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10. 심연(深淵) 속으로(2)
한국으로 돌아온 철구 일행은 무영과 동행을 하였다. 무영은 원 회장의 지시로 세현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것이었다. 원 회장은 그들 위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일체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 여기가 사무실입니다. 급하게 얻은 곳이라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철구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피식 웃었다.
- 너무 새 거라서 적응이 안 되는군.
하지만 세현만은 표정이 굳은 채였다.
- 이봐. 얼굴 좀 풀라구. 이제 시작이니까.
철구의 말에 세현은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옆에 있던 무영이 건물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1층은 편의점하고 약국이 들어올 겁니다. 일반적인 시설이니까 별로 의심받지 않을 거구요. 2층 한 편에 심부름센터가 옮겨 올 예정입니다.
무영의 말에 철구가 손사래를 쳤다.
- 이런 좋은 건물에 무슨 심부름센터야. 그냥 있는 데가 편하니까 놔두자구.
무영은 철구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얘기를 했다.
- 3층과 4층에 세현 씨의 병원이 들어올 겁니다. 그리고 5층에 세현 씨가 거주할 오피스텔과 제가 거주할 오피스텔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는 앞문으로 들어가면 노래방이 나오고, 2층과 3층에서 연결되는 통로로 들어가면 비밀 아지트가 나옵니다.
무영의 말에 석호가 말을 받았다.
- 마치 비밀 결사대 같은 느낌인데요.
무영의 말이 끝나자 철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무튼 난 사례비 받았으니까 이 일은 끝난 거구. 신부님은 어때요?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 전 옛날부터 이런 비밀 기지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여기서 출동하면...
석호의 모습에 철구가 피식 웃었다.
- 비밀 기지라... 신부님이 좋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런 데는 영 어색해서...
철구는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이봐.. 어이! 어이! 할매!
철구는 분위기를 풀고자 세현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자 그 때까지 표정이 없던 세현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말했다.
- 할매라고 하지 말아요!
세현이 소리를 치자 철구가 손을 들고 말했다.
- 오래 살았으니까 할매 아냐?
철구의 말에 세현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그렇게 고까워하지 말라고. 사람은 다 오래 살면 할매, 할배가 되는 거니까.
철구의 말에 석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세현을 쳐다보고는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석호가 얘기를 꺼냈다.
- 서로 어찌되었건 같은 목적으로 모였으니까 서로 마음을 풀도록 하죠.
석호의 말에 철구가 먼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 나야 마누라랑 애만 찾으면 되니까. 그리고 납치하고 실험한 게 그 엑소더스인가 하는 놈들이라니까 그 놈들 잡을 때까지는 풀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저 할매가 기억을 완전히 되찾으면 그 놈들한테 접근하기 훨씬 쉬우니까 뭐...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는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세현 씨 역시 지금은 혼란스럽겠지만, 조만간 원래 세현 씨로 돌아갈 거라고 믿어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는 무영을 보며 말했다.
- 저 할매 감시 잘 하슈. 난 바빠서 가볼 테니까.
철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영에게 말했다. 그리고 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 나가기 전에 한 번 보고 가세요. 임 박사님께 드릴 것도 있고.
석호가 고개를 끄떡이자 철구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무영을 보며 말했다.
- 그럼 이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죠?
무영이 시계를 들어서 보며 말했다.
- 이사는 아마 지금쯤이면 짐을 다 뺐을 거구요. 오늘 안에 마무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설이나 이런 건 이번 주 내로 끝낼 겁니다.
무영의 말에 석호가 빙긋이 웃었다.
- 원 회장님은 좋은 분 같더군요.
석호의 말에 무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제게는 성인(聖人)같은 분입니다. 그 분이 지옥을 천국이라고 한다면 저는 천국으로 믿을 겁니다.
무영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네. 아무튼 계시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석호가 인사를 하자 무영이 고개를 숙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석호는 자연스럽게 세현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저도 바티칸에 이번 보고 끝나면 당분간 한국에 있을 예정이에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돌려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세현에게 말을 이었다.
- 저는 세현 씨가 강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당분간은 머리 좀 식히시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세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 제 죗값이 그들을 찾으면 없어질까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잠시 기도를 올리고는 말했다.
- 죗값이 없어지진 않아요. 다만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도 그러한 자를 용서하실 테구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했다.
- 네. 그렇겠네요.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게 중요하겠네요. 그게 저에게는 회개이고 반성이니까요.
- 네. 그러셔야 해요. 아직까지는 철구 씨하고는 조금 어색하실 테니까 제가 자주 와 볼 게요.
