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6. 어둠의 그림자(3)
- 세현 씨는 미셀러니와 관련된 기억은 지워지고 있지만, 전문 지식과 관련된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 그건 저도 그렇고 정태씨도 그렇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기억 중에 어떻게 전문 지식과 관련된 부분은 지워지지 않는지. 그런데 어떻게 아셨죠?
- 네? 단순하지 않습니까? 전문 지식과 관련된 기억이 지워지는데 의사 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하지만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기억이 지워진다면 아예 사라져야 하는데 세현 씨는 단편으로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지요. 아까도 얘기하다 보니까 IMF 시절에 대해 잠깐 말씀하셨는데 아시다시피 IMF는 98년이었습니다. 지금부터 8년 전이죠. 그런데 그 때의 사실을 마치 아무렇지 않게 어제 일처럼 말씀하시더라구요.
- 네? IMF 때의 일을요?
- 네. 본인은 그게 1, 2년 전이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8년 전 일이었죠.
- 그게...
석호는 세현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 세현 씨는 기억을 잃는 게 아니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망각, 기억의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는 것이죠. 아! 물론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만 세현 씨의 기억은 잊혀지는 게 아니라 흩어지는 것 같아 보여서요. 그렇기 때문에 단편으로 떠오르고 시기상 혼란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것이죠. 물론 일정 부분 기억을 잃은 것도 있겠지요. 하지만 제 생각엔 그렇습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 저의 상태는 병원에서 이미 충분히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기억 상실이 진행 중이라는 결과를 통보받았구요.
- 누가 그런 진단을 내렸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정태 씨가 내린 게 아니에요. 새마음 병원 뇌 전문의가 내린 결론이죠.
그 말에 석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 저는 철구 씨처럼 세현 씨의 애인을 의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추론을 하자는 것이지요. 그 의사 말처럼 기억을 잃어가는데 전문 지식만 잃지 않는다는 게 놀랍군요. 물론 저장되는 영역이 다르다고 말씀하시겠지만, 제가 배운 바로는 기억의 일부가 소실되면 그와 링크된 기억들 역시 소실까지는 아니어도 문제를 잃으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 지식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데요.
- 그건 좀 더 연구를 하면 알 수 있죠.
- 좀 더 쉬운 결론이 있는데 부정하시는군요. 혹시 새마음 병원에서 세현 씨를 진단했던 그 의사가 세현 씨를 속인 거라면요?
- 그게 무슨 말이죠? 저를 속이다뇨? 그 분이 무엇 때문에 저를 속이죠?
-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세현 씨의 진단에 대해 의심을 해봐야죠. 더욱이 그 병원이 새마음 병원이니까요.
-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새마음 병원에 왜 그렇게 부정적이신지요?
- 부정적이죠. 아니 거기는 없어져야 할 곳입니다. 세현 씨도 조만간 진실을 아실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저나 철구 씨의 분노를 이해하실 겁니다.
-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점점 더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그 때 누군가 석호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 석호는 창문 밖을 보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세현에게 말했다.
- 잘생긴 외국인 신부로군요.
석호가 창문을 내리자 마르티노가 웃으면서 말했다.
- 한국에 오자마자 왜 그렇개 바빠? 이 밤에 어딜...
그러다가 석호 옆에 앉은 세현을 보더니 놀라서 말했다.
- 오우! 자매님과 함께 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마르티노의 말에 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우리 일에 도움을 주실 분이야.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가 반가워 하며 말했다.
- 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니 하느님께 내일은 감사 기도를 드려야겠군. 더 미룰 것 없이 지금 얘기하는 게 어때요?
마르티노는 냉큼 뒷좌석에 올라탔다.
- 이봐. 지금은 새벽 두 시야.
- 그러니까. 아직 주임 신부님께서 깨시려면 네 시간이나 남았다구.
마르티노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석호의 방으로 갔다가 방이 빈 것을 보고 석호를 찾으러 성당 안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성당 밖에서 익숙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리자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 오늘은 이 분도 피곤하시고 나도 피곤한걸. 우리 본격적인 작업은 내일 하는 게 어떨까?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세현은 마르티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 오. 이런... 마드모아젤. 그럼 내일 꼭 다시 뵙겠습니다.
