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100화 (10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8. 어둠의 이면(裏面) (3)

- 아! 아직 자네는 모르겠군. 이번에 우리 연구원들이 발견한 사례지. 그 동안은 손상된 뇌는 다른 부분이 대체(代替)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에 '자극 실험'을 통해서 손상된 뇌도 재생이 된다는 걸 알아냈지.

하지만 피터는 그 말 끝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그런 거야 나중에 연구 논문을 보면 알 테고... 아무튼 이번 실험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자네가 세현 씨 옆에서 지켜보면서 정리를 하는 걸로 하지. 알겠지?

정태는 피터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맡아서 그녀를 관리하면 오히려 오늘과 같은 실험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왜 그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정태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기에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 알겠습니다.

정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피터가 말했다.

- 자세한 지시 사항은 따로 공문을 보낼 테니까 오늘은 푹 쉬게나.

정태는 밖으로 나와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늘 바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세현이 있는 방을 향해 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쳐다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세현은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고, 정태는 그녀의 옆을 지킨 채 그날 밤을 보냈다. 일주일 후 세현이 깨어나자 정태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깨어나셨네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리며 정태에게 물었다.

- 여... 여기가 어디지?

정태는 세현의 링거액을 살피며 말했다.

- 회복실이요. 일주일 만에 깨어나신 거예요.

그 말에 세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 일주일? 내가 아팠어?

정태는 그 말에 세현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아프다뇨? 무슨...

그 말에 세현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 아프니까 병원에 입원한 거 아냐? 내가 무슨 병이지?

그러다가 정태를 쳐다보며 놀란 눈이 되어 말을 했다.

- 누... 누구세요?

정태는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지만, 일단 세현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세현 옆에 앉았다.

- 기억 안 나세요?

정태가 옆에 앉아 세현이 정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 모르겠어요. 난... 분명히 맨해튼 연구소에서...

정태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맨해튼 연구소는 1960년에 해체된 연구소였기 때문이다.

- 매.. 맨해튼 연구소요?

정태의 말에 세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정태를 쳐다보았다.

- 여긴 어디인데요?

정태는 그 순간 뭔가 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현의 기억 안에 다른 기억, 그레고리의 기억이 혼합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4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기억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정태는 세현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다른 질문을 했다.

- 혹시 이름은 기억나세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뚱한 표정이 되며 말했다.

- 셀레나(Selena) 최에요.

정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이었다.

- 아! 네...

정태는 세현의 상태를 기록지에 기록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무... 무슨 일이죠?

세현의 말에 정태는 무어라고 얘기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세현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여기에도 한국인 의사가 있는지 몰랐네요.

세현의 말에 정태는 세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 저도 지금 상황이 몹시 당황스럽네요.

정태의 뜬금없는 말에 세현은 의아한 듯이 정태를 쳐다보았다.

- 저도 의사에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정태는 세현의 말에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알면 놀라실 사실이 꽤 많으니까 천천히 하도록 하죠. 일단은 회복이 우선이니까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누운 채로 말했다.

- 놀랄 사실이라... 제가 남자이기라도 한가요?

정태는 세현의 말에 더욱 놀랐다. 평소 세현이라면 이런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농담은커녕 지금 자신이 얘기를 하지 않는 상황 자체에 대해 화를 내며 물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 네? 아.. 그건 아니구요.

- 아무튼 제 담당의이신가 보네요.

세현의 말에 정태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네. 앞으로 계속 담당을 할 예정입니다.

정태의 말에 세현이 방끗 웃으며 말했다.

- 잘생긴 의사 선생님이 맡아서 저도 좋아요.

정태는 세현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술 후에 기억이 소실되거나 혼합되어 혼동될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성격마저 바뀔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태도 밝게 웃으며 말했다.

- 저도 예쁜 환자분이어서 좋습니다.

정태의 말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그런데... 배가 조금 고픈데 뭐 좀 먹으면 안 될까요?

정태는 고개를 끄떡이고 내선 전화를 들어 미음을 시키며 말했다.

- 당분간은 병실 안에 계셔야 됩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하신 게 아니어서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네.... 그런데 제가 무슨 병인 거죠?

세현의 말에 정태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을 했다.

- 정확한 학명은 모르겠지만, 뇌 신경과 관련된 것이에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뇌 신경이라... 제 전공인데....

정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알고 있습니다.

정태의 말에 세현이 새침한 표정이 되며 말했다.

