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08화 (10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9. 슬픈 과거 (6)

- 레이코 중좌, 아니 세현 씨를 보니 그 실험은 성공했나 보군요...

세현은 원 회장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마... 말도 안 돼...

원 회장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 그 때 우리가 연구한 내용이 지금 세현 씨의 상황입니다. 지금 말로는 '하이랜더 증후군(Highlander Syndrome)'이라고 부르죠.

- 그건 실재하지 않는 거예요.

세현의 말에 원 회장이 말을 했다.

-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현 씨를 만나니 우리의 연구가 성공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세현은 그 말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 회장은 말을 이었다.

- 우리에게 잡혀 온 여자는 서른여섯이었죠. 그런데 외모는 10대 후반이었어요. 시골 마을에서 그럴 수는 없었죠. 세현 씨는 그 때 만든 불사(不死)의 약 때문에 현재도 그 젊음을 유지하는 겁니다.

원 회장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그 때 철구가 입을 열었다.

- 웃기군요. 그럼 저 여자를 죽이기 위해 저에게 알아보라고 한 건가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철구를 쳐다보았다.

- 죽이기 위해라... 어찌 보면 그런 것이지요. 그녀의 마지막 부탁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뒤에서 침묵을 지키던 석호가 말을 꺼냈다.

- 나카사키 마사히데 고등관, 카도구치 사치히로 판임관, 가네타 츠요시 고등관... 이들의 손자들에게 마약을 투여한 것도 당신 짓인가요?

석호의 말에 원 회장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 그.. 그 녀석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손자들이라뇨? 그들의 손자는...

그러다가 그 순간 원 회장이 눈이 부릅떠졌다.

- 최... 최 사장이...

원 회장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밑에서 조직을 총괄하는 역할을 하는 최 사장이 떠올랐다. 최 사장은 부대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조선인 수용자 중 하나였다. 부대에서 부인과 아들을 생체 실험으로 잃은 최 사장은 원 회장의 살아남은 군인들의 처단에 인생의 전부를 걸었다. 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그들을 찾았고, 그들이 죽을 때 항상 옆에 있으면서 복수를 곱씹었다. 그러면서 항상 중얼거리는 말이 있었다.

- 그 놈들도 나랑 같은 아픔을 겪어야 해.

원 회장은 그것이 단순히 그들에게 하는 복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 사장이 말한 복수는 단순히 그들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똑같이 혈육을 잃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었음을 원 회장은 지금 깨닫게 된 것이었다. 원 회장은 무영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 최 사장을 부르게.

무영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원 회장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철구는 원 회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 오랜 시간동안 말씀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좀 쉬시죠.

그러자 원 회장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아닙니다. 저야 말로 이제 죗값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철구는 원 회장에게 얘기를 했다.

- 일단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시죠. 아까 보니까 의사가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데요.

원 회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철구 일행이 문 앞에 서자 문이 열리고 안에서 원 회장의 기계음이 들렸다.

- 일남아.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모셔라.

일남은 원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철구 일행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원보 호텔로 향했다. 원 회장은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현재 자신의 고통 따위와는 상관없는 고통이 가슴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자신을 보며 벌을 주라던 세현의 눈망울과 그녀의 보라색 나비핀이 떠올랐다.

얼마 후 원 회장의 호출을 받은 최 사장이 원 회장 앞에 왔고, 원 회장의 말에 최 사장은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 아들이 죽은 고통... 그걸... 그걸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최 사장의 말에 원 회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내 잘못이네. 자네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원 회장의 회한 섞인 말에 최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이건 순전히 저의 복수심이었습니다.

- 자네는 가서 일단 쉬게나. 이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원 회장의 말에 최 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거둘 식구들이 많습니다.

최 사장은 그렇게 말하더니 원 회장에게 큰절을 올렸다.

- 그간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 죗값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무영이 최 사장을 막으려 했지만, 최 사장은 무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내가 없어도 자네가 회장님을 충심으로 보살피게.

최 사장의 말에 무영은 손이 떨렸다.

- 어떻게...

최 사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냥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걱정 말게나. 죽게 되더라도 모든 걸 정리하고 죽겠네.

