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8. 어둠의 이면(裏面) (1)
- 젠장... 연락이 안 돼.
철구의 말에 세현과 석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오늘 임 박사님은 어디 가셨나요?
철구는 전화를 끊고 석호에게 물었다. 석호는 뭔가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 오늘 바티칸에서 알아낸 것에 대한 회의 때문에 못 오셨습니다.
- 그렇군요.
철구는 석호를 보며 물었다.
- 다른 정보를 얻은 건 없나요?
석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세현을 쳐다보았다.
- 세현 씨는 기억나는 게 없나요?
세현은 철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철구는 세현에게 얘기를 했다.
- 정면 돌파해 보자구.
철구의 말에 석호와 세현이 철구의 말에 무슨 일인가 싶어 철구를 쳐다보았다.
- 정태, 그 사람과 만나는 게 어때?
철구의 '만나자'는 말이 그를 납치해서 정보를 캐자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만나서 얘기를 해보자는 것인지 몰랐기에 석호가 물었다.
- 어떻게 얘기를 하죠?
그러자 철구가 석호를 보며 말했다.
- 일단 세현 씨가 만나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걸로 정보를 모을 수 없으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야겠죠.
철구의 '다른 방법'이란 말에 세현이 놀란 눈으로 철구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그런 세현의 눈치를 알고 얘기를 했다.
- 정보를 모을 수 없으면 그렇게 하자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최대한 이끌어내 봐.
철구는 세현의 가방에 조그만 도청기를 하나 설치했다. 그리고 라디오 같은 걸로 주파수를 맞췄다.
- 뭐하는 거죠?
세현의 말에 철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설치를 마무리하고 세현에게 가방을 주었다.
- 당신이 얘기하는 걸 우리도 들어야 하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도 알 필요가 있어.
철구의 말에 세현이 얘기를 했다.
- 같이 가는 게 아니에요?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우리가 앉아 있으면 할 얘기도 못 해. 그러니까 우리는 숨어서 무슨 얘기인지 들을 테니까.
철구는 그런 후 세현에게 정태에게 전화를 하라고 눈치를 줬다. 세현은 전화를 들고 정태에게 전화를 했고, 정태는 그간 세현과 통화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해 장황하게 걱정하는 말을 했다.
- 만날 수 있어?
세현의 말에 정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얘기를 했다.
- 어딘데?
세현은 만날 장소를 알려 주고 철구와 석호와 함께 그 약속 장소를 향해 갔다. 예전에 왔던 찻집인데 그 중에서도 외부와 단절된 방으로 세현은 들어갔다. 철구는 세현에게 마지막 주의의 말을 했다.
- 빙빙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해. 그래야 우리가 어찌된 일인지 판단하고 들어올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세현은 철구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고 찻집 안에 앉았다. 철구는 석호와 함께 밖으로 나가 철구의 차에 올랐다. 철구는 차 안에서 라디오와 같은 것을 켰다. 그러자 치직거리는 소리가 조금 들리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구는 몸을 시트에 기댄 채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석호 역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약 10분 정도 지나자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 그 동안 어디 있었어. 걱정했잖아.
- 미안해. 그 동안 일이 많았어.
정태는 자리에 앉으며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얼굴이 많이 상했어. 사무실에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그러던데...
정태의 말에는 약간의 원망과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세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어. 내 지워진 기억들에 대한 거야.
세현의 말에 정태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 지워진 기억?
- 응. 정태 씨도 관련 있는 얘기일 거야.
세현의 말에 정태는 다소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정태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 내 얘기?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정태의 말에 세현이 다소 냉정한 표정이 되면서 말했다.
-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거기에서 내가 일을 했다는 걸 알았어.
세현의 말에 정태는 다소 놀란 표정이 되었다.
- 음...
정태의 신음성에 세현은 다시 얘기를 꺼냈다.
- 거기서 내가 '정'이었고, 정태 씨가 '부'였어. 그리고 나는 지하실에서... 잘 기억나진 않지만, 무슨 일인가를 했어. 정태 씨는 알고 있지?
세현의 말에 정태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 얘기해 줄 수 없는 내용이야? 그럼 이제 그만 하고.
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정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 앉아봐. 얘기할 테니까.
세현은 정태를 쳐다보았다. 정태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세현은 자리에 앉으며 정태에게 말했다.
- 나도 알고 싶어. 내 기억을.
