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09화 (10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10. 심연(深淵) 속으로(1)

10. 심연(深淵) 속으로

- 심박수랑 뇌압 체크 하게.

슈뢰딩거는 무언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칠십 평생을 살면서 오늘과 같은 당혹감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실험에 대한 실패나 데이터의 오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야 슈뢰딩거는 오히려 담담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슈뢰딩거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도 힘든 순간이었다. 슈뢰딩거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이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리고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슈뢰딩거는 살면서 처음으로 손이 떨렸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신이 긴장을 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다른 연구원들에게 커다란 동요를 일으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슈뢰딩거는 계기판에 나오는 숫자들을 재빠르게 눈으로 읽어갔다.

- 뇌압이 20mmHg입니다. 더 이상은 위험합니다.

슈뢰딩거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저 수많은 실험 중 하나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첫 실험이 이보다 덜 긴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차라리 엄청나게 비싼 시약을 갖고 단 한 번만 할 수 있는 실험이었다면 오히려 더 담대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니 실패해도 폐기하면 그만인 실험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폐기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니 이건 절대 폐기할 수 없는 사명같은 기분이었다. 슈뢰딩거는 마음을 다 잡았다.

- 계속 진행하게.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들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 샘플에 들이는 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기에 수석 연구원이 나서서 말했다.

- 더 진행하면 뇌압 때문에 뇌가 터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바이탈은 정상이어도 뇌압이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 슈뢰딩거 박사님...

다른 연구원 또한 안타까운 마음에 슈뢰딩거를 불렀다.

- 계속 진행하게. 이 일은 비록...

슈뢰딩거는 '실패'라는 말 앞에서 잠시 멈췄다. 자신도 왜 이 샘플에 대한 실험은 이렇게 주저하는지 그리고 마음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정이 들었다든가 아깝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그 셈플은, 아니 샘플의 눈은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단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도 그렇다고 감정의 교류를 가져본 적도 없는 샘플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그 눈을 도저히 잊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죽은 샘과 홈즈가 자신에게 남긴 과제가 이론 것인 줄 몰랐다. 아니 예상에 없던 과제였기에 슈뢰딩거는 더욱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마음 같아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한다면 덜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 비록 실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해야 하네. 이 일이 우리의 사명이야.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들은 다시 계기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 입자가속기를 운영하게.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 하나가 손을 떨며 플라스틱 덮개를 열고 버튼을 눌렀다.

- 좀 더 연구를 하고 실험을 하시는 게...

연구원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었다.

- 이미 충분히 연구는 했다네. 그런 걸로 더 이상 결론을 찾을 수가 없다네.

- 그래도...

연구원은 무언가 아쉬운 듯이 말을 이었으나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었다.

- 지금밖에 없네. 지금 샘플은 뇌가 현재와 같이 활성화되었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네. 그러니 지금이 가장 적기이지. 나도 자네들과 같이 무언가 아쉬운 게 있네만 지금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생각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네.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들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멈추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긴 했다. 연구원들도 자신들이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다들 그 샘플에 대한 애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구원이 입자가속기를 가동시키자 다른 연구원들도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바이탈(Vital) 체크.

수석 연구원이 연구원들을 향해 외쳤다.

- 뇌압 확인해. 그리고 세포 분열 과정 분석하고.

수석 연구원의 말에 연구원들의 손길이 더욱 분주해졌다.

- 입자가속기 확인하고. 속도는?

수석 연구원의 물음에 연구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 20GeV(Giga electron Volt:GeV)입니다.

- 레이저는?

- 15미리와트(mW) 차지(charge) 되었습니다.

- 약물 반응 테스트는 끝났지?

- 네. 아세트아미노펜 부작용 반응이 약간 보일 뿐입니다만 크게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슈뢰딩거는 이제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 확인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 시작하게.

슈뢰딩거의 말에 수석 연구원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 마지막 체크다. 포인트 1.

- 오케이.

- 포인트 2.

- 오케이.

수석 연구원은 포인트 7까지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슈뢰딩거를 쳐다보았다. 슈뢰딩거가 고개를 끄떡이자 수석 연구원은 크게 말했다.

- Go!

수석 연구원의 말이 떨어지자 연구원들은 모두 수석 연구원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수석 연구원은 파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입자가속기가 개방되었고, 가속된 입자는 방출된 레이저와 부딪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관을 따라 샘플의 뒷머리를 향했다. 그러자 샘플은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눈을 번쩍 뜨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다들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슈뢰딩거만은 앞으로 다가가 그 눈과 마주했다.

'넌 누구냐? 네 기억을 보여주란 말이다.'

슈뢰딩거의 마음과는 다르게 갑자기 큰소리가 들려왔다.

