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04화 (10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9. 슬픈 과거 (2)

보고를 마치고 나오자 강현은 '피아(彼我) 구분없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차피 자신은 중국인이었기에 그들에게 이방인이자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을 했다. 자신은 어차피 '아(我)'에는 절대 속하지 못할 '피(彼)'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강현이 보고를 마치자 레이코는 강현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연병장 같이 생긴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꾀죄죄한 모습이었고, 일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중증(重症)으로 보였으나 아침 햇살 아래에 모두 넋을 잃은 듯 앉아 있었다. 강현은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다가 레이코를 따라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코와 강현이 지나가자 총으로 그들을 위협하여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비켜주었다.

레이코와 강현이 나오자 한 장교가 고개를 끄떡했다. 그러자 병사 두 명이 뒤쪽에 포박되어 있던 한 사람을 끌고 나왔다.

- 이 개같은 조센징이 선동을 하여...

연단 위로 병사 둘이 포박된 조선인 한 명을 끌고 올라갔다. 강현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후 장교가 연단 위로 올라갔다.

- 이 조센징은 어제 저녁 다른 조센징들을 선동하여 탈주를 감행하려 하였다.

포박되어 있는 조선인은 몸을 덜덜 떨며 아니라는 듯 연신 손을 저었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꺽꺽거리기만 했다.

- 어제 신입 장교 한 분이 오셨다. 장교 분께 부대의 규율에 따라 형 집행을 맡기도록 하겠다. 원강현 중위!

강현은 뜻밖에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현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레이코마저 자신을 외면한 채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강현 쪽으로 눈이 쏠렸다. 강현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연단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장교는 사병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건네주었다. 피에 절어 있는 몽둥이를 받아든 강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광장에 모인 모든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장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쳐 죽여라!

강현은 몽둥이를 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때 강현의 뒷덜미에 서늘한 쇠의 기운이 느껴졌다.

- 이것은 짐승이다. 짐승도 때려잡지 못하는 놈은 군대에 필요 없다.

강현은 몽둥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포박되어 앉아 있는 조선인을 보았다. 조선인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 모... 못...

강현의 입에서 신음처럼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교가 조그맣게 말을 했다.

- 중국인으로 데려다 줄까?

강현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장교는 비웃음을 흘리며 강현을 보고 있었다. 강현은 덜덜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몽둥이를 놓칠 것 같았다.

- 10초를 주지. 10초 안에 시작하지 않으면 중국인 두 명이다. 그런 다음엔 네 명이고..

강현은 한 걸음씩 걸어 조선인 앞으로 다가갔다. 조선인은 놀란 표정으로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강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아래로 내리쳤다. 한참을 내려가던 몽둥이는 바닥을 때리고 튕겨 올라왔다. 강현은 손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릿했다.

'중국인 두 명이다...'

강현은 이를 악물고 다시 몽둥이를 내려쳤다. 그러자 물컹한 무언가에 맞는 느낌이 들었다.

- 으... 으악....

강현은 비명을 지르며 몽둥이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어디를 때리는지도 모른 채 강현은 몽둥이로 조선인을 마구 내려쳤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지만, 강현은 미친 사람처럼 몽둥이를 마구 내려쳤다. 조선인의 표정이 일그러져 보이더니 그 다음에는 몽둥이에 맞아 표정 자체를 지워버렸다. 강현은 상처입은 짐승처럼 마구 비명을 지르며 몽둥이를 내려쳤다. 그러나 조금 후에 누군가가 강현의 손을 붙잡았다.

- 잘했어. 짐승은 그렇게 잡는 거야.

강현은 그 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 몽둥이로 그 장교를 쳐 죽이고 싶었다. 강현은 분노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그 장교를 쳐다보다가 몽둥이를 한 쪽으로 집어 던지고는 연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 때 뒤로 돌아가는 레이코를 보았다. 보라색 나비핀이 마치 나비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서 살랑거렸다. 강현은 지난 하루의 공복과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옥이다. 이곳은 누구든 악마를 만드는 지옥...'

