워드의 옆으로 다가가서 슬쩍 물었다.
- 사이프러스(Cypress)야? 아니면 바하무트(Bahamut)? 아니면 어나니머스(Anonymous)?
매튜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해커 그룹들을 열거했다. 그들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해커 그룹들이었고, 그들이 한 번씩 바티칸을 공격할 때마다 보안 기술자들이 투입되었지만, 그들의 수법이 점점 교묘해져 바티칸은 아예 보안 기술자를 고용하여 바티칸의 정보를 보호하는 데 힘을 썼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시스템의 일부만 해킹한 채 공격을 멈추곤 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 끝에 공격을 했던 이들이 사이프러스와 바하무트라는 것을 알았다. 바티칸은 그 공격을 주도했던 이들을 잡아들였고, 그들을 통해 그들이 정보의 일부만을 빼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마저도 암호화시켜 놓은 문서들이어서 해커들이 그 문서를 읽지도 못하고 삭제했다고 했다. 그 이후 바티칸은 최고의 보안 전문가를 고용했고, 사이프러스와 바하무트를 추종하는 이들이 그들의 이름을 걸고 가끔씩 공격을 해왔었다.
- 아니. 그 놈들보다 급이 낮은 놈이야. 너무 뻔히 보이는 다중 IP 공격이야. 그냥 쓰레기 정보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 사이프러스나 바하무트라면 패턴을 갖고 공격할 텐데 이놈은 아무런 패턴도 없이 마구 쓰레기 정보만 흘려대고 있어.
- Ddos? 하! 완전 애송이이구만.
- 응. 스페인, 영국, 독일... 또... 어라? 아랍 에미리트? 참 다양한 나라를 거치는구먼.
에드워드가 IP 추적 장치를 통해 IP를 분석하는 동안 매튜가 에드워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난 가서 커피나 한 잔 타 올게.
- 내 것도 한 잔. 아메리카노로.
서버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해커들이 접근을 해왔다. 그들은 호기심 반, 헛된 명예심 반으로 접근을 해 오는 것이다.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밀문서를 열람하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서들은 그들이 해킹을 한다고 해도 암호를 풀 수 없거나 푼다고 해도 사실 그리 썩 재미있는 내용들은 아니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비밀문서들은 서버에 저장되지도 않았다. 혹은 서버에 접근하는 다른 부류들은 이 서버를 관리하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부류들이었다. 그들은 여느 업체의 보안 전문가보다도 뛰어난 컴퓨터 실력을 갖고 있었다. 해커들은 그들과 자신의 능력을 경합해 보고 싶은 자들었기에 대개 서버의 문서에는 접근조차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번 문서 변환 작업은 콘클라베(Conclave) 전에 마쳐야 할 최고급 문서의 암호화 작업이었다. 물론 그 변환 작업은 극비에 실행되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뿐더러 서버에서 분리된 컴퓨터로 작업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매튜는 커피를 타서 들어오면서 에드워드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분주하게 이것, 저것을 하고 있었다.
- 아직도야?
- 끈질긴 놈일세. 역추적을 하고 있는데, 어딘지 안 잡히네. 얼른 잡아내야지 차단할 텐데. 아무튼 지저분 놈 만났어.
- 그러게. 애송이 녀석이 끈기는 있구만.
에드워드는 메인 컴퓨터 쪽을 보았다.
- 메인 쪽은 영향이 없지?
매튜는 커피 잔을 에드워드 옆에 내려놓으며 메인 컴퓨터 쪽을 보았다.
- 응. 이 녀석은 서브에 Ddos 공격 외에는 모르는 것 같아. 크래킹 실력이 있었다면 메인 컴퓨터에 접근했을 텐데 그런 흔적은 없어.
- 뭐 크래킹을 한다고 해도 방화벽 치면 되지.
그 말에 에드워드는 매튜에게 심각하게 말을 했다.
- 그래도 인터넷 연결은 끊고 작업해.
- 이 심심한 작업을 음악도 없이 하라는 말이야? 음악만 듣는 거라고. 그리고 메인 컴퓨터에는 삼중 방화벽이 쳐져 있잖아.