세현은 차문을 열고 내리며 말했다.
- 신부님 자세한 얘기는 내일 나누시죠. 저는 집이 여기서 얼마 멀지 않으니까 걸어 들어갈게요. 두 분은 안으로 들어가세요.
-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세현이 차에서 내려가는 모습을 석호는 룸미러를 통해서 쳐다보았다. 세현이 내리자 마르티노가 석호에게 물었다.
- 저 여자는 뭐지?
- 의외의 연결 고리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저 여자를 좀 더 조사해 보면 커다란 무언가가 나올 것 같아.
석호가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며 말을 했다. 마르티노 역시 고개를 한 번 끄떡였다.
- 오자마자 바로 일이구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나 선생님이나 너무 부지런해.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그 말에 석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아닐걸. 실력이 모자라서 죽기 살기로 뛰는 게 아닌가?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는 고개를 저었다.
- 너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실력이 차고 넘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한국인 핏줄의 본성 같아. 왜 예전에 책에서 봤잖아. 한국인이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자료.
성당 정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석호가 말을 했다.
- 부지런하다라... 일을 많이 하는 거겠지. 산업화다 정보화다 외쳐대면서.. 나도 한국에서 자라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부지런보다는 워커홀릭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 한국 사람들은.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가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뭐 그럴 수도 있겠군.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숙소 쪽으로 걸었다. 그 때 마르티노와 석호 두 사람은 동시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계속 얘기해.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는 눈썹을 한 번 추켜올리고는 혼잣말처럼 성당에 대한 얘기며 미사에 대한 얘기를 떠들었다. 두 사람은 숙소를 지나쳐 건물 뒤로 옮겨갔다. 석호와 마르티노는 건물 뒤에 몸을 숨기고는 눈빛을 교환했다. 마르티노가 건물 바깥쪽으로 손가락질을 했고,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건물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마르티노는 재빨리 건물 밖 길을 뛰어 커다란 나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러자 거기에서 누군가가 재빠르게 정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쪽으로 뛰어갈 때 석호가 건물 뒤에서 나와 도망가는 그의 다리를 걸었다. 그러자 뒤쪽 마르티노에게만 신경을 쓰던 그 사람은 석호가 발을 거는 것을 미쳐보지 못하고 걸려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석호는 재빨리 달려가 그의 멱살을 쥐었다.
- 넌 누구냐?
하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호는 그 괴한의 멱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세웠다. 그의 얼굴에는 긴 칼자국이 하나 보였다. 몸도 다부지고 만약 석호와 몸싸움을 벌인다면 그가 우세할 것처럼 보였다. 석호는 그의 모습에 조금 놀랐지만, 자신을 감시하던 사람이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때 마르티노도 옆에 도착해서 같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는 대답이 없었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 넌 누군데 우리를 감시하는 거야?
마르티노의 말에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답했다.
- 감시 아니다. 성당이라 들어왔다.
- 뭐라고? 그런데 왜 숨어서 우리를 엿본 거야?
마르티노는 어이없어 하며 말했다.
- 성당이라 들어왔다. 엿본 거 아니다.
석호는 그의 억양을 듣고 물었다.
- 중국인입니까?
석호의 말에 그는 움찔 놀랐다. 석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이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까 철구에게 들었던 회장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의 일은 기밀 사항이라 일단 함구하고, 회장의 일을 먼저 찔러 보았다.
- 회장이 시켰습니까?
사내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비록 새벽이라고는 해도 가로등이 켜져 있는 건물 앞이라 상대의 얼굴이 훤히 보였기에 입술의 미세한 움직임을 석호는 알아챘다. 석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를 놓아주며 말했다.
- 보호인지 감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는 석호와 마르티노를 한번 흘끗 보더니 그대로 정문 밖으로 나갔다.
- 전문가로군.
마르티노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이번 일은 너무 복잡하군.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호를 미행하던 첸은 투덜거리며 호텔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헤어진 웨이룽에게 연락을 하고 온다는 것이 석호에게 걸리는 바람에 그냥 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젠장. 일이 더럽게 꼬이는군.
