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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90화 (90/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7. 진실의 문(2)

차는 서울을 빠져나가 경기도 외곽을 향했다. 세현은 창문을 살짝 열고 차창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갔다. 싱그러운 5월의 봄바람이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

- 정신없으니까 문 좀 닫지.

철구가 세현에게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 답답해서 그래요. 그리고 5월 바람이 좋아서요.

세현의 말에 철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 소풍가는 거 아니야.

세현은 다시 입을 삐쭉거리며 창문을 조금 닫았다. 철구는 경준에게 들은 얘기를 석호와 세현에게 해 주었다. 석호는 다소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고, 세현은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이 말을 했다.

- 그게 문제인가요?

- 아가씨가 봤을 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그냥 천재의 연구가 아니고, 어쩌면 그 정태라는 사람도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거야. 본인이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철구의 말에 세현은 다시 반문을 했다.

- 이용당하다니요? 특허를 받고, 거기서 일을 하는 게 어떻게 이용당하는 거죠?

철구는 여전히 앞만을 주시한 채 얘기를 했다.

-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야. 그 정태라는 사람도 당신이나 나처럼 기억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전에 신부님이 말한 것처럼 기억을 지웠다거나 했다면?

철구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건 아직까지 불가능해요. 그게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데요.

철구는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나 나나 그럴 수도 있으니까.

- 황당한 가정이에요. 그리고 기억을 지웠다면 몽땅 지웠겠지, 일부만 지우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 그러니까 일부만 기억이 안 나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당신처럼 특정한 기억만 지워지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그럼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뭐야?

철구의 말에 세현은 불만스러운 듯이 말을 했다.

- 그거야 모르죠. 더 연구를 해 봐야 알겠죠.

철구와 세현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석호가 입을 열었다.

- 일단 어느 것도 정확한 게 없으니까 더 알아보고 결론을 내리죠.

석호의 말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5월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외곽 길을 벗어나자 멀리서도 한 눈에 새마음 병원이 보였다. 철구는 석호에게 병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세우도록 했다.

- 왜 안으로 안 들어가요?

철구는 차에서 먼저 내리며 말했다.

- 뭔 병원이 온통 CCTV인지 저기 앞에 입구부터 쫙 깔려 있어.

세현은 그 말에 잠시 인상을 쓰다가 내렸다. 철구는 두 사람을 이끌고 숲길 쪽으로 걸었다. 길은 울퉁불퉁했고, 숲은 우거져 있어서 걷기가 불편했다.

- 이런 데로 가야 되요?

세현이 불평을 터트리자 철구가 한 마디 했다.

- 오늘까지만 그냥 조용히 따라 오면 안 되나?

철구의 말에 세현은 철구의 뒤에서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할 때 철구가 세현을 붙잡았다.

- 참 성가신 여자야.

철구가 붙잡아준 게 고마운 세현이었지만, 철구의 말에 또다시 혼자 투덜거렸다. 세 사람은 숲길을 20분 정도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숲 한 가운데 흉물처럼 남아있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건물이 보였다. 입구에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라는 간판 거의 떨어질 듯 달려있었다.

- 여긴가요?

석호가 철구에게 묻자 철구가 고개를 끄떡였다.

- 지난번에 한 번 왔었는데, 그때보다 더 무너진 것 같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이쪽이 입구 부분이었고, 저기 앞으로 들어가면 로비였어요.

석호는 자신의 기억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말했다. 가장 기억이 명확한 석호가 먼저 앞장을 서서 가며 말을 했다.

- 이쪽에서 저 뒤로 가면 화장실이었고, 여기가 엘리베이터 자리군요.

석호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뒤로 돌아 앞으로 갔다. 철구는 그런 석호의 뒤를 따르며 기억을 하려 했지만 무언가가 가로막힌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 이쪽에서 보면 저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석호의 말에 철구가 얘기를 했다.

- 저기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요. 지난번에 제가 그 아래로 내려가 봤는데, 그냥 지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창고 같은 공간이 있더라구요.

석호는 철구를 보며 말했다.

- 그 아래가 연구실이었죠. 그리고 그 아래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이 하나 더 있어요. 그 아래에서 저랑 철구 씨가 싸웠죠.

그때 기억이 떠오른 석호는 피식 웃었다. 여기에 침투해 들어온 게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지하로 내려와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철구는 이 폐허 안으로 들어온 이후 유난히 말이 없는 세현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철구와 석호가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내려가자 세현은 무언가 놀란 듯이 연구실 벽을 쳐다보았다.

