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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02화 (10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8. 어둠의 이면(裏面) (5)

철구의 냉정한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석호는 철구가 말은 저렇게 해도 세현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들에 의해 이용만 당하던 여인. 어쩌면 세현을 통해 자신의 부인인 혜민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 일단 신부님이 보고 계세요. 제가 가서 약이랑 먹을 거랑 좀 사올 테니까.

철구가 그렇게 말하고 나가자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현은 산장 안에서도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석호는 세현의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 많은 일들이 있을 거예요. 본인 스스로 단단해지셔야 해요. 혹시 그게 힘드시다면 지금이라도 정태 씨한테로 가셔도 돼요. 철구 씨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석호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제 기억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행동하게 한 것들뿐이에요. 이젠 그러기 싫어요. 저도 제 기억을 찾아서 제가 스스로 행동을 할 거에요.

그러더니 석호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신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제가 과거에 어떤 나쁜 짓을 했어도 이젠 그걸 반성하고 되돌리며 살고 싶어요.

석호는 세현을 보며 말했다.

-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는 석호는 조그만 목소리로 세현을 위한 기도를 했다. 세현 역시 석호의 기도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석호는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기원을 드렸다.

- 모두를 이 환난에서 구해주소서.

석호의 마지막 굳은 말에 세현은 눈을 뜨고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그런 세현을 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강해지셔야 합니다. 그러실 수 있어요.

세현은 석호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철구 씨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어요. 제 기억이 허락하는 한에서요.

- 네. 그러세요.

그 때 석호의 전화가 울렸다. 석호가 세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 날세.

임 박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석호는 세현은 한 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 네. 박사님.

- 바티칸에 큰일이 났나봐. 나한테 빨리 오라는 호출이군.

임 박사의 말에 석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저도 대강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 콘클라베가 미뤄지긴 했는데... 각 나라에서 이상한 조짐들이 보이나봐.

- 그렇군요. 얼른 들어가 보셔야죠.

- 그런데... 작은 박... 아니 철구는 옆에 같이 있나?

임 박사의 말에 석호가 난감한 듯이 얘기를 했다.

- 지금은 없습니다. 직접 전화를 해 보시죠.

- 전화기가 꺼져있다고 나오더군. 아까 전화를 하니까.

세현을 도청할 때 핸드폰 전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두 사람 모두 핸드폰을 꺼놨는데, 철구는 아직 핸드폰을 켜지 않은 것이었다. 그 말에 석호가 걱정 말라는 투로 얘기를 했다.

- 철구 씨에겐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리고 몸조심하세요.

- 내가 조만간 연락한다고 말 전해 주게나.

- 네. 알겠습니다.

석호는 전화를 끊고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콘클라베의 연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각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게 왠지 꺼림칙했다. 더욱이 이번 콘클라베가 추악한 음모로 인해 연기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얼마 후 철구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석호가 임 박사에 대한 얘기를 했다. 철구는 핸드폰을 꺼내 다시 켜면서 투덜거렸다.

- 깜빡 했네요. 젠장...

핸드폰을 켠 후 석호를 보며 말을 했다.

- 살아 계시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조만간 연락을 주신다고 했으니까요. 아니면 기회가 되면 저랑 같이 바티칸으로 가보셔도 되구요.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그 때 석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석호를 비롯하여 철구, 세현 모두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다는 걸 알았다.

-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얼른 밥 먹죠.

철구의 말에 석호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네. 그러죠.

철구는 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 아직 안 자면 나와서 밥 먹고 자!

철구의 외침에 안에서 세현이 나왔다. 철구는 싸온 음식의 랩을 벗기며 말했다.

- 일단 그냥 이걸로 요기나 하라구. 가까운 데에 다른 건 없었거든.

그 때 석호가 철구에게 말을 했다.

- 내일은 어떻게 하죠?

철구는 자신의 몫으로 사온 김밥을 먹으며 말했다.

- 내일은 내일 생각해야죠. 오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철구는 김밥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커피포트에 물이 끓자 가져와 자신의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 컵라면은 몸에 안 좋아요.

세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철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 뭐?

- 컵라면에서 나오는 환경 호르몬 때문에 몸에 안 좋다구요.

세현의 말에 철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지금까지 그렇게 먹고 살았는데, 아직 안 죽었어.

그러자 세현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세현의 말에 석호와 철구가 세현을 쳐다보았다.

