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7. 진실의 문(4)
일남의 말에 다들 일사분란하게 차에 올라탔다. 메이양 역시 일남을 외면하고 차에 올라탔다. 메이양 일행이 떠나자 일남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차피 그들도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문가라는 것을.'
일남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세현을 납치하려고 한 이들이 톰슨 병원 쪽이라는 걸 알렸다. 그리고 상황 파악을 위해 일남이 직접 그곳으로 가보겠다고 얘기를 했다. 그리고는 일남이 차를 몰고 톰슨 병원이 있는 송도 쪽으로 가는데 도로가 유난히 막혔다. 일남은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보았다. 송도에 들렀다가 본가로 가는데 시간이 조금 빠듯할 것 같았다. 시계에서 눈을 떼자 자기의 눈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운전자들이 모두 차를 버리고 밖으로 나와 뒤쪽으로 뛰는 모습이 보였다. 일남은 뭔가 싶어서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뒤쪽으로 뛰어가는 검은 옷의 사내가 보였다. 분명 조직원 중 하나였다. 그는 뒤에서 달려온 한 남자에게 일격을 당했고,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일남은 그 순간 일이 꼬였다 싶었다. 차에서 내린 일남은 차 위로 올라갔다. 송도 공사장 근처에 사람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남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뒤로 달려 나오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앞으로 전진했을 때 일남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첸과 첸이 데려온 부하들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일남은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첸 역시 톰슨 병원이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곳으로 부하들과 온 것이었다.
'메이양도 첸도 동시에 알아챘다면... 혹시 함정...'
일남은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자신을 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 아! 차번호.
일남은 재빨리 허리를 숙이고 다른 차들 옆으로 갔다. 차에서 모두 내려 도망갔기에 대부분의 차가 비어 있었다. 일남은 그 때 자신의 차 쪽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 멀리 못 갔을 거야. 잡아!
그 목소리가 들리자 일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차 한 대에 어떤 아줌마가 불안한 표정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얼른 창문을 두드렸다. 아줌마는 놀라서 일남을 쳐다보았고, 일남은 창문을 내려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놀라서 고개를 저었고, 일남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줌마가 아주 조금 창문을 내렸다.
- 저랑 같이 가시면 됩니다. 제가 보호해 드릴게요.
아줌마는 운전대를 놓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 그.. 그냥 차에.. 애기가..
아줌마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일남은 힐끗 다가오는 녀석을 보다가 아줌마에게 말했다.
- 여기서 얼른 나가셔야 되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일남은 자신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줌마 역시 당황하여 일남의 호의에 고개를 끄떡였다. 도어락이 열리자 일남은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뒷자리로 가서 아이를 안았다. 그러자 아줌마가 놀라서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일남의 차에서부터 앞으로 수색하던 놈들이 일남과 아줌마 쪽을 쳐다보았다. 일남은 순간적으로 애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 괜찮아요. 아빠랑 있으면...
그러면서 아줌마를 향해 말했다.
- 여보. 위험하니까 얼른 이리로 와요.
아줌마는 조금 당황하였지만, '네. 네...'하고 일남 쪽으로 다가왔다. 일남을 찾아 수색하던 놈들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 일단 여기를 피하세요. 위험합니다.
일남은 아줌마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 얼른 나갑시다.
그 때 방금 전에 일남과 아줌마에게 얘기를 하던 녀석이 급하게 말을 했다.
- 조심해서 나가세요. 이쪽으로 한 놈이 도망쳐 왔으니까요. 경호원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하세요. 아기 조심하시구요.
일남은 순간 등골이 시렸다. 일남은 굽신거리며 인사를 하고 아줌마의 손을 잡고 경호원들 사이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얼마 후 경찰차들이 공사장을 가로지르며 패싸움 현장으로 갔다. 일남은 멀찌감치 빠져나온 다음 아줌마에게 말했다.
- 감사합니다.
일남이 아이를 아줌마에게 넘기자 아줌마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일남은 아줌마의 표정을 보고 냅다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 저... 저기 나쁜 놈이에요!
