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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89화 (89/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7. 진실의 문(1)

7. 진실의 문

3층짜리 건물 아래에 있는 노래방은 이미 폐업한 지 오래되었는지 온갖 집기들이 잡다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떨어져 나간 문이 보였고, 그 뒤로 더러운 소파 하나와 여러 대의 브라운관이 보였다. 브라운관 역시 깨진 것이 몇 개 있었고, 떨어진 브라운관 조각이 바닥에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 뒤 쪽에는 옆방과 연결되는 조그만 쪽문이 하나 있었다.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방이 하나 나왔고, 거기에는 탁자 하나와 소파, 그리고 각목이나 쇠파이프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 없는 기계가 하나 놓여 있었다.

- 형님, 여기는 올 때마다 뭔가 기분이 나쁘네요.

성준의 말에 철구는 피식 웃었다.

- 경찰이 이런 데를 기분 나빠하면 안 되지. 이런 곳에 대개 나 같은 음산한 인간들이 사는데 말야.

철구의 말에 성준은 농담을 했다.

- 형님같은 범죄자만 있으면 경찰들 다 손가락 빨라구요?

성준의 실없는 말에 철구는 구석에 놓인 냉장고 안에서 커피를 하나 꺼내서 철구에게 내밀었다.

- 형님, 갑자기 많이 변하면 안 돼요. 웬 커피에요?

- 몰라. 여기 열어보니까 몇 개 있길래..

성준은 커피를 따다가 멈추고 철구를 쳐다보았다. 철구는 그런 성준을 흘끗 보더니 자신도 커피를 하나 따서 마셨다.

- 의심은. 자식.

- 의심이 아니라 정체가 불명의 음료수잖아요.

철구는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 아직 안 상했나 보군. 예전에 여기 노래방 할 때 있던 것들이야.

철구의 말에 성준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 그 이정탠가 하는 놈. 뭐하는 놈이에요?

성준의 말에 철구는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 의사인데, 나도 잘은 몰라. 그 의뢰받은 여자 애인이라는 정도?

철구의 말에 성준은 서류철 안에서 A4지 몇 장을 꺼냈다.

- 이 정도로 완벽한 스펙을 갖고 있는 놈은 처음 봐서요.

성준의 말에 철구는 종이를 건네받고 말했다.

- 그렇게 대단한 놈이야?

- 그렇게가 뭘 말하는지에 따라서요. 일단 하버드 의대 출신에, 의대 출신인 놈이 공인 회계사 자격증에, 국제 변호사 자격증도 갖고 있더라구요.

철구는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 무지 똑똑한 놈인가 보군.

- 그냥 똑똑한 놈이면 저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는데요. 나이는 서른다섯인데 갖고 있는 국제 특허만 다섯 개에요. 로열티로 매년 10억 정도를 받고 있구요.

- 부자로구만. 또 놀랄 만한 거 있어?

- 일단 새마음 병원 수석 팀장이구요. 현재는 서울대학교 의대 초빙 강사인데, 뭐 거의 교수 대접을 받는 것 같더라구요.

철구는 서류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 그 놈이 잘난 건 알겠는데, 뭐 구린 건 없어?

성준은 서류들을 다시 한 번 보면서 말했다.

- 범죄 기록이나 채무 기록 모두 깨끗해요. 심지어 경범죄 하나도 없더라구요. 정보과에서 일하면서 이 정도인 녀석은 처음이에요.

철구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했다.

-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야.

- 누군가의 손을 탄 것 같진 않아요. 그냥 태생적으로 모범생인 거죠. 그런 놈들 있잖아요. 머리 좋고, 집안 좋고, 인물 좋고.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사는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요. 형님처럼요.

성준의 마지막 말에 철구가 고개를 들며 얘기했다.

- 어쭈 많이 컸어. 깔 줄도 알고.

성준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 까는 거 아니에요. 형님이야 말로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말도 안 되는 사람이잖아요. 뭐 전설로 따지면 '구미호'급은 되죠.

성준의 말에 철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서류들을 읽었다. 성준은 철구가 듣던 말던 혼자 말을 했다.

