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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87화 (8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6. 어둠의 그림자(5)

그러자 할머니는 눈짓으로 세현의 뒤쪽 모니터를 가리켰다. 세현은 할머니의 눈길을 따라 뒤쪽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문 앞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세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 CCTV였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뭘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다.

- 아니 그럼 내가 뭐 천리안이당가? 벽 뚫고 보게? 저거이 가끔 고장이 나서 그렇지 아직은 쓸만 하구만.

- 아, 네.... 그렇죠.

세현은 그 순간 여기까지 온 자신을 탓하며 빨리 핑계를 대고 일어나려고 했다. 세현이 불안해하자 할머니는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 불안해허지 말랑께, 불편해허지도 말고. 다 만날 사람이니께 만난겅께.

- 네.

세현의 반응에 할머니는 밖에 크게 소리를 쳤다.

- 커피 두 잔 가져오드라고.

할머니의 말에 밖에서 '네.'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현은 피식 웃으며 할머니에게 말했다.

- 커피 머신도 있으시던데요. 뭐랄까...

점집하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다가 실례인 것 같아 말을 흐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내가 마실라고 상게 아니고, 지난 번에 점을 봐준 예펜네가 고맙다고 하나 사다준 거구만. 남펜이 바람난 거 알려줬더니 말여.

세현은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 그래요? 그 아주머니 남편분하고 잘 되셨나봐요.

- 어허.. 이렇게 세상을 이러코롬 모르니깐 지 인생이 어찌 꼬였는지도 모르지.

- 네?

그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한 번 바람난 놈은 어쪄도 안 돌아오는겨. 다시 돌아오믄 그띤 이빨도 홀랑 빠지고, 머리가 허옇게 세서 온당께. 그런디도 또 기회만 있으믄 그 놈의 걸 못 피워서 지랄병이 난당께.

- 아.. 네..

- 워차피 깨진 판잉께 위자료나 두두커니 챙그라고 했쟤. 돈은 쌔고 쌘 놈잉께. 그게 가자 좋은 해결책이랑께.

- 네. 그렇군요.

- 처녀도 알아 둬. 바람 피는 놈은 워찌 붙잡아도 바람 피웅께 거저 빼먹을 거 있으믄 빼 먹고 끝내는 게 좋은겨.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커피 머신에서 갓 내린 커피가 안으로 들어왔다. 향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커피 냄새를 맡으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할머니는 자신의 잔을 한 모금 홀짝 마시더니 세현에게 말을 꺼냈다.

- 처녀는... 돈 받으러 온 건 아닌 거 같구...

할머니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세현 쪽으로 얼굴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세현은 커피를 마시다가 할머니의 얼굴이 앞으로 다가오자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 가만 있으랑께.

세현은 깜짝 놀라 커피 잔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는 얼굴을 세현과 가까이 붙이더니 세현의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세현은 그 손길이 어색하고 무서웠지만 꼼짝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세현의 눈앞에서 할머니의 반지가 반짝거렸다. 할머니는 세현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 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현은 이게 뭔가 싶어 그 자세로 그대로 있었다.

- 마시랑께.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멍하니 있다가 깜짝 놀랐다.

- 네? 아.. 네..

할머니는 세현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 눈을 감았다. 세현은 할머니를 쳐다보다가 신기하게 반짝이는 반지를 보며 물었다.

- 할머니 반지가 신기하게 생겼네요.

- 쓸데없는 소리 말아.

세현은 할머니의 말투가 갑자기 바뀐 것을 알고는 무언가 이상했지만, 세현은 입을 다물었다. 밥상 위에 쌀알을 던지기도 하고 옆에 놓인 칼을 들었다 놓기도 하며 할머니는 뭔가 부산스러웠다. 그러더니 할머니는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세현은 그 순간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무언가가 자신의 주위를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눈을 번쩍 뜨더니 세현을 향해 무서운 눈빛을 쏘아 보았다. 그리고는 굵은 목소리로 세현을 꾸짖듯이 말했다.