- 그래도 메인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게 꺼림칙해서 그래.
에드워드의 말에 매튜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자네야 말로 Ddos IP를 끊지 그러나. 자네도 그 놈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 하하. 내 이 녀석을 꼭 잡아야지.
매튜는 에드워드의 모니터를 보다가 자기 자리로 왔다. 메인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컴퓨터는 아까 하던 작업의 창이 그대로 떠 있었다. 가운데 암호를 입력하는 난에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 아이고. 2차 변환이 이제 끝났네. 이거 오늘 밤 안에 끝낼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 에라 모르겠다.
매튜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자 에드워드가 한쪽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 나도 이 녀석을 오늘 안으로 잡아야 할 텐데.
매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커서가 깜빡이는 창에 비밀 번호를 입력하며 말했다.
- 오늘 밤 안에 끝내야겠군. 내일 약속은 꼭 지켜야 하니까. 아들 녀석하고 같이 축구장에 가기로 했으니까.
- 그 녀석만 차단하고 들어가. 나야 뭐 축구도 좋아하지 않고, 무엇보다 솔로니까.
에드워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매튜에게 말했다. 매튜는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수많은 코드들을 보면서 말했다.
- 그나저나 그 문서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삼중, 사중으로 암호화하는지 원.
매튜는 화면을 쳐다보며 푸념하듯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메인 컴퓨터에 삼중 잠금 암호를 풀며 말했다.
- 큰일 날 소리. 우리야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
- 하긴.
매튜는 비밀 번호를 입력하고 화면 디렉터리가 나오자 화면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암호를 풀었을 때 보이는 화면이 아까 보았던 화면과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디렉터리들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 어? 이게 왜 이러지?
매튜는 빠르게 자판을 쳤다. 그러자 그의 모니터에 보이는 화면이 다시금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 에드워드! 메인 컴퓨터는 영향이 없다고 했잖아?
매튜의 말에 에드워드는 시스템 상황 창을 띄워놓고 말했다.
- 응. 지금도 서브 컴퓨터 Ddos 외에는 없는데.
매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암호화하던 문서를 풀었다. 그리고 화면에 나온 문서를 한 번 확인해 보았다.
암호화된 문서 HEX 코드 확인.
'변경 정보 없음'
불안한 듯이 매튜를 바라보던 에드워드에게 매튜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매튜는 다시 모니터 화면을 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 폴더들이 감춤이 되어 있는데. 자네가 그런 거야?
매튜의 말에 에드워드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지금 이 녀석 방어하는데, 내가 왜 폴더를...
그 순간 에드워드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 메인 컴퓨터 꺼!
- 무슨 일이야? 지금 끄면 지금까지...
에드워드는 얼른 달려가 메인 전원을 내렸다. 그러자 윙윙거리면서 돌아가던 컴퓨터들이 일제히 죽은 듯이 멈춰버렸다.
- 에드워드. 무슨 짓이야!
매튜의 화난 목소리에도 에드워드는 여전히 불안한 듯이 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다시 전원을 올리고, 서브 컴퓨터에 앉았다. 화면에는 부팅되는 모습이 보이고, 로그인 화면이 보였다. 에드워드는 메인 컴퓨터에서 인터넷 연결선을 빼고 전원을 올렸다. 한참동안 무언가를 처리하던 컴퓨터에 로그인 화면이 보였다. 에드워드는 일단 서브 컴퓨터에 로그인을 하였다. 서브 컴퓨터에 있던 디도스 공격이 멈춰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컴퓨터 로그 기록을 살펴보았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기록을 찾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자리를 옮겨 메인 컴퓨터 화면에 로그인 암호를 입력하고는 시스템 접속 로그 기록을 살펴보았다. 여러 시스템 기록과 갑작스런 접속 종료 로그 기록이 보이더니 그 아래쪽에 에드워드를 경악하게 할 로그 기록이 보였다.