아줌마가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경호원들이 아줌마 쪽을 쳐다보았다. 일남은 죽을힘을 다해 공사장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아직 공사 중인 현장 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폐기물을 버리는 곳 같은 컨테이너 박스 안으로 몸을 숨겼다. 몇 분 후 밖에서 희미하게 말소리가 들렸다.
- 멀리 못 갔을 거다. 수색조를 나눠서 수색하고 너희는 도로 쪽으로 가봐.
일남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건축 폐자재들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일남은 순간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했다. 그들도 분명히 전문가였다. 메이양이 미끼를 뿌렸듯이 그들도 뿌릴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후회가 들었다. 그들에 대한 정보만을 파기 위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톰슨 병원이라고 얘기한 것도 그들의 농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첸이 걱정되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남은 밤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남은 몸을 더욱 웅크리고 있었다.
- TV를 켜 보세요.
본가로 모인 무영은 부하의 호들갑에 눈살을 찌푸리고 TV를 켰다.
- ... 현재는 대부분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 중국 흑사회는 송도 신도시 지역의 이권을 선점하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현재 경찰은 주동자인 중국인 첸 씨를 잡아서....
무영은 첸이 잡혔다는 말에 눈이 커졌다. 그 때 훈기가 부리나케 들어왔다.
- 이게 무슨 일입니까?
무영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무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첸이라면 절대 일남이나 자신, 그리고 회장님을 불지 않을 것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결코 배반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아래 조직원들이야 첸이 관리하던 애들이었기에 그 윗선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 바보같은 자식들.
무영의 말에 훈기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훈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일남이는 연락이 없습니까?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기다려야지.
무영은 훈기와 통화에서 세현이 집에도 사무실에도 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감시를 빼자마자 여자가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무영은 일이 이렇게 꼬이자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되었던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방에만 있던 원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무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일이 조금 꼬였습니다.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렇군. 예상 밖의 일이었으니까.
원 회장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일남이는?
-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 음... 일단 일남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왠지 이번 일은 그 여자가 아니라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나.
원 회장의 말에 무영과 훈기는 왠지 가슴이 서늘했다. 원 회장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 일남 수하들을 불러라. 남은 사람이 누군가?
원 회장의 질문에 무영이 대답을 했다.
- 메이양이 남았습니다.
- 음.. 그래. 지금 오라고 하지.
무영이 고개를 숙이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원 회장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있다가 무영이 전화를 끝마치고 오자 질문을 던졌다.
- 그 여자는 어떻게 됐나?
무영은 원 회장의 질문에 잠시 주춤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원 회장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한 적이 없었기에 지금 상황이 더 당혹스러웠다.
- 어제 이후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 회장은 표정의 변화가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 나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구나. 내 업보야. 내 업보.
원 회장의 낮게 읊조리는 말에 무영은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 제가 못나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원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내가 아이들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히게 했어. 내 복수를 하자고.
원 회장의 말에 훈기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평소 태산같이 느껴지던 회장이 오늘은 왠지 보통 늙은이와 다름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훈기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원 회장이 훈기를 보며 말했다.
- 아들은 잘 크고?
훈기는 원 회장의 말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 네? 네. 회장님 덕분에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아들 돌잔치에 못 가서 미안허이. 바쁜 일이 있어서...
훈기는 회장의 말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 아닙니다. 제 아들을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 영광스럽습니다.
훈기는 말로만 들었던 원 회장의 따뜻한 카리스마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모든 이에 대해 알고 있고, 챙기려 하는 그 모습은 모든 조직원, 회사 직원들에게 언제나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훈기 역시 흑사회의 일개 행동 대장에 불과한 자신의 아들 돌잔치까지 신경 써 주는 원 회장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 가정도 있으니까 이제 그 일에서 손 떼고 업체로 들어가는 건 어떤가?
원 회장의 말에 훈기는 머리를 더욱 숙이며 말했다.
- 감사합니다. 회장님께서 처리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훈기에게 말했다.
- 자리에 앉게나.
훈기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파에 앉았다. 무영은 원 회장 옆에 서서 초조하게 메이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남의 소식도 궁금했지만,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조직을 공격했는지도 궁금했다. 얼마 후 메이양이 도착했고, 무영은 원 회장의 앞으로 메이양을 데려왔다.