- 이... 이게 뭐지?

벽에는 희미한 매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주 : 닥터 최세현, 부 : 닥터 이정태'

세현은 그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번과 같은 어지럼증은 아니었기에 참을 만은 했다. 세현은 철구와 석호가 지하 2층으로 내려간 것을 보고 따라서 아래로 향해 갔다. 계단 아래로 내려오자 석호가 마지막 방문을 열고 철구에게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었다.

- ... 실린더 안에 혜민 씨가 있었죠. 그리고 저 쪽에 이 연구소 사람들이 모여 있었구요. 그리고 그 머리 하얀 남자, 피터가 얘기를 했죠. 혜민 씨는 열성 유전자의 발현이라고. 그리고 곧 이어서 경비원들이 왔죠. 저는 다리에 총을 맞았고, 철구 씨가 어떤 여의사를 인질로 잡았죠.

세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철구는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며 무언가 흐릿한 영상이 흘렀다. 그러더니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파왔다. 철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 앉아 주변을 살피며 혼자 중얼거렸다.

- 참... 참아야 해.. 실... 실린더, 피터, 여... 열성.. 유전자, 여... 여의사... 혜... 혜민이... 아... 아들...

철구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석호와 세현이 놀라 철구 앞으로 다가왔다. 세현은 얼른 철구의 뒷목을 치며 말했다.

- 뇌압이 높아져서 그래요. 피 닦을...

세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의 소매 부분을 가리키며 석호에게 말했다.

- 여길 찢어주세요.

석호는 세현이 시키는 대로 세현의 블라우스 팔 부분을 찢었다. 그러자 세현은 그 블라우스 팔 부분을 두 조각으로 다시 찢었다.

- 신부님은 철구 씨가 못 움직이게 붙잡아 주세요. 조금 있으면 경련이 일어날 거예요. 특히 가급적이면 피가 안으로 넘어가지 않게 해 주세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철구의 몸뚱이를 부여잡았다. 세현은 코피가 흐르게 놔두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메스.. 메스가.. 잠시만요..

세현은 실린더 앞 쪽으로 가서 깨진 유리 조각을 들고 왔다.

- 뭐 하려시려구요?

석호가 몸부림치는 철구를 부여잡으며 세현에게 물었다.

- 뇌압은 혈액이 뇌로 몰려서 높아지는 거예요. 피를 흘리면서 뇌압을 줄이기 때문에 가장 약한 혈관이 터져서 코피가 나는 거죠. 손 꽉 잡아주세요.

그러더니 유리 조각으로 철구의 손가락 끝을 찔렀다. 열 손가락 모두를 찔러대자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내리자 세현은 자신의 블라우스 천으로 철구의 손을 감았다. 얼마 후에 철구의 몸부림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석호는 팔에 힘을 빼서 철구의 몸을 조금 풀어주었다.

- 벨트 풀어주시고, 편하게 눕혀주세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철구를 부축하고 그나마 깨끗한 곳에 눕혔다. 철구는 아직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약간 경련을 했다.

- 얼른 가서 소독을 해야 되요. 지금은 응급 처치로...

그 순간 철구가 마치 괴물처럼 석호를 밀어내고 세현의 목을 부여잡았다.

- 너... 너였어. 혜민이를 그렇게 만든 게..

철구가 너무 세게 세현의 목을 부여잡아 금세 세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석호는 얼른 철구를 뜯어 말렸다.

- 철구 씨.. 이성을 찾으세요.

석호가 강한 힘으로 철구를 밀어붙이자 철구는 세현의 목에서 손을 놓으며 구석으로 나가 떨어졌다. 철구는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 이성? 지금 이성라고 했습니까? 제 아내가 이곳에서 끔찍한 일을 당했어요. 나도 내 인생을 잃었고. 그리고 우리 아이도...

철구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석호는 그런 철구에게 말을 했다.

-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여자가...

철구는 석호의 말을 끊고 얘기를 했다.

- 맞았어요. 저 여자였어요. 저 여자가 내가 잡은 인질이었어요. 기억이 나요. 분명하게 혜민이를 두고 저 여자 목에 칼을 대고 나왔어요. 보라색 나비핀. 그리고 뇌 과학 연구 센터 최세현. 저 여자!

