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9. 슬픈 과거 (5)
명성은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동수와 함께 조국의 현실에 대해 울분을 터트리고, 같이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 개자식!
명성은 여전히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 내가 다 잡아들이게 해 주지. 하하하.
동수는 세현을 어깨에 멘 채 안으로 들어갔고, 명성은 소리를 지르며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세현의 산 속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았다. 동수의 성노리개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비참한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세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마저도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그 말에 포기하고 말았다. 세현은 동수가 없을 때 탈출을 하려고도 마음을 먹었지만, 이미 그러한 걸 알고 있었는지 동수는 본인이 외출을 할 때에는 세현을 꽁꽁 묶어 창고에 가두고 나갔다.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날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세현에게 뜻밖의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마니들이 산삼을 찾으러 깊은 산속까지 왔다가 길을 잃어 세현이 있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 살려 주세요. 제발....
세현은 심마니들의 도움으로 지옥같은 곳에서 탈출을 했지만,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든 가야했지만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현은 아버지를 찾고 싶었지만, 어디에 어떻게 잡혀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우선 자신의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얘기인 작은 할아버지께서 이리읍(裡里邑 - 현재 익산)에 만석지기 부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무작정 이리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 큰 처자가 홑겹의 옷만 입고 걸어다니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세현은 동수에게 당한 치욕만을 생각하며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이리까지 갔다. 세현이 이리에 도착해서 최 대감 집이라고 불리는 작은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 것은 꼬박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세현이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동네 거지로 생각했던 머슴이 세현을 쫓아내 버렸지만, 절박했던 세현은 부탁에 부탁을 거듭하여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세현의 모습을 기억하고는 가슴 아파하며 품으로 그녀를 거두었다.
- 네 아비가 옥사(獄死)했다더구나.
작은 할아버지의 집에서 한동안 머물며 허드렛일을 하던 세현은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 흑흑흑... 아버지....
세현이 아버지의 죽음 소식에 땅을 치며 울다가 그들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입술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을 때 작은 할아버지는 세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버지에 대해 복수를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하느니라. 그들보다 위에 올라서 그들에게 호령해야 한다.
세현은 그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작은 할아버지가 보기에 세현은 비상(非常)하게 머리가 좋았다. 심지어 곳간지기까지도 세현에게 셈법을 물어 장부를 정리했다. 세현이 왔을 때 탐탁지 않아 했던 이들조차 이제는 세현이 없으면 안 될 것이라고 앞다투어 칭찬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런 세현을 눈여겨보던 작은 할아버지는 세현에게 공부할 것을 제안했고, 세현 역시 그 말에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 후 세현의 운명을 뒤바꿀 사건이 벌어졌다.
- 네 년을 여기서 보는군.
세현이 읍내에 있는 학당(學堂)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동수와 마주치게 되었다. 세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가려 했지만, 일본군 완장까지 두른 동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원수같은 인간이었지만 세현은 그 때의 공포와 수치를 잊을 수가 없었기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 네 년이 도망가고, 한동안 미친 듯이 찾았는데... 후후. 여기서 찾게 되는구만.
동수의 손에 머리채를 잡힌 세현은 마구 소리를 질렀다.
-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러나 동수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 네년의 살맛은 잊을 수가 없더군. 오늘 우리 그 때처럼 지내보자구.
세현의 귀에 속삭이는 말에 세현은 손이 떨렸다. 세현이 머리채를 잡힌 채 개처럼 끌려가도 어느 누구 하나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아니 나설 수가 없었다. 동수는 독립군 밀고로 일본 경찰 내부에서도 이미 높은 직위에 올라갔고, 또한 그의 부하들이 대검을 손에 쥔 채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그들과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숙였고, 세현은 또다시 악몽에 빠질 것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세현은 그날 잡혀가 또다시 동수에게 능욕을 당했고, 감옥 같은 곳에 갇혔다. 동수는 그간 세현을 감춰주었던 작은 할아버지의 집안은 초토화시켰고, 100년을 넘게 이리읍의 지주로 살았던 최 씨 가문이 몰락하게 되었다. 세현은 자신의 운명을 체념하며 목숨을 끊으려 했다.
- 이 년. 어딜 죽으려고...
세현이 날카로운 유리로 자신의 손목을 긋고 누워 있을 때 동수가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안고 읍내 병원으로 향해갔다. 세현은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세현은 동수가 없는 틈에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고, 어차피 죽어야 할 목숨이라고 생각하며 도로를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세현은 이제 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차에 세게 부딪치지 않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세현을 친 차에서 웬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내려 세현을 살폈다.
- 괜찮은가?
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얘기를 했다.
-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러자 차 안의 목소리가 얘기를 했다.
- 그럼 얼른 병원으로 옮기게.