- 저 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 전교 1등 녀석이 있었어요. 정말 말도 안 되게 천재적인 놈이었죠. 그 녀석이 공부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시험만 보면 늘 1등이었죠. 뭐든지. 근데 그 녀석이 약간 똘아이 기질이 있어서요. 시험 중간에 집에 가고 막 그랬거든요. 그래도 전교 10등 밖으로 나가질 않았어요. 학교에서는 그 녀석이 서울대 갈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똘아이 같은 녀석이 갑자기 '스님'이 되겠다면서 대학을 안 간다고 그러더라구요. 근데 웃긴 건 그 녀석 아빠가 목사였어요. 큰 교회 목사 있잖아요. 뭐 난리가 났었죠. 근데 본인이 안 간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 녀석은 원서도 안 쓰고 졸업 하자마자 산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경찰대 다닐 때 다른 친구 녀석한테 들은 얘긴데, 뭔 바람이 불었는지 의사를 한다고 의대에 갔다고 그러더라구요. 뭐 의대가 가고 싶다고 맘대로 가는 데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죠.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녀석 소식을 들으니까 정신이 완전히 돌았는지 의대 때려치우고 독일로 갔다고 그러더라구요. 독일로 간 이후 소식은 모르죠.

철구는 성준의 혼잣말처럼 하는 얘기를 들으며 말했다.

- 정말 똘아이같은 놈이군.

그 말에 성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 한 때 그 녀석이 엄청 부러웠었죠.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는 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녀석이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쩌면 그런 인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 녀석이 불쌍하더라구요.

성준의 말에 철구는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 빙고! 그 똘아이는 정말 행복을 몰랐을 거야. 누가 자기를 부러워하는 게 싫었을 수도 있지. 마치 여기 이정태란 놈처럼.

철구가 서류 중 한 장을 들며 말했다.

- 뭐가 있어요?

철구는 서류를 보여 주며 말했다.

- 이거. 이정태란 놈이 후원하고 있는 단체들.

성준은 그 말에 철구를 쳐다보았다.

- 이건 착한 일이잖아요.

- 겉으로 보기에 착한 일이지. 하지만 잘 봐봐. 어떤 단체인지.

성준은 철구가 밑줄 친 부분을 읽어보았다.

- 희귀병 아동 기금, 줄기세포 연구회, 어린이 사회 복지 재단.... 이게 왜죠?

성준의 말에 철구가 종이에 있는 내용을 자신의 수첩에 옮겨 적으며 말했다.

- 이 단체들은 모두 '맥컬리 병원'에서 운영하는 것들이지. 너도 알다시피 맥컬리 병원과 내가 참 인연이 깊잖아.

철구의 말에 성준이 뭔가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 이놈들이 이런 복지 재단을 왜 운영하는지 알게 되면 놀랄 걸? 인간을 갖고 노는 곳이니까.

철구의 말에 성준은 놀라서 말했다.

- 어린 아이들을요?

- 겉으로 보기엔 치료지. 희귀병에 걸린 아이들이니까 어차피 치료제도 없거든. 그러니까 그 놈들이 맘대로 임상실험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지랄들을 하지.

철구의 말에 성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 개새끼들이군요.

철구는 그 말에 놀라서 성준을 쳐다보았다.

- 어린 애들을 대상으로 그런 짓을 하다니....

철구는 성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 개를 모욕하지 마. 개도 새끼들은 보살피니까.

철구의 말에 성준이 피식 웃었다.

- 그렇군요. 그나저나 그럼 이걸로 이정태라는 놈이 그놈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확실하네요.

그런데 방금 전까지 확신에 차 있던 철구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 뭔가 냄새가 나.

철구의 말에 성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냄새요? 이 정도 연결 고리면 명백하잖아요.

철구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너무 명백하니까 냄새가 나는 거야.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치 이건 보여주기 위한 것 같아. 누군가 '이정태'라는 놈을 의심하라고.

철구의 말을 성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비약이 아닐까요? 이 정도 인간이 세상에 없지는 않으니까요.

- 그렇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거야. 이 정도 인간은 세상에 꽤 존재할 수 있어.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존재할 수 없을 거야.

- 만들어져요?

- 아까 얘기한 거 있지? 국제 특허만 5개라고. 아까 보니까 전부 의학 특허이던데. 의학 특허는 아주 까다롭지. 연구 개발로 특허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FDA 승인도 받아야 돼. 그런데 특허 내용이 개인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던데. 그런데 보면 임상 실험부터 논문까지 모두 '톰슨 병원'에서 해 줬더군. 생각해 봐. 아무리 하버드 대학 출신의 뛰어난 인간이라도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해 줄까? 그리고 복지 재단의 후원도 특허권과 관련한 대부분의 돈이 그 쪽으로 후원이 되고 있지. 이건 무조건 냄새가 나는 거야.

- 그렇군요. 그럼 결국은 이정태는 그냥 꼭두각시라는 말인가요?