철구의 말에 세현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 아.. 아니에요. 저.. 전... 전 그렇지 않아요.

철구는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거짓말 마! 너야! 너희 일당이 그랬어. 너희 일당이 혜민이를 가뒀고, 우리 아이를... 죽어버릴 거야.

철구가 다시 달려 들려고 할 때 석호가 철구를 뜯어 말렸다.

- 세현 씨 일단 밖으로 나가세요. 제가 막을 테니까.

세현은 놀란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 철구는 죽여버리겠다며 소리를 질렀고, 석호는 그런 철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 철구 씨의 분노는 알겠지만, 저 여자는 지금 기억을 잃었어요. 기억을 되찾고 그 일당을 찾아야죠. 저 여자가 아는 걸 찾아야죠. 철구 씨!

철구는 석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분노가 온몸을 사로잡았다.

- 신부님, 이거 놔요. 이러면 제가 신부님도 가만히 두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석호는 완강하게 철구를 부여잡았다.

- 복수를 해도 돼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그러나 철구는 석호의 팔을 쳐내면서 석호에게 주먹을 날렸다. 석호는 그 주먹을 맞으며 다시 철구를 끌어안았다. 안면에 정통으로 주먹을 맞았기에 눈두덩이가 부어올랐지만 석호는 힘을 주며 그를 끌어안았다.

- 철구 씨! 지금 분노로 저 여자를 죽이면 혜민 씨는 못 찾아요.

철구는 석호의 말에 잠시 몸부림을 치다가 혜민이라는 말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 그 인간들... 다 죽여버릴 겁니다. 흑흑흑...

석호는 그런 철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 네. 그러셔도 돼요. 저도 그 인간들을 죽이는 걸 도와드릴게요.

철구는 그런 석호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석호는 철구를 다독이며 말했다.

- 철구 씨는 강한 사람입니다. 철구 씨가 제게 혜민 씨를 부탁했지만, 저 혼자는 힘들어요. 철구 씨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저 여자의 기억도.

철구는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며 울었다.

- 혜민아....

밖으로 나온 세현은 한참동안 기침을 해댔다. 그러다가 주변을 돌아보자 전과 같은 흐릿한 영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들고 다니는 수많은 의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세현에게 했다.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나온 지하실 연결 통로를 보았다.

- CS2...

세현은 그리고 고개를 돌려 로비를 보았다.

- 미안합니다.

철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총소리. 세현은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안에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철구와 석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세현이 로비 앞에 쓰러진 모습을 보았다. 석호는 얼른 달려가 세현을 안아들었다.

- 이봐요. 세현 씨.

철구는 그런 석호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석호는 다급하게 철구에게 얘기를 했다.

- 병원으로 옮겨야겠어요. 철구 씨도 치료받아야 하고.

석호가 세현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철구는 그런 석호의 뒤를 따라 나갔다. 울퉁불퉁하고 험한 길이라 석호가 세현을 업고 가기 몹시 불편해 보였다.

- 젠장. 죽일 년을 살리려고 가야 되니.

철구는 석호의 옆으로 가서 세현을 들어 자신의 등으로 옮겼다. 헉헉거리며 앞으로 가던 석호는 철구를 한번 쳐다보았다.

- 제가 해도...

- 기억이 살아날 때까지 만입니다. 그 이후엔 나도 내가 이 여자를 어떻게 할지 몰라요.

철구는 세현을 업고 험한 길을 마치 평지 가듯 달려갔다. 석호는 그런 철구의 뒤를 따라 뛰었다. 차에 오르자 석호는 가장 가까운 동네 의원으로 갔다. 동네 의원에서 철구도 대강 치료를 받았고, 자신도 철구에게 맞아서 부은 자리에 얼음찜질을 했다. 세현은 링거를 꽂고 병실에 누워 있었다.

- 미안했습니다. 신부님.

철구는 자신에게 맞아 눈이 부은 석호를 보며 사과를 했다. 석호는 얼음찜질을 하며 말했다.

- 아니에요. 저도 한 대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나던데요.

철구는 세현이 누워있는 병실에서 나와 바깥으로 가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복수도 복수지만 혜민과 아이를 찾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을 잠시 잊고 행동한 자신을 자책했다. 복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그 두 사람은 저 여자를 잃으면 찾기 힘들다는 걸 철구도 잘 알고 있었다. 담배를 비벼 끄고는 철구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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