- 나... 나 같은 것보다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부인도 찾아야 되고.

세현의 말에 철구가 뭔 소린가 싶어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은 컵라면을 개수구에 부어버리고 자신의 앞에 있던 밥을 철구에게 주었다.

- 당신이란 인간은... 왜 그렇게 증오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이런 음식을 주고 당신은 왜... 그런 걸 먹어요. 당신이 더 오래 살아야 하는데...

철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세현을 쳐다보았다.

- 내가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어?

철구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 당신이 복수할 때까지 죽으면 안 돼요.

철구는 입맛을 다시며 물끄러미 세현과 석호를 보았다. 석호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했다.

- 자.. 자.. 싸우지들 말고 나눠 먹죠. 그릇에 각각 담아서.

석호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그만 그릇에 밥을 떠서 담아 철구에게 들이밀었고, 한 그릇을 세현에게 밀었다. 그리고 자신도 조그만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

- 내가 배고파서 참는 거야!

철구가 한 마디 하고는 그 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석호 역시 그런 철구를 보다가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어서 먹어요. 저도 배고파서 먹어야겠어요.

석호도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세현은 힘없이 그들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었지만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 세현을 보며 철구가 말했다.

- 먹어. 내 마누라랑 아들 찾기 전까지 당신도 죽으면 안 되니까.

식사를 마치자 철구는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석호가 따라 나오자 철구가 투덜거리며 말을 했다.

- 웃긴 여자네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먼 산을 보며 말했다.

- 나름의 사과와 반성일 겁니다.

철구는 석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 사과와 반성이라... 참 어려운 여자네요.

- 어렵죠. 저도 혼란스럽네요.

석호의 말에 철구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 아마도 사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네요.

석호는 철구를 쳐다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제가 여자를 만나지 않는 이유는 신부이기도 하지만, 정말 복잡하기 때문이죠.

철구는 신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 신부님은 알면 알수록 독특하시군요.

석호는 그 말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 하하. 저도 뒤집어 까면 철구 씨나 세현 씨 못지 않을 걸요?

철구는 그 말에 지긋이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석호 역시 뭔가 사연이 깊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나이에 저런 정신력과 강인함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철구는 석호를 보다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하늘은 어느새 달의 환함을 밀어내고 별들이 세상을 메우고 있었다.

- 일어나요.

철구는 곤하게 자고 있는 석호를 흔들어 깨웠다. 석호는 며칠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살아서 그런지 낯선 환경에서도 비교적 푹 잘 잤다. 무엇보다도 철구가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치 최베드로와 함께 지내는 것처럼 마음을 기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더욱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철구가 석호를 깨우자 석호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의 팔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새벽 6시였다. 지난 밤 산장 안으로 들어온 시간이 새벽 3시가 넘었기에 겨우 세 시간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한숨도 자지 않은 듯한 철구의 표정을 보자 석호는 괜히 미안해졌다.

- 무슨 일이시죠?

철구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 원 회장과 연락이 됐습니다. 지금 중국에 있답니다.

철구의 말에 석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중국이요? 그런데 왜...

철구는 석호에게 간단하게 전화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 방금 전에 원 회장의 비서인 자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중국에 있다면서. 세현 씨와 같이 있다면 중국으로 빨리 와달라고 하더군요.

석호는 그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중국이라... 지금 비자를 신청해도...

석호의 말에 철구가 고개를 저었다.

- 군산에서 떠나는 밀항선이 있답니다. 그걸 섭외해놨다고 하는데, 10시까지는 와달라고 하더군요.

- 밀항선이요?

석호는 놀란 표정으로 철구를 쳐다보았다.

- 네. 한시가 급한 것 같더라구요. 원 회장이 위독하다고 그러더라구요.

- 네?

- 일단 가면서 얘기하죠. 지금 출발해도 군산까지 10시까지면 조금 빠듯해서요.

- 알겠습니다.

철구는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 신부님께서 세현 씨...

그렇게 말하자 석호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 네. 제가 깨우겠습니다. 철구 씨는 떠날 준비 하시죠.

철구는 멋쩍게 웃으며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치웠다. 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현의 방문을 노크했다.

- 세현 씨.. 일어나...

철구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을 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회한에 가득 찬 눈으로 멍하게 있었다.

- 안 주무셨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너무 복잡해서요...

석호는 그런 세현에게 이번엔 원 회장을 만나러 가야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러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었기에 석호는 마음을 잡고 말했다.