최 사장이 밖으로 나가자 원 회장은 회한이 섞인 눈으로 최 사장을 쳐다보았다.

- 모두 내 죄야.. 내 죄...

원 회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 날 아침 중국은 일대 사건으로 인해 난리가 났다. 지난 밤 최 사장은 밖으로 나가 그 길로 중국 공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간 자신이 저지른 사건들에 대해 나열을 하였고, 그 길로 최 사장은 체포되었다. 철구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석호가 무언가 부지런히 정리하는 것이 보였다.

- 일어 나셨네요.

철구는 켜져 있는 TV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갔고, 누군가가 경찰에 잡혀가는 모습을 찍어대느라 정신없는 화면이 나왔다.

- 네... 그런데 저건 뭡니까?

석호가 웃으며 말했다.

- 저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 하더군요. 아이들 마약 사건이나 과거에서부터 일어난 부대원들 살인 사건들이.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중국어를 모르는 철구는 석호를 보며 물었다.

- 묘하다뇨?

- 저 사람이 죽인 사람들이 일본 731부대 소속이라는 얘기가 나오면서 희대의 살인마가 아니라 영웅으로 변모하고 있어요. 동정론이 아니라 영웅론이 되어버리고 있네요.

철구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언론이 얼마나 상황을 조장하고 호도하는지 철구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럼 신부님 하실 일은 끝나셨군요.

철구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석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오히려 이제부터 제 일이 시작되는 것 같네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시작이라구요?

- 일단 세현 씨랑 같이 원 회장님께로 가죠. 이 일은 모두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요.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가 옆방에 있는 세현을 깨우려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세현 씨. 아침 식사라도 하셔야죠.

석호의 반복되는 부름에 안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철구는 그 때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문으로 다가가 방문을 세게 걷어찼다. 그러나 철구의 예상과는 다르게 세현은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 안에 있으면 대답을 하라구.

철구가 짜증나는 듯이 말을 했다. 석호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밤새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 힘드시죠? 하지만 이겨 내셔야 합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힘없는 표정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 이... 이기기 힘드네요.

석호는 세현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 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석호는 무언가 주저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 저는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돌려 석호를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 제 잘못이지만, 제 잘못이 아니었죠. 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정말 죽고 싶었죠. 제가 누군가를 죽인 것도 모자라 그게 제 어머니였다는 게. 하지만 최베드로 신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너의 잘못이 아니다.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의 잘못이다. 그 말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고 살았는데... 오늘 새벽에 알았습니다. 그 일은 세현 씨가 저지른 일이지만, 세현 씨 잘못이 아니더라구요.

- 네? 그런 게...

그 때 석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일단 원 회장과 같이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석호는 돌아 나오다가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제 얘기는 모른 척 해 주실 수 있죠?

세현은 얼떨떨한 상황에 고개를 끄떡였다. 세 사람은 준비를 하고 원 회장이 있는 병원으로 갔다. 원 회장은 어제보다 상황이 좀 더 안 좋아졌다면서 면회 시간이 좀 늦어졌다. 서너 시간 후 원 회장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면서 세 사람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철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석호는 세현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원 회장의 기계음이 들리자 철구가 손사래를 쳤다.

- 얼른 일어나셔야죠.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석호가 앞으로 나섰다.

- 최 사장님의 결단에 바티칸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석호의 말에 원 회장이 놀란 눈이 되었다.

- 바티칸이라뇨?

석호는 그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을 드리지 않았나 본데요. 저는 신부입니다.

석호의 말에 원 회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 그리고...

석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세현과 원 회장을 보며 말했다.

- 두 분은 모두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셨습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 원 회장은 모두 석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 희생자라뇨?

철구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네. 그들, 엑소더스(Exodus)의 희생자였던 것입니다.

- 엑소더스?

석호는 자신이 알아본 내용을 말했다.