- 네 이년. 네 년이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늘을 넘봐. 인간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고 인간을 저버린 채 하늘을 넘보다니... 네 이년...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는 무언가 분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거칠게 숨을 쉬며 세현에게 소리를 쳤다.

- 네 년은 이미...

할머니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목을 부여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세현은 깜짝 놀라 할머니 옆으로 가서 할머니를 똑바로 눕히고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 할머니,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할머니...

세현의 말에 할머니는 눈을 번쩍 떴다. 세현은 그 눈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 휴우. 호들갑 떨지 말랑께. 괜찮여.

할머니의 침착한 반응에 세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 정말 괜찮으세요?

할머니는 자리에 다시 앉으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세현은 할머니 옆에서 나와 맞은 편에 앉았다.

- 괜찮당께.

할머니의 말에 세현도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는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세현에게 말을 했다.

- 나가 말여. 이 짓을 거의 육십 년을 넘게 했당께. 근디 말여 장군님이 이렇게 노하신건 처음이여. 월매나 노하셨는지...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잠시 마음을 고르고 얘기를 했다.

- 왜 노하셨지요? 제가 하늘을 넘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세현의 말에 할머니는 마음을 잡고 말을 했다.

- 나가 전에 처녀한테 말한 게 있지?

- 네. 두 명이 보인다는 말씀이요.

- 그라지. 그랴. 처녀 얼굴에 말여 두 사람이 있당께. 꼬부라진 할마씨 하나랑 지금 처녀랑 말여. 긍께 워찌 한 사람이 두 명이 있느냐? 고건 하늘을 넘봐서 그란 거지. 장군님이 노하셔서 쌩 가버리셨는디.... 암튼 처녀는 복잡혀. 아주 복잡하당께. 긍께 말여.

할머니는 세현에게 무언가 다짐을 하듯이 말을 했다.

- 발을 잘 디뎌야 되야. 그게 진창인지 마른 땅인지 잘 보고 디디란 말여. 즐대로 넘에 말 넙쭉 믿지 말고. 알긋재?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깊게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세현에게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 처녀 신상이 어수선 햐. 조만간 뭔 일이 있을 텡께 조심하더라고. 딸 같아서 하는 말잉께 잘 새겨들어.

세현은 어색하지만 최대한 밝게 웃으려고 했다.

- 네. 마음에 새겨 둘게요.

세현이 일어나자 할머니는 따라 일어섰다. 세현이 지갑을 열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런 걸랑 생각 말랑께. 자네 신상이 아니라 다른 일로도 볼 꺼랑께. 으짜면 처녀가 내 한을 풀어줄 수도 있을랑가 모르겄네.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저는 영매(靈媒) 같은 기운이 없는데요?

그러자 할머니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처녀는 그런 게 읎지. 근디 처녀 주변에 워낙 그란 사람이 많이 있당께. 또 볼 거야.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그냥 고개를 끄떡이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세현은 차에 올라타고는 혼자 어이가 없어 웃었다.

- 두 명? 하늘을 넘본다고? 뭔가 알까 해서 왔는데 더 복잡해졌잖아. 휴...

세현은 시동을 걸고 어딘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출발을 했다. 그러나 이 때 세현은 앞으로 찾아올 모두와의 질긴 인연과 운명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세현이 나가자 불상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빌었다.

- 즈 처녀가 불경(不敬)시럽게 하늘을 넘보았다고 허지만, 지금은 아닝께 용서해 주시구만요.

할머니는 불상 앞에서 간절히 빌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크게 소리쳤다.

- 주왕산엘 좀 들어가야 쓰것네.

할머니의 말에 아주머니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 보살님... 거긴...

- 걱정하는 맴도 알지만 다음에 저 처녀가 왔을 땐 지금 같아선 처녀도 나도 모두 죽는당께. 다 늙어서 하늘도 무심하지먼서도... 그랴도 다 뜻이 있응께 길을 가라고 하신겅께 싸게 싸게 준비허드라고.