- 원 회장이 위독하답니다. 지금 준비해서 중국으로 떠나야 합니다.

세현은 원 회장이라는 말에 눈이 커다랗게 되었다.

- 위독이요?

- 네. 지금 출발하면 오늘 안에 중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현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석호의 다급한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두 사람에 산장에서 나오자 철구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산장을 서둘러 내려갔다. 세 사람은 차 안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일의 결말이 어떠할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군산에 도착한 것은 배 출발 10분 전이었다. 중국어에 나름 능통한 석호가 있었기에 배에 쉽게 오를 수 있었고, 무영의 부탁을 받아서인지 그들도 철구 일행에게 나름 최대한 정중했다. 배에 오르고 창고 한 구석에 세 사람이 앉았을 때 철구가 입을 열었다.

- 이거야 원. 이젠 밀항선까지 타다니.

철구의 말에 석호가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 그나저나 화장실도 저기 깡통으로 해결해야 하니 조금 참아야겠네요. 훗.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이 동시에 피식 웃었다. 세현은 그러다가 마치 자신이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한 행동에 철구가 얘기를 했다.

- 이 봐! 죽을 죄를 지었건, 나쁜 인간이건 간에 그렇게 있지 말라구.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하니까. 나댈 필요도 없지만, 그렇게 지내지 말라고.

철구의 말에 세현은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갔다. 세현은 사실 이번 중국행이 그녀에게 어떤 일이 될지, 어떤 것이 또 밝혀질지 무척이나 두려웠다. 특히나 자신이 원강현이라는 회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져 그것이 더욱 불안했다. 한편으로 석호는 자신이 조사해야 할 사람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인 원 회장을 만나는 게 막연하게 느껴졌다.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원 회장을 만나 무언가를 물어봐야 했는데, 그 사이에 세현이 끼어 있어서 먼저 나서기에도 난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섯 시간의 항해가 끝나고 배는 칭다오(??)에 있는 스난(市南)에 있는 조그만 항구에 도착했다. 배에서 세 사람이 내리자 검은 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리며 말했다.

- 모셔오라고 한 사람들이군요.

남자 한 명이 세 사람을 알아보며 말했다. 철구는 눈을 잠깐 감았다 뜨더니 말했다.

- 감시.. 아니 보호하던 사람 중 하나로군.

철구의 혼잣말에 일남은 철구를 보며 놀랐다.

- 놀랍군요. 우린 마주친 적도 없었을 텐데...

그 말에 철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글쎄.. 난 한 다섯 번 정도는 마주쳤는걸.

철구의 말에 일남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 무영님께 듣긴 했지만, 감이 대단하시군요.

철구는 귀를 파며 말했다.

- 죽기를 각오하면... 아무튼 빨리 가자구. 노인네 숨 넘어가기 전에.

일남은 그 말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떡였다.

- 앞으로 다섯 시간 정도 달려야 됩니다. 두 분은 뒤에 앉으시고, 한 분은 제 옆에 앉으셔야 합니다.

철구는 자연스럽게 일남의 옆좌석에 앉았고, 뒤에 세현과 석호가 앉았다. 차는 스난을 떠나서 상하이(上海)를 향해 갔다. 철구는 옆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고, 석호와 세현은 각자의 생각에 잠겼는지, 아니면 철구처럼 잠을 청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상해에 있는 원보(元寶)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 때였다. 차는 쉼없이 달려 다섯 시간이 채 안 되어 병원에 도착했고, 세 명은 원보 병원에서 무영을 만났다.

- 어서 오십시오.

무영의 의례적인 인사에 철구는 손을 들어 화답했다. 무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현을 쳐다보았고, 뒤에 서 있는 석호를 보았다.

- 그런데 저 분은?

무영이 석호를 보며 묻자 철구가 대답했다.

- 저의 조력자이자, 회장님께 용무가 있으신 분이죠.

철구의 말에 무영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 알겠습니다. 현재 회장님께서는 위독하신 상태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철구 씨를 오라고 한 겁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영의 말에 철구는 손을 들어 말을 제지하며 말했다.

- 아직 의뢰비 반을 못 받았으니까 마저 하고 받으려고 왔으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 그런데 회장님은 어디 있습니까?

철구의 말에 무영은 여전하다는 표정으로 철구를 보다가 철구 일행을 데리고 중환자실 안쪽으로 들어가 보안 장치를 통과해 안쪽 병실로 안내했다.