- 바이탈 사인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심박수가 210, 혈압이 300/160까지 상승했습니다. 뇌압은... 뇌압은... 30mmHg까지 상승했습니다.

연구원의 말에 슈뢰딩거는 옆에 앉은 수석 연구원을 쳐다보았다.

- SP1에 모인 건?

- 자기장을 띤 일부가 모였지만, 아직 확인 불능입니다. 소스가 엉망입니다.

- 심박수가 240, 혈압이 330/190. 뇌압이 34입니다.

수석 연구원이 안타깝게 말했다.

- 이대로 가다간 샘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혈관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뇌출혈이..

슈뢰딩거는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확인해야 해. 반드시 확인해야 해.

- 심박수 250....

연구원의 외침이 들릴 무렵 샘플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 모습을 보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코피가 흐른다는 것은 이미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진 것이었고, 뇌사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모두의 눈이 샘플로 향했다. 슈뢰딩거 역시 코피를 보는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 실패로군.

떠올리기 싫은 단어였다. 최악을 가정하고 실험을 했지만, 이 정도로 최악일 줄은 몰랐다. 기억은 기억대로 추출하지 못하고, 샘플은 샘플대로 폐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샘플들과 다르게 이 샘플만은 모두들 마치 아이를 키우듯이 정성을 다했기에 오늘의 실패가 더욱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 바... 박사님...

연구원이 슈뢰딩거를 부르자 슈뢰딩거는 눈을 뜨고 그 연구원 쪽을 쳐다보았다. 연구원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무슨 일인가?

- 바... 바이탈이 불가능한 상태로....

- 뭐?

슈뢰딩거는 연구원이 있는 자리로 갔다. 샘플은 여전히 코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혈색은 아까보다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슈뢰딩거는 이상한 생각에 연구원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 뭐? 뇌압이 120mmHg? 이건 말도...

이 정도의 뇌압이라면 이미 뇌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는 피가 솟구쳐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샘플은 오히려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 기계 이상 아닌가? 엔지니어를 부르게.

슈뢰딩거의 말이 떨어지자 수석 연구원은 급히 엔지니어를 호출했다.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모두들 인지해서 그런지 엔지니어는 호출을 받은 지 3분도 되지 않아 연구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슈뢰딩거가 있는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기기 점검을 했다.

- 아무 이상 없습니다. 모든 기판과 전류량이 정상입니다.

엔지니어의 말을 듣자 슈뢰딩거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샘플이 담겨 있는 실린더를 쳐다보았다.

- 박사님. SP3 쪽에 전류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 뭐? SP3 쪽에?

이번 기억 추출은 샘플의 기억 안에 들어 있는 지식과 관련된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SP1이라는 앰플 안에 저장이 되고, 입자 가속기부터 레이저까지 모두 SP1을 위한 것으로만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와 다르게 기억 중 일상 기억 저장소인 SP3 쪽으로 기억이 모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 그 쪽 기억이라도 저장해 두게.

연구원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슈뢰딩거에게 말을 했다.

- 서서히 정상치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심박수 150, 혈압 180/120, 뇌압 17.

실린더 안에서 코피를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던 샘플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 샘플을 보자 슈뢰딩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아니다.'

슈뢰딩거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생명체에 대한 경외감이 생겼다. 수많은 실험을 통해 인간 이하의 개체를 만들기도 했고, 인간과 비슷한 개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인간 이상의 개체를 만들어보지는 못했다. 슈뢰딩거는 연구원의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 모두 정상치로 돌아왔군.

SP3에 일정한 전류량이 흐르자 모든 실험이 종료되었다는 화면이 모니터마다 떴다. 슈뢰딩거는 수석 연구원에서 말했다.

- 이 기억을 분석해 주게나. 그리고 샘플 정밀검사도 실시하고. 특히 뇌 쪽 MRI를 세세하게 찍어주게.

슈뢰딩거의 말에 수석 연구원은 고개를 끄떡였다. 슈뢰딩거는 뒤쪽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세찬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이런 실험은 없었다. 더욱이 기억 추출에서 이 정도로 진땀을 뺀 적은 없었다.

- 그 이상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인가?

슈뢰딩거는 샘플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좀 더 배양이 되고 난 이후에 해도 될 실험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선택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샘플의 크기가 점점 커갈수록 실험을 시작하려하면 그에 대한 역반응이 점점 커졌다. 만약 지금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SP3에 모인 일상 기억조차 추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슈뢰딩거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젠 폐기라는 생각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폐기할 수 없는 샘플이 되었다. SP3에 모인 기억이 어떤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SP3에 기억이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이보게 샘. 자네라면 이제 어떻게 하겠나.

슈뢰딩거는 자신의 머릿속을 유영(遊泳)하는 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샘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슈뢰딩거는 눈을 감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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