- 저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

세현을 본 정태는 세현보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조금 이따 다시 올 게요. 일단 미음 오면 드시고 계세요.

정태는 세현에게 얘기를 하고 밖으로 나와 급하게 피터 소장에게 호출을 했다.

- 센터장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정태가 세현의 상황에 대해 대강 얘기를 하자 피터는 이마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 부작용인가? 일단 격리시킨 상태에서 현재 상황을 서서히 인식시키는 게 낫겠군.

정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알겠습니다.

- 일단 자네는 센터장의 상태에만 신경 쓰게.

피터의 말에 정태는 고개를 끄떡이고 세현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서 15층 격리 병동으로 이송하도록 시킨 후 다음날 세현을 만났다.

- 심심해요.

정태가 링거와 세현의 상태를 확인할 때 세현이 한 말이었다. 정태는 그 말에 조금 당황하며 말을 했다.

- 조... 조금만 계시면 됩니다.

정태가 당황하는 것을 보자 세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신문도 못 보고, TV도 못 보고. 그리고...

정태에게 세현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 간호사들도 다 한국인인 것 같아요.

세현의 말에 정태는 가만히 세현을 쳐다보았다. 정태가 볼 때는 퇴행 현상의 일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 그런가요? 동양인은 다 비슷하게 보이니까요.

정태의 말에 세현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 동양인이요? 한국인이던데... 그리고 제 병이 심각한가요? 여긴 격리 병동 같은데...

세현의 말에 정태는 고개를 끄떡였다.

- 잠시만 여기 있으면 됩니다. 지금 셀레나의 상태가 조금 불안정하거든요.

- 그래요? 그럼... 죽을 병인가요?

세현의 말에 정태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죽을 병 아닙니다. 그런 말 마세요.

정태의 단호한 말에 세현은 몸을 움찔하며 움츠렸다.

- 네. 무... 무서워요.

정태는 세현의 상태를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 잠깐 쉬세요. 간호원 얘기를 들으니까 어제 한숨도 안 잤다고 하던데.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꿈을 꿨어요. 무서운 악몽을. 그래서 못 잔 거에요.

정태는 세현의 말에 뒤로 돌아 침대 앞에 서며 말했다.

- 악몽이요?

세현은 그 말에 담담하게 얘기를 했다.

- 누군가 갇혀 있는데, 끔찍한 상태였어요. 그리고 제가...

정태는 세현의 말을 듣고는 뭔가 이상했다. 주입받은 기억에 그런 기억이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렇군요. 일단 수면제도 약간 처방할 테니까 오늘은 푹 자둬요. 내일부터 검사할 게 좀 있으니까요.

정태는 링거 안에 수면제를 같이 넣고 피터의 방을 향해 갔다. 피터는 정태를 보자 세현의 상황을 물었다.

- 아직 그대로입니다. 내일부터는 검사를 좀 해 보려구요.

정태의 말에 피터가 고개를 끄떡였다. 정태는 세현이 말한 내용을 말하며 피터에게 물었다.

- 혹시 주입받은 기억 중에 실험과 관련된 기억도 있습니까?

- 실험?

- 임상 실험이나 그런...

정태의 말에 피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세현에게 주입한 건 SP1에 있는 전문 지식 부분하고, SP2에 있는 미셀러니 기억이지. 실험과 관련된 것은 없는 걸로 아는데. 임상 실험 부분은 SP3 이후에 있을 텐데...

정태는 피터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 악몽이 뭘 의미할까요?

그 말에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했다.

- 음... 사실 나도 센터장에 대해서는 잘 몰라. 다만 실력 좋은 의사로 추천을 받았지. 사실 그녀의 내력(來歷)도 나에게 보고된 게 없지. 그저 샘 에드워드 박사님이 뛰어난 사람이라면서 뇌과학 센터의 책임자를 맡기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뿐이지.

- 네. 그렇군요.

정태는 샘 에드워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마음속으로 움찔했다. 지난 밤 홈즈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전화를 했을 때, 승인되지 않은 실험이라며 불같이 화를 낸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몇 분 후에 샘 에드워드 박사에게 전화가 와서 그녀의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라는 말을 들었고, 그녀가 그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정태 역시 의구심이 생겼다. 그런데 피터조차 그녀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말에 정태는 세현에 대한 의혹이 더욱 커졌다.

- 아무튼 그녀를 잘 지켜보게. 그리고 변화 상황은 나한테만 보고하고.