할머니의 말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가 말없이 긴 여행을 준비했다. 할머니는 낮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 으짜면...

할머니는 무언가 불경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먹었다.

최베드로는 슈테판 추기경과 함께 은밀하게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콘클라베에 대한 소문은 이제 더 이상 뜬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화되었고, 그런 기정사실 아래에서 아우렐리오 추기경과 피오바넬리 추기경은 아예 대놓고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소문을 음모로 몰아붙이기도 하고, 서로가 도덕적으로 타락했음을 암암리에 퍼트리고 있었다. 최베드로는 그 사이에 라울이 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라울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이용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 진흙탕 개싸움이군.

슈테판은 미간을 찌푸리며 모은 정보들을 보고 있었다. 최베드로 역시 그 내용들을 확인하면서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 역대 최악의 콘클라베로군요.

최베드로의 말에 슈테판은 고개를 끄떡였다.

- 누가 되건 문제가 있는 상황이군요.

슈테판의 말에 최베드로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아직 공식적으로 시작된 건 아니니까 안 열리게 하면 되겠죠.

그러던 중 슈테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이 정도 정보로는 어느 쪽도 손을 들지 않겠군요. 좀 더 확실하게 옭아맬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합니다.

슈테판의 말에 최베드로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그 때 슈테판 추기경이 어떤 문서를 하나 들고 말했다.

- 최 신부님, 이건 무슨 내용이지요?

최베드로는 그 서류를 받아 들고 읽었다. 얼마 전 중국에서 데려온 아이에 관한 보고서였다. 아우렐리오 추기경이 그 쪽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첩보 때문에 아우렐리오 추기경의 비위 사실과 결부된 문서로 첨부가 된 것이었다.

- 얼마 전에 중국에서 데려온 아이에 대한 내용입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아이가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구요?

슈테판의 말에 최베드로는 고개를 끄떡였다.

- 아무래도 연쇄적으로 벌어진 일 같은데, 이전에 일어난 일들은 오래 전 일이라 정보가 부족하더군요. 아우렐리오 추기경과 크게 관련은 없어 보입니다만...

그 내용을 차근차근 읽어보던 슈테판은 아이가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발광을 했고,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는 내용을 보더니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 이 사건이로군.

슈테판은 최베드로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갑자기 책꽂이에서 낡은 책 서류 뭉치 하나를 꺼냈다. 겉에는 'Causae de reconditis(미해결 사건)'이라고 쓰여 있었고, 슈테판은 꽤 많은 페이지를 넘기더니 최베드로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 이건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었죠.

최베드로는 그 사건을 보자 야나기사와 신부가 보낸 자료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은 야나기사와 신부가 파악한 내용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이었다.

- 이건...

슈테판은 최베드로를 보며 말했다.

- 제가 햇병아리 신부 때였죠. 그 때 일본에서 일어난 일이었죠. 그런데 그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사건이었죠.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그들과의 연계도 알아내기 힘들었죠.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게 한 사건이었죠.

최베드로는 사건 파일을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내용에서 최베드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이 내용이 사실입니까?

슈테판은 최베드로의 말에 서류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 거기 내용은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니라 전 교황님께서 작성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은 사실이 맞습니다.

- 그렇군요. 이게 사실이라면 그들과는 크게 관련이 없겠군요.

- 그렇죠.

- 그렇다면 장 신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요.

최베드로는 노트북을 열어 비밀 문서로 서류의 내용을 석호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이제 장 신부의 능력을 믿어야겠군.

최베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슈테판에게 말을 했다.

- 정보를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사실' 위주의 자료들과 증인들의 녹취록만 모아야겠습니다.

최베드로의 말에 슈테판이 말을 했다.

- 최 신부님은 이탈리아 내부에서 조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짐바브웨에는 다른 신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최 신부님이 외부로 움직이면 저들이 눈치 챌지도 모르니까요.

최베드로는 고개를 끄떡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복도 좌우를 한 번 돌아보고는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층 복도를 통해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 이 자식!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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