- 참 복잡하구만.

철구가 툭 던지는 한 마디에 무영이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폈다.

- 여깁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호흡기를 찬 채 누워 있는 원 회장이 보였다. 원 회장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고, 철구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세현의 표정이었다.

- 모토야스 카시코 고등관...

세현의 말에 원 회장은 힘겹게 눈을 뜨고 세현을 보았다. 그러더니 눈이 커다랗게 변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하... 하나..

원 회장의 입에서 무언가 얘기가 흘러나오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더니 원 회장은 뭔가 회한에 사로잡힌 듯한 표정이 되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철구의 말에 무영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얘기를 했다.

- 얘기하자면 깁니다만, 다나카 이치로 때문이죠.

무영의 말에 세현의 눈은 더욱 커다랗게 변했다.

- 다... 다나카 이치로...?

무영은 세현의 표정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 물론 지금은 죽은 사람입니다만...

철구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다나카 이치로에게 회장이 당하자 무영이 처리했다는 얘기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 그렇군요. 그런데 회장님께서 우리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철구의 말에 무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원 회장을 쳐다보았다. 원 회장은 힘겹게 고개를 끄떡였고, 무영은 전화기를 들어 말을 했다.

- 准??!(준비해!)

무영의 말에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와 원 회장의 머리에 무언가를 장착했다. 그리고 스피커를 켰다. 그리고 몇 가지 세팅을 마치더니 무영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 이제 대화하실 수 있습니다.

철구는 이상한 눈으로 무영을 쳐다보았으나 그 때 기계음으로 된 원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 철구 씨! 오랜만이로군.

철구는 놀란 눈으로 원 회장을 쳐다보았다. 무영이 철구를 보며 말했다.

- 뇌파를 음파로 바꾸는 기계입니다. 아직 임상용이지만, 회장님께서 특별히 부탁을 하셔서...

철구는 무영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별 게 다 있군요.

원 회장은 그 말에 감정없는 기계음으로 얘기를 했다.

- 나도 직접 얘기하고 싶네만... 그나저나 우와마치 레이코(上町麗子) 중좌님.. 오랜만입니다.

세현은 자신을 우와마치 레이코라 부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척이나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그로 인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저... 절 아시나요?

세현의 말에 원 회장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말했다.

-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제가 우와마치 중좌님을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는 세월이 흘렀으니 나만큼 늙었을 거려니 했지, 지금처럼 여전히 젊은 시절의 모습일 줄은 몰랐습니다.

원 회장의 말에 세현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 저... 전 기억을 잃어서요... 무슨 일인지...

세현의 더듬거리는 말에 원 회장은 놀란 듯이 말했다.

- 성격도 많이 바뀌셨군요. 실험 부작용인가요?

원 회장의 입에서 실험 부작용이라는 말이 나오자 철구가 물었다.

- 회장님도 세현 씨가 실험을 당한 걸 아시나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바로 반응을 했다.

- 실험을 당하다뇨? 직접 실험을 하셨겠지요.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 실험을 하다뇨? 그게 무슨...

원 회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 잠깐 치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마지막 본인에게 한 실험의 부작용인 것 같군요. 기억을 잃으시다니... 우습군요. 육체를 얻으니 기억이 사라지는... 저희가 한 실험의 결과가 이것이었습니까?

원 회장의 말에 세현이 당황하며 말했다.

- 우... 우리가 한 실험이라뇨?

원 회장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얘기를 했다.

- 이제 우리 둘 남았군요. 부대원들 중에서. 다나카 이치로 대장도 죽었으니. 이제 우리가 쌓은 업보도 풀어야 할 때가 왔군요.

원 회장의 말에 무영이 세현을 결박하려고 다가왔다. 그러나 철구의 행동이 조금 빨랐다.

- 아직 아닙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요?

철구의 말에 무영이 원 회장 쪽을 쳐다보았다. 원 회장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 무엇 때문이라...

원 회장의 말에 철구가 힘주어 말했다.

- 저 역시 이 여자와 엮여 있는 게 있습니다. 일단 원 회장님께서 알고 계시는 걸 다 말씀해 주신 후라도 늦지는 않죠.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

- 긴 얘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저와 우와마치 중좌의 천인공노할 내용일 겁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와 석호, 세현은 원 회장의 목소리에 집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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