- 오랜만이구나.
원 회장의 말에 메이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 회.. 회장님. 무슨 일로...
메이양의 말에 무영이 대답을 했다.
- 일남이 아직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꼭 지키는 녀석인데.
메이양도 일남이 얼마나 약속에 철두철미한지 잘 알고 있었다. 배에 칼을 맞고도 반드시 보고하라는 말에 사무실로 돌아와 보고를 마친 후 기절을 했던 일까지 있었다. 그런 일남이 약속 시간을 어겼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죽었거나 아니면 올 수 없는 상황에 빠졌거나. 메이양은 그 말에 놀라서 대답을 했다.
- 아까 낮에 웨이룽이 죽은 곳에서 그쪽 놈 하나를 잡아서 물었더니 톰슨 병원이 배후라고 해서...
원 회장은 톰슨 병원이라는 말을 듣자 고개를 돌려 메이양을 쳐다보았다.
- 톰슨 병원?
메이양은 원 회장의 질문에 몸이 굳었는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 네.. 분.. 분명 톰슨 병원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흥분한 상태여서 일남 대장이 직접 가본다고 했습니다.
무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 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무영의 말에 메이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뇨. 첸은 다른 루트로 알아본다고 했습니다만... 왜...
무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 첸이 잡혔어. 톰슨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서.
- 첸이요?
메이양은 첸이 잡혔다는 말에 당혹스러워했다.
- 함정이었을 거야.
원 회장의 말에 모두들 원 회장을 돌아보았다.
- 옛날에 일제시대 때부터 쓰던 방법이지. 적에게 미끼로 던져주고, 위급한 상황을 자초하다가 마치 어쩔 수 없이 얘기하는 것처럼 거짓 정보를 흘리는 거지. 대개는 극한에 몰린 아군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어. 가족을 이용해서.
메이양은 원 회장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메이양은 마음이 급해졌다.
- 제가 바로 그곳으로 가보겠어요.
메이양의 말을 무영이 막았다.
- 지금은 자중할 때야. 일남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보는 게 우선이야. 그리고 지금 너는 가봤자 또다른 희생자가 될 뿐이야.
무영은 원 회장을 보며 말했다.
-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일남의 정황만 파악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원 회장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영이 잡히거나 할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다르게 원 회장의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다. 무언가 크게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전쟁이나 파괴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근간을 흔들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 회장은 무영에게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조심해라.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설사 일남이 위험할지라도.
원 회장의 말에 메이양과 훈기가 동시에 원 회장을 쳐다보았다. 평소 원 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조직과 관련된 사람은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오늘은 전혀 뜻밖의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호의적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네. 알겠습니다.
무영은 원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원 회장은 메이양과 훈기에게 얘기를 했다.
-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에 머물도록 해라. 이따 2층에 방이 있으니까 거기서 쉬면 될 거다. 창 비서!
원 회장이 누군가를 부르자 문 밖에서 들어왔다. 원 회장이 창 비서에게 무언가를 지시했고, 원 회장 자신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뭔가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 파도 위에 타고 멀리 떠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이 파도에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파도 안에 가라앉더라도 후회는 없다. 다만 자신의, 그리고 자신을 믿고 모든 걸 바친 이들의 복수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이 남았다.
- 운명이 알겠지.
원 회장은 잠시 마른기침을 쿨럭이고는 눈을 감았다.
밖으로 나온 무영은 집안에서 가장 평범한 차를 골라 탔다. 그리고 톰슨 병원이 있는 송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영 자신도 이번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단순히 정신과 여의사 하나 조사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것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된 것 같은 초라한 느낌이었다. 일남을 만나서 얘기를 듣거나 톰슨 병원에 잠입해서 최대한 정보를 끌어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까 여자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자기가 직접 웨이양과 관련된 일을 할 걸하고 후회를 했다. 하지만 무영도 그들이 그렇게 조직적이고, 거대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합법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에 무영은 더욱 놀랐다.
- 톰슨 병원으로 가보면 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