강현은 비틀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서 일본군 장교들과 사병들이 강현을 보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강현은 그들과 다툴 의욕조차 없었다. 아니 악마들과 싸워 이길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다음날부터 강현은 그들과 같은 악마가 되기 시작했다. 침대에 묶인 수용자들을 마치 짐승처럼 보았다. 마취 없이 수술을 진행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린 수용자들을 마치 동물 실험하듯 생체 해부를 했고,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질병이 어떤 영향이 미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는 실험도 진행하였다. 또한 얼마나 출혈을 해야 죽는지 연구하기 위해 수용자들의 팔이나 다리를 자르고 치료를 하지 않고 내버려두기도 했다. 가끔 정신 나간 연구관들은 절단된 팔이나 다리는 가끔 수용자의 반대편에 봉합하고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곤 했다. 냉각 질소로 팔다리를 얼리고 망치로 내려치고 깨지는 모습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릴 때도 있었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해서 서로 바꾸어 이식하는 실험을 할 때에는 잘라낸 여성의 성기를 보며 음담패설을 하는 그들을 보며 치를 떨기도 했다.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강현이라도 어린 아이를 실험할 때는 저절로 구역질이 올라왔다. 특히나 임산부에 대한 실험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뱃속에서 자신의 아이가 나와 눈앞에서 실험을 당하는 모습은 자신의 고통을 잊고 절규하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강현은 분노에 사로잡혔지만,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다.

- 꽉 잡아.

레이코의 말에 강현은 멍하던 정신을 부여잡았다. 사병들이 동원되어 환자를 붙잡고 있었지만, 고통이 심한지 실험 수용자는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이미 성대를 제거해서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강현은 지켜보기에도 끔찍한 실험이었다. 연구관 하나가 레이코에게 말을 했다.

- 정수리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레이코가 고개를 끄떡이자 연구관들은 지체없이 수용자에게 달려들어 메스로 정수리 부분을 그었다. 피가 새어나왔지만, 옆에 있는 연구관이 흡입관으로 재빨리 피를 빨아들였다. 실험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관이 세밀하게 메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머리가죽이 벗겨졌고, 이어서 얼굴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고통에 눈이 커다랗게 변한 수용자는 몸부림을 쳤고, 그럴 때마다 사병들과 강현은 힘을 주어 수용자를 부여잡았다. 두 시간동안 연구원들은 그 남자의 피부 조직을 근육에서 분리했다. 남자는 피부조직이 벗겨졌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고통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 소각해!

레이코의 냉정한 말에 사병들은 침대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 강현은 다시 멍한 표정으로 근육 조직만 남은 수용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레이코는 연구관들에게 보관법과 연구법을 논의하고는 강현을 향해 말했다.

- 저녁 때까지 연구관들한테 실험 결과 받아서 정리해.

강현은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은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런 지옥과 같은 상황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오늘 실험은 강현이 생각하기엔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실험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모든 실험이 그러했지만. 끔찍한 실험을 마주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강현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실험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며 밤에 몸부림을 치고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한 끔찍한 실험에서 벗어나 연구를 하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강현과 레이코의 운명의 지침을 바꿀 줄은 아무도 몰랐다.

도로를 힘차게 달려온 군용차는 음습해 보이는 회백색 건물 앞에 섰다. 앞에서 옆구리에 권총을 찬 이가 내렸다. 그리고 트럭 뒤에 짐칸 쪽으로 가자 뒤쪽의 바(bar)가 열리며 장총을 든 군인 둘이 뛰어내렸다.

- 잠시 대기!

권총을 찬 이가 말을 하자 두 사람은 총구를 짐칸 쪽으로 향하고 섰다. 권총을 찬 이는 철창으로 가로막힌 문 앞으로 다가갔다.

- 충성! 가와사키(川崎) 중위(中位)님 오늘은 직접 오셨습니까?

안에 있던 군조(軍曺)(현재 중사 계급) 한 명이 문 밖에 서 있는 이에게 말을 했다. 그러자 가와사키 중위는 웃으며 말했다.

- 이와무라(岩村) 군조. 고생이 많군. 도착했다고 안에 말해 주게나.

그러자 이와무라는 수동 전화기를 돌리더니 안에 보고를 했다. 그러더니 전화를 끊고는 철문을 열었다. 가와사키는 차를 향해 손짓을 하자 트럭이 안으로 들어갔다. 가와사키가 차에 다시 오르자 안에 있던 이와무라가 상황실 밖으로 뛰쳐나와 가와사키에게 말을 걸었다.

- 몇 명이나 됩니까?

- 한 스무 명 정도 되는데, 특이한 케이스가 있어서 직접 인계해야 해서.

- 여자는 몇 명이나...

이와무라가 음흉하게 웃으며 묻자 가와사키는 이와무라를 쓰윽 쳐다보며 말했다.

- 자네들에게 하나씩 돌아갈 만큼.

그러자 이와무라는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 잘 됐군요. 그런데 오늘 돌아가십니까?

- 응? 왜 그러지?