정태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다시 세현에게로 갔다. 세현이 잠든 모습을 보고 정태는 혼잣말로 지껄였다.

- 당신... 도대체 누구지?

다음날부터 세현의 종합 검사가 시작되었다. 특히 뇌와 관련된 것과 관련해서는 심층적인 검사가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검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진행되었고, 세현은 정태가 자신의 곁에서 항상 지켜주고 있기에 정태에게 많은 의지를 하였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 정태는 결과지를 보고 매우 놀랐다.

- 단기 기억 상실?

- 네. 어떤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의 전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한 2년간의 미셀러니(일상 생활)와 관련된 기억들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소실되고 있습니다.

- 다른 건?

- 현재로써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 이게 말이 되나. 기억을 잃는다면 다 잃어야지. 지식이나 다른 건 그대로인데 미셀러니만, 그것도 2년치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잃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

- 테스트 결과가 그래서 저희도 놀랐습니다.

- 이거 미치고 팔짝 뛰겠군.

정태가 검사지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간호사 하나가 급하게 정태를 찾았다.

- 환.. 환자가 밖으로 나갔어요.

- 뭐? 어떻게...

정태는 그 말을 듣고 얼른 세현이 나갔다는 층을 향해 갔다. 세현은 병원 로비에서 마치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 이... 이게 뭐야?

세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로비에 있는 사람들과 시설들을 쳐다보았다.

- 여... 여기가 어디야?

세현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먼발치서 정태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놀라서 반대쪽으로 뛰었다.

- 거기 서!

세현은 반대쪽으로 도망치다가 어떤 의사와 부딪쳤다. 그리고 그 의사의 윗주머니에 꽂힌 메스를 빼들었다.

- 가까이 오지 마! 여... 여기가...

정태는 세현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 세.. 셀레나. 잠깐 얘기를 들어봐요. 이건...

세현은 정태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의사 선생님... 왜 날 속인 거죠? 맨하튼 병원이라면서요?

정태는 세현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말했다.

- 말하려고 했어요. 좀 더 안정되면. 그리고 그 손에 있는 메스 내려놔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다 거짓말이야. 나... 난 여기에 실험하려고 잡아놓은 거죠? 그래서 격리 병실에... 꿈에... 맞잖아요.

세현의 소동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세현과 정태 쪽을 쳐다보았다. 그 때 정태 옆으로 경비원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 마취총으로 제압하겠습니다.

정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안 되요. 지금은 어떤 약물도.

정태는 세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 괜찮아요. 제가 다 말해 줄 테니까 그 메스를 내려놔요.

정태가 다가갈 때 세현이 정태를 보며 말했다.

- 거짓말! 꿈에서 봤어요. 저도... 저도 그렇게 되기 싫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손에 든 메스를 목을 향해 들이밀었다. 그 순간 정태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정태는 몸을 날려 칼날을 손으로 부여잡고 자신 쪽으로 당겼다. 세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메스가 정태의 손에 박혔다. 세현은 비명을 지르며 한쪽으로 물러났고, 정태는 힘겹게 말했다.

- 나... 나만 믿어요. 내가... 내가 고쳐줄게...

그 모습을 보던 세현은 한 쪽 구석에서 간질을 하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이 뒤집혀 있었다. 뒤에 있던 의사들이 뛰어 왔고, 세현의 눈을 까뒤집어 보며 말했다.

- 발작이야.

정태는 피가 흐르는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 리보트릴... 리보트릴..

정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간호사가 놀라서 물었다.

- 그.. 그건 간질 약인데요.

- 빨리! 뇌 이상일 수 있으니까.

간호사가 간호사실로 달려가서 주사약을 준비하는 동안 다른 의사는 정태를 끌고 응급처치실로 갔다. 정태는 손을 무려 50바늘이나 꿰맸지만, 수술이 끝나자마자 세현의 상태를 물었다.

- 아직 의식 불명 상태에요.

정태는 수술한 손을 부여잡고 주변의 만류에도 세현의 병실로 갔다. 그리고 그 옆 있는 의자에 앉아서 혼자 중얼거렸다.

-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젠장...

정태는 며칠이고 세현이 눈을 뜰 때까지 옆에서 세현을 보살폈다. 치료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자 세현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 여자는 무엇이기에 이런 시련을 겪는지, 그리고 그녀의 가족조차도 찾지 않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정태는 그런 관심을 곧 접으려 했다. 알면 알수록 위험한 여자였기에 정태는 이성적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는 그녀와 같이 있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 여... 여기가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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