첸은 지난 번 흥신소 직원도 그렇고 이번 신부도 그렇고 전문가인 자신을 발견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무영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의 은닉 기술을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자부하고 있었기에 두 번이나 걸린 것이 몹시 분하고 기분이 상했다. 지난번이야 무영도 걸렸고, 회장이 직접 일을 의뢰한 사람이기에 그럭저럭 잠고 넘길 수 있었지만, 이번엔 신부가 아니었던가. 첸은 땅을 툭툭 차다가 몸을 돌려 웨이룽이 있는 곳으로 갔다. 놈은 숨는 능력이 젬병인 녀석이기 때문에 여자 감시를 맡겼는데 돌아오면 번번히 투덜거리곤 했다.
- 싸우러 왔지 감시하러 왔나!
그럴 때마다 메이양이 나서서 막아주긴 했지만 웨이룽의 불만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첸은 웨이룽에게만 여자 감시를 맡긴 것이 내심 불안했다. 불만도 불만이지만 그의 불같은 성격이 더 걱정이었다. 여차하면 엎어버리는 그 성격은 첸처럼 냉정하거나 메이양처럼 부드럽지 않으면 받아주기 힘들었다. 일남 역시 웨이룽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그 성격만큼은 늘 못마땅해 했다. 자신에게도 피해가 가고 조직에도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일남은 항상 웨이룽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하지만 웨이룽은 지적을 받을 때만 잠깐 고쳐지는 듯 하다 이내 원래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과거나 현재를 모두 감춰야 하는 이 직업에서 웨이룽만큼 주위에 많이 알려진 이도 드물었다. 의붓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못말리는 바람기, 여동생이 동네 녀석들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를 당한 것까지 그의 음울한 과거를 이 일을 하는 모든 이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술에 취해 직접 입으로 떠든 것도 있지만, 그가 이 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무렵 그가 벌인 엽기적인 복수가 모두에게 말려졌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학대하던 아버지는 아킬레스건을 잘라 시장통 양아치들에게 버렸고, 어머니는 악명 높은 정신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그리고 동생을 강간한 녀석들은 모두 잡아다 성기를 절단해 버렸다. 그런데 그 일은 그는 단 반나절 만에 그것도 어느 누구도, 당하는 이들도 모르게 당했다. 모두들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어떤 증거도 증인도 나오지 않았기에 공안에서도 그를 잡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이미 그는 흑사회에서 절대 빠지면 안 될 인물이 되었기에 윗선에서도 증거불충분으로 풀어줬다. 그의 성격은 이미 그 때부터 막무가내였던 것이었다. 첸은 운전대를 잡고 세현의 집 방향으로 운전대를 꺾었다. 첸이 도착했을 때 웨이룽은 이미 담배를 한 갑이나 피우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젠장. 누가 저 여자를 잡아간다고. 고급 술집만 가도 저런 애는 쌔고 쌨는데.
웨이룽의 불만을 들으며 첸은 쓴웃음을 지었다.
- 우리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큰형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녀석이.
챈의 말에 웨이룽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 누가 찍소리도 못 해? 오늘 들어가면 중국으로 다시 간다고 말할 거야.
웨이룽의 말에 첸은 여전히 비웃는 표정을 풀지 않으며 말했다.
- 시체로 가겠구만.
첸의 말에 웨이룽이 주먹을 어르며 말했다.
- 니가 먼저 시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닥쳐!
첸은 그럼 그를 흘낏 쳐다보고는 말했다.
- 싸움은 중국에 들어가서 하자구. 여기서 그랬다간 고향 땅도 밟기 전에 가니까.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지 맘 편하지. 안 그래?
첸의 말에 웨이룽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자 첸이 물었다.
- 여자는 방으로 들어간 게 확실하지?
첸의 말에 웨이룽은 또다시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대답했다.
- 들어갔어. 사람을 못 믿어.
첸은 그의 그런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
- 호텔로 가봐. 좀 이따가 메이양도 숙소로 가기로 했으니까.
첸의 말에 웨이룽은 툴툴거리며 말했다.
- 너나 들어가. 저 여잔 내가 맡기로 했으니까.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그 때 세현의 집 쪽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인영(人影)이 보였다.
-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