세현의 말에 정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무서운 얘기일 거야. 나도 사실 자기한테 얘기하고 싶었지만... 자기가 혼란스러울까봐 하지 않았던 거야.
정태의 말에 세현은 표정을 굳혔다.
- 무섭고 혼란스러워도 알아야겠어.
세현의 말에 정태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래. 긴 얘기가 될 거야. 자기와 관련된 얘기가.
정태는 처음 세현을 만났을 때와 자신이 겪은 상황에 대해 세현에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철구는 그 말이 시작되자 녹음 버튼을 눌렀다. 석호 역시 귀를 기울이며 정태의 말을 들었다.
정태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 입사를 했을 때에는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하버드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입사한 정태는 첫날부터 좌절감을 맛봐야했다. 그동안 하버드 안에서도 정태는 수재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고, 학교 내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훨씬 많았고, 자신의 연구 실적이나 연구 방향을 압도하는 것들이 즐비했다. 더욱이 유전 공학 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특히나 피터 연구소장은 자신과 같은 분야의 권위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이나 모자란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뇌 과학 분야는 비록 자신이 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젊은 여자라는 것에 더욱 놀랐다.
정태는 자신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준 홈즈 스미스가 이 연구소로 들어가라고 했을 때 사실 그리 탐탁지 않았다. 세계적인 연구소도 많았고,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낸 곳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태는 홈즈 스미스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고, 연구소에 입사해서는 홈즈의 명령대로 안에서 나름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입사 이후에 지식에 대한 욕심이 많은 정태는 이곳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홈즈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이 연구소 안에서 최고가 되고자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입사한 지 5년이 되었을 땐 이미 뇌 과학 연구 센터에서 과장을 맡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정태는 그 안에서 착실하게 홈즈의 명령을 실행해갔다. 그러던 중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 그 말이 사실이야?
정태의 말에 정태와 입사 동기인 성렬을 붙잡고 물었다. 성렬은 정태를 끌고 구석으로 가서 조용히 말했다.
- 몰라. 나도 들은 얘긴데, 이미 내부적으로는 결정됐나봐.
정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뇌 과학 센터장이 동의한 거야?
그 말에 성렬이 은밀하게 얘기를 했다.
- 피터 소장님이 결정하고 설득 중인가 봐.
정태는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성렬이 그런 정태를 보며 말했다.
- 사실 그 뇌 과학 센터장한테 뭔가 비밀이 있나봐. 나도 모르겠는데... 그 여자를 보는 눈이 많더라구.
정태는 그 말에 성렬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 뭐 이성(異性)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면에서 그런 거야. 너처럼 예쁘다고 쳐다보는 게 아니고.
성렬의 말에 정태가 펄쩍 뛰며 말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 자식... 니 눈을 보면 알아. 임마. 근데 포기 해.
정태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말했다.
- 말도 안 되는 얘기하지 말고. 아무튼 정보 고마워.
정태는 성렬과 헤어지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정태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정태 자리의 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정태는 뜻밖의 전화를 받고는 세현에게 다가가서 얘기를 했다.
- 소장님께서 잠깐 올라오라는데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뭔가 꿈을 꾸다 깬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 어? 그래? 알았어. 금방 올라갈게.
그런데 정태는 그 말에 다시 말을 했다.
- 그게 아니라 저보고 올라오라는 데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의아한 듯이 정태를 쳐다보았다.
- 왜?
정태는 난감한 듯이 세현에게 말했다.
-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요.
정태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이고 말했다.
- 그래. 갔다 와.
세현의 말을 들은 정태는 연구소장 피터가 있는 방을 향해 갔다. 정태는 혹시 피터가 자신이 홈즈의 명령을 받고 들어온 것을 알고 부르는 것인지 싶어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피터는 환한 웃음으로 정태를 맞이했다.
- 오랜만이네. 지난 번 승진했을 때 이후에 처음이지?
피터의 말에 정태는 웃으면서 말했다.
- 네. 그 때 과분한 칭찬을 해 주셔서...
피터는 그 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과분한 칭찬이라니. 우리 연구소에 자네와 같은 인재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피터는 정태를 앞에 있는 소파에 앉히더니 말을 꺼냈다.
- 무슨 일이시죠?
정태의 물음에 피터는 웃으며 말했다.
- 급하군. 하긴 그런 급한 성격이 자네가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일 수도 있겠지.