세현은 그런 석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 저도 이만 성당에 들어가 봐야겠네요. 주교님이나 추기경님이 불호령을 내리시겠지만요.
석호가 말을 하며 벌 받는 시늉을 하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 웃으세요. 과거는 어쩌면 악몽이니까요. 웃으시면 현실에서는 사라진답니다. 그럼 전 이만.
세현은 그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집 앞 성당의 외국인 신부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한편 철구의 사무실에서는 짐을 빼내 마내하며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 이 따위 고물들을...
철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한수가 철구에게 달려오며 말했다.
- 야! 너 뭐 사고쳤냐? 가압류도 아니고 여기 있는 것들을 왜 빼가는 데?
철구는 그 말에 한수를 보며 말했다.
- 아 이 자식. 이사 안 간다니까.
철구는 전화를 꺼내 무영에게 전화를 걸어 한바탕 퍼부었다. 그러자 짐 빼는 인부들이 모든 걸 원 위치 해 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한수가 낡은 소파에 앉더니 말했다.
- 무슨 말이야? 이사는 뭐고...
철구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 강남역 근처에 사무실 하나 얻어 준다고 그리로 이사를 하라고 해서 말야.
철구의 말에 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얻어준다고? 하긴 얻어주면 끝인가. 월세에 보증금에...
한수의 말에 철구가 뭔 소리냐는 듯이 한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 그냥 준다고 하던데... 난 깨끗한 게 영 맘에 안들어서..
그러자 한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강철구!
- 아. 시끄러.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 그... 그냥 준다고? 그럼 이 시궁창같은 데서 나갈 수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러더니 갑자기 철구의 가슴을 더듬었다.
- 아. 이 형님 왜 이래..
한수는 철구의 가슴에서 전화기를 꺼내더니 철구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 빠.. 빨리 전화 걸어. 사과하고 우리가 당장 그리로 간다고. 얼른..
그러더니 한수는 구석으로 가서 캐비닛을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말했다.
- 아냐. 이런 고물들 가져갈 필요 없지. 새 걸로 사면..
한수는 혼잣말로 지껄이다가 철구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 당장 전화 안 하고 뭐해!
- 거참. 한수 형.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 자식아! 솔잎만 주구장창 먹었더니 물린다. 이제 다른 것도 좀 먹어 보자.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이번 의뢰비로 아파트도 샀잖아. 이제 뭐가 부족해서 그래?
철구의 말에 한수가 다가오며 말했다.
- 수연이가 말야. 아빠 일하는 곳을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그런데 이 쓰레기통 같은 데를 데려올 수는 없잖냐?
철구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다.
- 거 참. 내가 볼 땐 수연이는 착한 딸이더만 아빠가 나서서 나쁜 딸로 만드네.
- 아무튼 이 좋은 기회를 왜 놓쳐?
한수가 소리를 질렀지만 철구가 손사래를 쳤다.
- 난 생각 없수다.
그러면서 소파에 벌렁 드러눕자 한수가 다시 소리를 쳤다.
- 얌마! 여기 월세 내는 것만 아껴도 우리 딸 학원 하나는...
철구가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거 참. 들어가려면 형 혼자 가슈. 내가 전화해 놓을 테니까.
철구의 말에 한수가 잠깐 생각을 하다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거기가 1호점, 여기가 2호점. 이렇게 말야!
철구는 한수의 말에 고개를 젓다가 무영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 자리 하나 비워달라고 얘기를 했다. 무영이 비꼴 때는 무안해져서 다 때려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한수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철구를 쳐다보았기에 철구는 어쩔 수 없이 무안을 참았다.
- 집기들이나 다 있다니까 내일 그리로 가면 돼.
철구의 말에 한수가 반색을 하며 좋아라 했다.
- 고마워. 암튼 2호점은 네 꺼니까 월세는 니가 내면 되고...
한수의 말에 철구는 한수를 고깝게 쳐다보았지만 한수는 모른 채 하고 혼자서 고사를 지내느니 직원을 뽑느니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한수를 보며 철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파에 누웠다.
- 혜민아...
철구는 입 안에서 맴도는 이름을 혼자 중얼거렸다.
- 살아 있어야 해. 너도... 내 아들도...
며칠 후 석호와 만난 철구는 반지 하나를 석호에게 내밀었다.
- 이게 뭐죠?
- 박 형사님 유품입니다. 임 박사님께 꼭 드리고 싶었던 거죠.
석호는 그 반지를 품에 잘 갈무리 하면서 말했다.
- 제가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철구가 입을 열었다.