- 그간 고생하셨는데 제가 대접도 변변히 못해서요. 저녁 때 어떠십니까?

- 그래? 그거 좋지. 이따 보세.

가와사키는 자신의 콧수염을 쓸며 흡족한 듯이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안으로 출발하자 이와무라는 안으로 사타구니를 추스르며 상황실 안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 조센징 계집이 맛있는데 말야.

가와사키는 부대 내부 시설로 통하는 게이트 앞에 섰다. 게이트 앞으로 다가온 이는 같은 계급의 중위였다.

- 어이! 오랜만이야. 가와사키 중위.

밖으로 나온 중위를 보자 가와사키는 반색을 하며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마치 반가운 연인을 만난 듯이 가와사키는 그를 끌어안았다.

- 야! 와타나베(渡?)! 너 여기 웬일이야?

와타나베는 가와사키와 포옹을 풀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만주 주둔지에서 이쪽으로 발령받았지. 그나저나 육사 졸업하고 이게 얼마만이야!

- 그러게. 보니까 건강해 보이는구나.

- 넌 어디 있는 거야?

와타나베의 말에 가와사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여기랑 가까워. 그리고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이 부대에 와야 되니까...

가와사키의 말에 와타나베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그래? 여기 발령받고 아는 사람도 없고 해서 적적했는데...

- 아무튼 반가워. 이따 저녁때 한 잔 하자구.

가와사키는 이와무라와의 약속 따위는 잊고 와타나베에게 말을 했다. 와타나베는 반색을 하며 '그러마'하고 대답을 했다. 가와사키는 안쪽 게이트를 통과하여 한 건물 앞으로 갔다.

- 모두 여기서 내려.

가와사키는 병사들에게 뒤에 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수용소 안으로 옮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한 명을 지목하여 그 사람은 독방으로 보내라고 말을 했다. 가와사키는 건물 안 사무실로 들어가 사토(佐藤) 대위에게 경례를 했다.

- 음.. 이번에 특이한 게 있다고.

- 네. 그렇습니다.

- 그래. 1부에 있는 레이코 중좌님께 인도를 하게.

가와사키는 다시 경례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고쳤다. 부대 내 최고 미인이자 최고의 군의관인 레이코는 모든 장교, 병사들의 우상이었다. 그녀는 어느 누구에도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얼음꽃[氷花]'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하지 않은 병사가 없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대장의 첩이라는 말도 있었고, 육군 대장의 딸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헛소문이라는 걸 가와사키는 알고 있었다.

- 충성!

가와사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레이코는 정리하던 서류를 덮었다. 가와사키는 레이코를 잠깐 보다가 그 옆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강현을 보았다. 얼마 전 미친놈처럼 조선인을 때려잡은 중국 의사로 부대 내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문은 가와사키가 있는 부대에도 퍼져 '조센징 잡는 창꼬로'로 알려져 있었다. 가와사키가 보기에 강현은 허여멀건 한 얼굴에 힘도 별로 쓰지 못할 놈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루 종일 레이코의 옆에 있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질투도 났다.

- 무슨 일이지?

레이코의 말에 가와사키는 부동자세를 하고는 말을 했다.

- 전에 말씀하신 표본을 구했습니다. 충칭(重?)에서 발견되어...

가와사키의 말에 레이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 표본은 어디 있어?

레이코의 날카로운 말에 가와사키는 잠깐 움찔하다가 말을 이었다.

- 지금 독방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 가자.

레이코는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가와사키를 밀며 독방 쪽으로 갔다. 가와사키는 레이코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 이 방입니다.

레이코는 창살 너머로 보이는 인물을 보았다.

- 여자로군.

- 네.

레이코는 가와사키를 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 흠집을 내지는 않았지?

- 네? 네. 그렇습니다. 어떤 병사도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레이코는 비웃으며 말했다.

- 조사해보면 알겠지. 누구든지 손댄 흔적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니까.

레이코의 냉정한 말에 가와사키는 표정을 굳혔다. 이 표본에 대한 레이코의 집착이 이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다. 지난 번 표본이 거짓으로 밝혀지자 레이코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얘기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이후 그 대상이 누구건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일본인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레이코는 그 표본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옮겼다. 일반인들이 있는 수용소가 아니라 간부들이 사는 방이었다. 일반인 수용소와는 격이 다른 곳이었다. 다만 쇠창살이 있는 문이 있을 뿐 식사 배급부터 모든 환경을 간부들과 동급으로 해주었다. 다른 간부들이 뒤에서 수군거리긴 했지만, 대장조차 그 일을 묵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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