- 꼭두각시인지 아니면 주도적으로 일을 했는지는 알아봐야지.

철구는 탁자 위에 있던 서류들을 정리하여 성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 고맙다.

성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 고마우시면 소주라도 한 잔 합시다. 맨날 사이다만 마시지 말고.

철구는 성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준 역시 철구를 따라 일어났다.

- 나갈 때는 뒷문으로 가라. 요즘 날 감시하는 놈들이 있어서.

- 알겠습니다. 저도 나름 베테랑 형사에요.

- 알겠다. 나 먼저 나간다. 조심해서 가라.

철구가 먼저 밖으로 빠져 나가자 성준은 서류를 챙겨서 뒷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 힘들게 사시는구만.

철구는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한번 살펴보았다. 평소에 느껴지던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 이상하군.

철구는 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세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좀 봅시다.

- 무슨 일이죠?

- 당신 애인.

- 알겠어요. 금방 가죠.

세현은 사무실로 가던 중에 철구의 전화를 받고 차의 방향을 돌렸다. 가던 도중 세현은 정태의 전화를 받았다. 세현은 정태의 전화를 받을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핸즈프리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세현이 전화를 받자 정태는 다소 걱정스러운 말투로 얘기를 했다.

- 몸은 괜찮아? 그렇게 가고 난 다음에 연락이 없어서. 전화를 해도 받지도 않고.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미안해. 일이 많았어.

세현의 시큰둥한 반응에 정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 왜 그래?

세현은 철구와 만나기 전까지 가급적이면 정태와 얘기를 나누거나 만나는 일은 피하려 했다. 아직 무엇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르게 무언가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응?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요즘 피곤해서 그래. 지난번에 어지럼증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래.

- 그래? 약은 먹고 있어?

- 응. 지난번에 처방해 준 약 먹고 있어.

대답 이후에 세현이 말이 없자 정태는 아쉬운 듯 한 마디 했다.

- 시간 되면 밥 먹자. 너 시간 되는 날 내가 어떻게서든 오프 내 볼게.

- 고마워.

정태와 전화를 끊은 세현은 왠지 마음이 아팠다. 괜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 같았고, 오히려 가장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멀리하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현은 일단 철구를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결정을 하고 싶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현이 차를 몰고 철구의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철구는 세현의 차를 한쪽 구석에 세우게 하고 세현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

- 좀 있으면 신부님도 올 거니까 기다려.

철구의 반말에 세현이 철구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 지난번에도 그랬고, 지금도 왜 반말이에요?

세현의 표정을 룸미러로 본 철구는 말을 끊으며 말했다.

- 미안하게 됐수다. 내 성격이 원래 글러먹어놔서.

세현은 지저분한 차를 보며 다시 한 마디 했다.

- 차 청소 좀 하지 그래요?

철구는 다시 룸미러로 세현을 보며 말했다.

- 탈 자리만 있으면 되지 뭘 그리 신경을 써요? 그리고 난 이게 편하니까.

철구와 세현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멀리서 멋진 스포츠카 하나가 철구의 사무실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세현이 차에서 냉큼 내리며 말했다.

- 기왕이면 저 차 타고 가죠.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철구는 그런 세현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 하여튼 여자란...

철구는 차에서 내려 석호가 탄 스포츠카 앞으로 다가갔다. 석호는 차에서 내리며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석호는 세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철구 쪽을 향해 말했다.

- 정보가 있으시다구요?

세현은 석호에게 반가운 척을 하며 다가가다 철구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조금 민망해졌다. 철구는 석호에게 말을 했다.

- 가면서 얘기 하죠. 이 아가씨가 내 차 타고 가기 싫다는 데 신부님 차를 타고 가도 될까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 그러시죠.

차에 세 명이 타자 석호가 물었다.

- 어디를 가는 거죠?

그러자 철구가 잠시 생각을 하다 말을 꺼냈다.

-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요.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지 무언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서 겪은 경험이 같다면 세 명 모두 뭔가가 떠오르겠죠.

철구의 말에 세현이 고개를 저었다.

-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는 새마음 병원 안에 있어요. 하지만 거기는...

세현의 말을 끊고 철구가 말을 했다.

- 옛날 자리가 남아 있어. 전에 내가 가 봤거든. 폐허이긴 했는데, 왜 아직 안 부수고 흉가처럼 놔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철구의 말에 세현은 입만 삐쭉거렸다. 석호는 룸미러로 세현을 보며 말했다.

- 일단 그 장소로 가보죠. 저 역시 뭔가 떠오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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