피터의 말에 정태는 고개를 끄떡였다. 피터는 그런 정태에게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이렇게 부른 건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서야. 뭐 선택하기 나름이지만,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거야.
피터의 말에 정태는 피터를 쳐다보며 말했다.
- 제안이라뇨?
피터는 정태에게 특허와 관련된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연구의 대표로 등록해서 논문의 책임자가 되도록 해준다는 것이었다. 정태는 그 제안에 깜짝 놀랐다.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의 특허와 관련된 연구라면 이미 선임 연구원들이 하고 있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구소의 핵심 측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연구였다. 더욱이 그러한 연구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책임자의 역할까지 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파격적이기 때문이었다.
- 다만...
피터의 다음 말에 정태는 그에 대한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것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 네.
피터는 잠시 생각을 하다 정태에게 말을 했다.
- 이번 수술에 참여해 주게나. 그리고 수술 이후에 그녀를 맡아 주게.
- 네? 맡아 달라니요?
정태의 말에 피터는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자세한 내용은 자네가 이 일을 수락하면 얘기해 주겠네. 뭐 수락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야. 이건 아까도 얘기했지만 제안이니까.
정태는 그 말에 고민에 빠졌다. 수술 참여야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녀를 맡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맡는다는 게 무슨 의미지요?
정태의 말에 피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결혼하라는 말이나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 말게나. 단지 그녀의 상황을 면밀하게 체크만 하면 되는 거야. 물론 자네가 전담이지만, 자네가 추천하는 다른 사람을 붙여 줄 테니까.
정태는 피터의 명령을 들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처음엔 그녀의 냉정한 모습에 정을 붙일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였다.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가끔씩 보이는 그녀의 한스러운 표정이 정태의 마음을 흔들곤 하였다. 그런데 피터가 이번에는 그녀에게 엄청난 짓을 하려고 했다. 정태는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왜 그녀에 대해 신경을 써야하나 하고 마음 쓰는 것을 애써 접었다. 정태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했다.
-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뇌 과학 센터장님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태의 말에 피터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 하하하. 자네 충성심이 대단하군.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인가?
피터의 말에 정태는 당황하며 말했다.
- 그런 게 아니라...
정태의 변명에 피터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알겠어. 아무튼 자네가 내 제안을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겠네.
정태는 피터와의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번 일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하는 것조차 불투명했다. 이런 상황이 정태는 조금은 혼란스러웠지만,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도록 했다. 정태는 그 날 저녁 홈즈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상황에 대해 보고를 했다.
- 음... 일단은 지켜보면서 일을 하게. 위험할 수 있으니까 더 깊은 곳까지 파지는 말고.
정태는 전화를 끊고 복잡한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리를 해도 꼬인 상황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정태는 그 제안을 받고 한동안 얘기가 없어 잊은 채로 지내다가 한 달 정도 지난 후 은밀하게 명령이 내려졌다. 정태는 비번이었기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작스런 호출이 왔다.
- 오늘 저녁이라구요?
정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쉬는 날 부르는 것에 대한 항변 따위가 아니었다. 과연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지 또한 이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에 대한 스스로에게 하는 반문이었다. 정태는 준비가 되는 대로 연구소로 나갔다. 물론 자신이 빠진다고 해서 크게 영향을 받고나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태는 어떤 의무감 같은 기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의무감이 정태의 앞날을 크게 바꿀 줄은 정태도 시술을 받을 세현도 알지 못했다. 아니 그 둘만 아니라 연구소 직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항상 우연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뜻밖의 일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 어, 왔어?
정태가 도착했을 때 그의 동료인 성렬이 정태를 반겼다. 그런 성렬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정태는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정태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팀장이 정태를 보며 말했다.
- 미안. 쉬는 날 오라고 해서.
- 아닙니다. 그런데...
정태의 말에 팀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 지난 번 그 일이 합의가 됐나봐.
- 그런데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정태의 말에 팀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 생명과는 관계가 없지만 어쩌면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을 지도 모를 일이야. 몇 번의 임상 실험을 했는데 이번에 최적의 방법을 찾았나 봐.
- 임.. 임상 실험이요?
- 나도 자세한 내용은 잘 몰라. 내려온 보고서에 그렇게 쓰여 있어서.
정태가 팀장의 옷깃을 잡고 좀 구석진 곳으로 끌었다.
- 임상 실험이면 이건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거니까 사람한테 실험을 했다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