- 언제쯤 또 오시죠?
철구의 말에 석호가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을 했다.
- 한 달 정도 후에 한국에 들어올 계획이에요. 본격적으로 톰슨 병원과 새마음 병원, 그리고 엑소더스에 대해 조사해 보려구요.
- 그렇군요. 그럼 그 때 다 같이 들어오시는 건가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저었다.
- 최 베드로 신부님은 같이 들어오시겠지만, 임 박사님께서는 지금 중요한 연구를 진행 중이셔서요.
- 그렇군요.
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세현 씨... 잘 부탁드려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피식 웃었다.
- 제가 뭐 할 게 있겠어요?
- 그래도...
- 애들도 아니고 싸우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빙그레 웃었다.
- 네. 그럼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
석호와 헤어지고 철구는 한수가 개업을 한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댄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수는 양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어색한 자세로 철구를 맞았다.
- 뭐 하는 짓이우?
철구가 말을 하자 한수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씨발. 잘못 온 것 같아. 여긴 뭐 다들 최신식이더만. 내가 잠바 차림에 들어오니까 경비원도 무시하더라구. 그리고... 건물 안에서 금연이라네. 이거야 원.
그러더니 얼마 전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워 스프링클러가 작동하고 소방서에서 출동한 얘기를 했다. 철구는 그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
- 거 봐요. 내가 안 맞는다고 했잖아.
- 씨발. 이런 줄 몰랐지.
- 아무튼 자초한 일이니까 당분간 버텨보쇼.
철구의 말에 한수는 울상을 지었다.
- 나... 나랑 바꾸면 안 될까?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일 없으니까 딴 데 가서 알아 보슈.
철구가 밖으로 나오자 한수가 철구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했다.
- 바꾸자. 응? 바꾸자구...
철구는 한수의 팔을 뿌리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런 철구를 보며 한수는 욕을 한바가지 퍼부었다.
- 저런 쌍노무 새끼. 형님이 부탁을 하는데 개 좆도 아닌 것처럼...
한수의 욕지거리에 복도를 걸어가던 여자 하나가 한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한수는 '흠흠'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뛰쳐들어왔다. 철구는 위층에 있는 세현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봤던 간호사들이 철구에게 인사를 했고, 철구는 밖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세현을 기다렸다.
- 김한수 씨!
철구는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간호사 하나가 철구 옆에 다가와서 웃으며 말했다.
- 김한수 씨 들어오시라는데요?
철구는 그 말에 뚱한 표정이었다가 '아!'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무척해진 세현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철구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 오셨어요?
철구 역시 어색한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소파에 앉았다.
- 할매, 좀 마른 거 같네.
철구의 말에 세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할매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되요?
철구는 세현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 그래도 할매라는 소리는 듣기 싫은가 보네.
세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에휴... 신부님은 오늘 바티칸으로 가신다고 하시던데요.
- 알아.
철구의 짧은 대답 이후에 두 사람은 침묵했다.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였는지 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미안...
그 말에 철구가 버럭 소리를 쳤다.
- 이제 미안하단 말은 그만 하라고. 옛날이 아니라 앞으로가 중요하니까 말야.
철구의 말에 세현은 놀란 표정으로 철구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그렇게 소리를 친 것이 민망해서 이내 다른 말로 돌렸다.
- 무영인가 하는 친구는 안 보이네.
- 1층 약국 쪽에 있어요.
- 약국이라... 똑똑한 놈이군.
철구의 혼잣말에 세현이 잠깐 있다가 얘기를 꺼냈다.
-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이죠?
철구는 세현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 모르지. 일단 신부님이 들어와 봐야 알고... 지금 나나 당신이나 돌아다녀 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고. 원 회장님이 알아봐준다는 정보나 기다려 봐야지.
철구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아무튼 몸 잘 챙기라구.
철구가 문손잡이를 잡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그런데... 당신 애인도 당신이 할매라는 거 아나? 당분간은 비밀이어야겠군.
철구가 그렇게 말하자 세현이 버럭 소리를 치다 입을 막았다.
- 할매라고... 읍...
문을 열자 밖에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세현의 목소리에 모두 안을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철구가 조용히 입모양으로 얘기를 했다.
- 입 조심! 잘 있어. 할매.
철구가 그렇게 나가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분명 철구가 자신에게 할매라고 부를 때는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묘하게 과거를 떠올리게 하였기에 듣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철구가 부르는 건 마치 '잊지 말아야 해.'라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현은 자리에 앉아 거울을 보며 말했다.
- 그래도 할매 소리는 듣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