93.121.181.101 login 17:23:12.07 Directories Fatima
93.121.181.101 Access 17:23:15.38 Directories Fatima
에드워드는 이 화면을 보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드워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매튜가 물었다.
- 무슨 일이야?
- 이 녀석. 사이프러스나 바하무트보다 위야. 꼼짝없이 당했어. 이 녀석 끈질기게 기다린 이유가 메인 컴퓨터였어.
- 메인 컴퓨터라니?
- 나에게 쓰레기 정보를 다량으로 흘리고, 메인 컴퓨터로는 아주 작은 정보만을 보냈어. 나는 통상적인 업다운(updown)이라고 생각했는데...
에드워드의 말에 매튜가 몸을 떨면서 물었다.
- 뭐? 메인 컴퓨터의 뭐에 접근하려고 했는데?
에드워드의 말에 매튜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 봉인된 문서...
에드워드의 말에 매튜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에드워드에게 말을 했다.
- 봉인된 문서는 아직 처리 전이긴 하지만 삼중 암호 장치가 있어. 3회 이상 틀릴 경우에는 자동으로 삭제되는 기능도 있어. 그... 그냥 정보만 빠져나간 걸 수도 있어.
매튜의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 이 정도 실력자라면 삼중 암호가 아니라 십중 암호도 풀 거야. 이 새끼.... 완전 초고수야.
에드워드의 말에 매튜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 어... 어떻게 하지?
매튜는 불안한 표정으로 에드워드에게 말했다.
- 감출 수는 없는 일이야. 당장 정보 국장님께...
전화기를 드는 에드워드의 손을 매튜가 붙잡았다.
- 하... 하루만 늦춰주면 안 되겠나?
매튜의 표정을 본 에드워드는 전화기를 놓았다. 에드워드도 매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이 선천성 장애를 앓고 있기에 이번에 아들과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동안 누누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의 아들을 위해 특별히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인 호날두(Ronaldo)가 경기 전 행사를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기에 에드워드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 내가 일단 하루 정도는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자네는..
- 고... 고마워.
매튜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에드워드의 손을 잡았다. 에드워드는 매튜에게 얼른 나가라고 얘기를 하고 컴퓨터 전원을 서브 컴퓨터를 제외하고 모두 내렸다. 매튜가 밖으로 나가자 에드워드는 앞에 놓인 식은 커피를 마시며 모니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 이래서 결혼은 골치 아픈 거야. 젠장..
다음날 아침, 바티칸 회의실 앞 복도에는 두 사람이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이가 50줄에 가깝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신부가 그 앞에서 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사람에게 부드럽게 말을 했다.
- 아우렐리오(Aurelio) 국장님. 아무래도 이번 일은...
- 네. 알고 있습니다. 슈테판(Stephan) 추기경님. 이 일은 가급적이면 세어나가지 않도록 은밀하게 처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들 짓인가요?
- 아직 그들이 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만 현재는 그들의 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슈테판은 자신의 이마를 치며, 혼잣말 하듯 얘기했다.
- 왜 하필이면 그 문서를?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그러자 아우렐리오 정보 국장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 우리에게 어떤 타격을 입히기 위한 것이겠지요.
- 아무튼 IP 확인은 된 것입니까?
이 질문에 아우렐리오는 이마에서 땀을 닦으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 현재는 아시아권역이라는 것밖에는... 죄송합니다.
- 정보 국장님께서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 펜타곤도 뚫을 수 있는 해커라고 하던데요. 그나저나 아시아권역이라... 그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을는지는...
슈테판의 말에 아우렐리오는 안도의 표정으로 말했다.
- 최대한 정보력을 이용해 보겠습니다.
- 네. 아무튼 최대한 노력해 주십시오. 저는 회의가 있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슈테판이 회의실 쪽으로 움직이자 아우렐리오는 화가 난 표정으로 정보실 쪽으로 갔다.
- 내 이 녀석들을... 하여간 가만 두지 않겠어.