- 어젯밤에 들은 얘기 때문에 제가 최베드로 신부님께 전화를 드렸었습니다. 세현 씨가 연구한 내용이 아무래도 단순히 일본인 대공이 단독으로 추진하기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 아침에 받은 팩스 내용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마지막 연결고리인 '오야마 이츠오(大山伊都雄)'라는 이름이 나오더군요. 중국에 있던 생체 실험 부대인 731부대, 미국에 있는 맨해튼 연구소(Manhattan Hospital Laboratory), 일본 교토 대학(京都大學) 의학부... 모두 '하이랜더 증후군'을 실험을 했던 곳이죠. 특히 맨해튼 연구소는 생체 실험으로 인해 미국에서 1962년에 강제로 폐쇄되었지만, 가장 연구가 진척된 곳이었죠.

- 맨해튼 연구소?

철구의 물음에 석호가 빙그레 웃었다.

- 지난 번 세현 씨 애인이 말했던 곳이죠. 그리고 분명 세현 씨가 과거에 있던 의학부 역시 교토 대학교였을 겁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가 다시 물었다.

- 그게 무슨 관계죠?

- 오야마 이츠오. 일본 내에서는 대공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만 사실 그 사람은 황족(皇族)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 내에 흔적이 없는 사람 중 하나였죠. 일본 내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지만,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

모두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을 때, 석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 저희가 파악한 것으로는 엑소더스의 핵심 인물 세 사람이 있죠. 유럽권을 장악한 샘 스미스(Sam Smith), 동양권을 장악한 오야마 이츠오(大山伊都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메리카권을 장악한 페르난도 프론디시 에르콜리(Fernando Frondizi Ercoli)입니다. 그들은 국제 정세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람'을 이용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들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생물학을 통한 진보'였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게 그들의 목적이었죠. 샘 스미스와 페르난도 프론디시 에르콜리, 오야마 이츠오는 모두 현재는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것으로는 톰슨 병원을 위시한 세계 주요 병원들이 그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러니까 그것은 세현 씨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다른 이에 의해 세현 씨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였죠. 원 회장님도 마찬가지죠.

석호의 말에 원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 나는 그들과 무관하오. 다만 내 일은 생체 실험을 한 이들에게 복수를...

그러자 석호가 말을 했다.

- 과거에 세현 씨에게 조선인을 증오할 게 아니라 이렇게 만든 일본인을 증오하라고 하셨다고 하셨죠?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석호의 말에 원 회장은 힘겹게 입을 뗐다.

- 난 이제 죽어가는 목숨이오.

그런데 그 순간 세현이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물며 말했다.

- 죽으면 안 돼요!

세현의 말에 원 회장과 철구, 석호가 모두 세현을 쳐다보았다.

- 난 내 잘못을 모두 알 때까지 죽을 수 없어요. 그리고 나를,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그들을... 부숴버릴 거예요. 당신도 그 때까지는 죽으면 안 돼요.

세현의 말에 원 회장은 무기력하게 손사래를 쳤다.

- 죽어가는 노인네일 뿐이오. 이제 쉬고 싶어요.

그러자 세현이 버럭 소리를 쳤다.

- 모토야스 카시코 고등관! 명령이다! 당장 일어나라!

세현의 목소리에 원 회장은 놀라서 세현을 쳐다보았다.

- 레.. 레이코 중좌...

- 내 마지막 부탁... 날 벌해야 할 것 아니에요.

세현이 눈물을 흘리며 강현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눈이 마치 마지막 명령을 실행하도록 종용하는 것 같았다.

- 그렇군요. 마지막 부탁... 당신의 아버지는 잘 묻었지만, 당신을 벌하진 못했군요.

세현은 주먹을 쥐며 말했다.

-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어요.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죽어도 그 때 같이 죽어요.

원 회장은 세현의 말에 눈을 감았다. 진짜 적은 부대원이 아니라 그 부대를 운용했던 그들이었던 것이었다. 부대원들은 단순히 수족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 회장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현의 마지막 말. 자신을 벌하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겠소. 그리고 그 이후에 당신을 벌하겠소.

원 회장이 오랜 침묵 끝에 꺼낸 말이었다. 세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나... 나도 그 때까진 버틸 거예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예요.

그 옆에서 세현을 지켜보던 철구가 말했다.

- 당신은 내 아들하고 마누라 찾을 때까지 못 죽어!

철구의 말에 석호가 눈을 감고 조그맣게 기도를 올렸다.

- 모두를 이 환난에서 무사하게 구원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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