정장 차림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세현을 들어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 좌석에 태우고 차에 올라 가까운 병원 쪽으로 향해 갔다.
- 거... 거긴 안 돼요. 거.. 거기 가면 죽지도...
세현이 그렇게 말하고는 기절을 했다. 운전을 하던 남자가 뒷좌석 남자를 쳐다보자 뒷좌석 남자가 말을 했다.
- 사연이 있는 여자로군. 다른 병원으로 가세.
세현이 눈을 뜬 곳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병실이었다.
- 정신이 좀 드나?
젊은 남자 목소리에 세현은 그 쪽을 쳐다보았다. 제복 차림에 안경을 쓴 깔끔한 청년 하나가 세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 차에 뛰어든 건 무모한 짓이야.
그의 낮은 목소리에 세현은 눈을 감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왜 차에 뛰어 들어 죽으려 했지?
세현은 입을 다물다가 죽기 전에 낯모르는 이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얘기했다. 한참을 심각하게 듣고 있던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음... 그렇군.
그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자 세현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후련했다. 이제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 당분간 이 병원에서 쉬지. 몸 다 추스를 때까지.
세현은 침대에 누워서 자신의 인생을 한탄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이 나아졌을 때 그녀는 남자에게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 조선에서는 살기 힘들 테니 일본에 가는 건 어떤가?
세현은 남자의 제안에 일본으로 가게 되었고, 그 곳에서 세현이 눈에 띄게 똑똑하다는 것을 안 남자가 그녀를 의학부에 보냈고, 지금에 온 것이었다.
- 대공(大公)께서는 처음에는 측은함 때문에 나를 거두셨지. 일본에 있는 대공의 집에는 나 말고도 조선에서 온 사람이 몇 사람 더 있었어. 모두 똑똑한 이들이었어. 나 말고도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
세현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하다가 다시 혼잣말로 얘기를 했다.
- 내가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군.
하지만 강현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여린 본성을 갖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녀의 분노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 그런데 왜 이 험한 곳으로 중좌님을 보내신 건가요?
세현은 강현을 보며 피식 웃었다.
- 난 그 분께 보답을 해야 했어. 그 분이 원하는 걸 해 드리고 싶었지.
- 그 분이 이걸 원하셨나요?
강현의 말에 세현은 강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난 이 부대에 와서 조선인만 실험했어. 내 몸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를 저주하면서. 그들 모두 쓸어버리고 싶었어.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인 조선인들을...
강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조선인이 그렇게 만들었다구요? 일본인이 이렇게 만든 겁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만 하지 않았어도 당신의 불행은 없었을 테니까요.
강현의 말에 세현이 피식 웃었다.
- 아직 난 너의 상관이야! 지금 즉결심판을 해도 상관없어!
강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지금 죽으나 내일 죽으나 상관없습니다. 저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세현은 손을 이마에 얹으며 말했다.
- 머리가 아프군.... 부작용의 시작인가?
강현은 세현을 쳐다보았다.
- 누워 계십시오. 제가 나머지는 정리할 테니까요..
강현의 말에 세현은 물빛 눈망울로 강현을 쳐다보았다. 강현은 처음으로 레이코, 아니 세현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 아버지께 무덤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
강현이 뒤돌아 문서를 정리하려 할 때 세현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는 세현은 강현에게 넋두리하듯이 말을 했다.
- 여길 나가면 난 샘플이기 때문에 대공께서 날 다른 곳에 수용할 거야. 아니...
세현은 말을 끊고는 잠깐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 어쩌면 내가 죽을지 몰라. 그동안 시약 샘플로 실험했던 수용자들이 모두 죽었거든. 심한 부작용에 시달리면서...
강현은 세현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그럼 왜 그런 시약을 자신에게 투여한 거죠?
강현의 말에 세현은 힘없이 말을 했다.
- 어차피 죽을 목숨을 여기까지 산 거야. 내가 대공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거든.
강현은 세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게?
강현의 말에 세현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희생이라... 난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어. 나 하나 죽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
강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우린 모두 벌 받을 겁니다. 중좌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여기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강현의 말에 세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벌이라...
강현은 그 말에 세현에게 힘을 주어 말했다.
- 만약 벌을 받지 않는다면 제가라도 나서서 내릴 것입니다. 제가 찾아가서. 당신... 당신도 살아 있다면...
- 꼭 그렇게 해줘. 내가 살아 있다면 난 괴물일 테니까...
세현이 눈을 감자 강현은 서류를 정리하고 이불을 가져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세현을 덮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부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부대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는 게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군인들은 수용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여기 저기 강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일부는 장교들에게 대들다가 즉결심판으로 사살되기도 했다. 부대 안은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가 되었고, 모두들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러한 혼란을 틈타 세현과 강현은 대공이 보내 준 차를 타고 뒷문으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