바티칸 회의실에는 많은 추기경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 봉인된 문서가 새어나간 것에 대해 알고 있지는 못한 분위기였다. 다만 늘 그렇듯이 많은 현안들 때문에, 그리고 특히 오늘은 분명히 '이단 심판'에 대한 케케묵은 얘기 때문에 더욱 시끄러울 것이 뻔했다. 슈테판이 들어오자 몇몇이 그를 쳐다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몇몇은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표정을 지었다. 슈테판은 그들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여전히 웅성거리기는 했지만, 슈테판이 들어오자 아까보다는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 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교황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여러 사제님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나이가 여든이 넘은 교황은 최근 들어 자주 몸이 아팠다. 교황의 자리를 놓고 바티칸에서는 이미 물밑 작업들이 한창이었다. 이번 회의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주도권 싸움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여러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는 베네딕토(Benedictus) 추기경이었다.
- 이것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어찌 하나님의 영역을 부정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생각은 이미 과거에도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고, 지금도 그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평소에도 다혈질인 베네딕토는 거칠게 말을 했다. 그 말에 몇몇 사제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은 대부분 베네딕토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실천력을 인정하는 베네딕토의 지지자들이었다. 그 때 베네딕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앉아 있던 셰인(Shane) 추기경이 반박을 했다.
- 그들이 지금 겉으로 우리를 공식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한 적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관용적이고 전향적인...
그러나 셰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네딕토는 그 말을 반박했다.
- 기다리면 늦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종교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전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분야에 진출해 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의 말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단이지만 우리가 그 이단들에 대해 그저 부정하기만 한다면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습니다.
그 때 슈테판이 말을 했다. 그러자 모두들 슈테판을 쳐다보았다. 베네딕토는 그 동안 회의 때에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던 슈테판이 입을 열자 흥분된 목소리로 얘기했다.
- 말을 들어본다구요? 이미 그들의 생각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옛날 프리메이슨(Free and Accepted Mason)과 일루미나티(Illuminati)와 마찬가지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에 대한 말이 나오자 모두들 경악한 표정이었다. 어느 누구도 공식적인 회의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그들에 대해 베네딕토는 도발적으로 말을 꺼냈다.
-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힘들었었지요.
슈테판은 '우리'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당시 정보 관리를 했던 자신과 베네딕토의 잘못을 동시에 지적하는 말이었다. 이 말에 베네딕토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단호하게 말을 했다.
- 어찌 되었건, 이단은 폐기 대상이오. 더 이상 말하기도 불쾌하오.
슈테판은 그의 말에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베네틱토는 슈테판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 그들의 추적은 잘 되고 있는 것이요?
슈테판은 베네딕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개적인 석상에서 그러한 대답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슈테판은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 그들이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아니라면 잘 되고 있습니다.
슈테판의 말에 베네딕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베네딕토는 지난 번 '엑서더스(Exodus)'와의 밀약을 주도한 추기경들을 솎아내는 데 최고 역할을 한 슈테판에게 묘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딕토 역시 그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물밑에서 꾸준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슈테판과 최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잡아들인 것을 보고는 좀 더 기민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땅을 치며 후회를 했다. 더욱이 교황님의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 그러한 막중한 일을 해낸 슈테판에게 모든 추기경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 또한 베네딕토에겐 속 쓰린 일이었다. 윗대의 추기경들이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교황의 후보로 자신이 거론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복병을 만나게 되어 베네딕토는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 물론 자신이 꼭 교황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슈테판이 자신의 윗길로 올라선 것은 그로서는 스스로에게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일단 오늘 안건부터 처리하시지요.
슈테판이 모든 추기경들에게 얘기를 하자 다들 슈테판의 말에 집중하면서 오늘 상정된 안건에 대해 토의를 진행하였다. 베네딕토는 그러한 추기경들의 모습 또한 곱지 않게 보였기에 회의 내내 뚱한 표정으로 모두를 훑어보기만 했다. 가끔 슈테판은 베네딕토를 쳐다보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오늘 회의에 집중했다. 그러는 한편 지난밤에 일어난 일에 대해 머리를 나름 쓰고 있었기에 슈테판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 휴... 도대체 왜 이렇게 꼬이는지...
슈테판은 자기도 모르게 낮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