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84화 (84/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6. 어둠의 그림자(2)

- 이번 연구는 톰슨 원장님께서 맡아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술에 대해서는 톰슨 병원의 기밀 자료로 보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나카의 말에 톰슨보다 먼저 앤더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삼촌! 그건...

다나카는 앤더슨을 쳐다보며 말했다.

- 끼어들지 말랬지! 이건 어른들의 얘기야!

다나카가 크게 소리를 치자 앤더슨은 단단히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앤더슨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톰슨이 말리려 했지만 다나카는 그냥 외면하며 말했다.

- 놔두십시오. 제 멋대로 커서 버릇이 없습니다.

톰슨은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얘기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나카는 다른 설명없이 말을 이었다.

- 제가 연구에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만....

다나카의 다음 말은 톰슨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이미 자신의 모든 계획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말에 톰슨은 어찌할 수 없었다.

- 음... 그 샘플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우리 연구의 결과를 보장하기 힘들기 때문에...

톰슨이 말을 얼버무리자 다나카는 단호하게 말을 했다.

-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우리 조직을 장악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더 큰 목표가 앞에 있는데 그걸 주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나카의 말에 톰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이 조직에 투신하게 된 이유가 그가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엔가 조직을 장악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리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처음 이 조직에 뛰어든 이유를 잊지 않고 있었다.

- 그렇군요. 제 연구가 어쩌면 목표에 근접하는 방법일 수도 있겠군요.

- 그렇습니다. 단순히 알력 다툼의 문제나 헤게모니의 싸움 따위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레고리 버밍험이 꿈꾸던 것을 우리 손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피터의 기억을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피터나 아니면 피터가 받은 그레고리의 기억의 일부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가 하는 일이 그 목표에 근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나카의 말에 톰슨은 결심을 굳혔는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다나카는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저에게 톰슨 원장님이 조력자이듯이 저도 톰슨 원장님의 조력자입니다. 우린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톰슨은 이 음흉한 인간의 속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서로의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샘플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연구를 진척시키겠습니다.

톰슨의 말에 다나카가 고개를 끄떡이다가 말을 꺼냈다.

- 이건 인사권과 관련된 내용이라서 제가 관여하기에 좀 그렇지만....

톰슨은 다나카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먼저 얘기를 했다.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앤드슨 연구원을 수석 연구원으로 지정하여...

하지만 톰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나카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앤드슨은 제 조카이긴 하지만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이 연구에서 빼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다른 연구소로 발령을 내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다나카의 뜻밖의 말에 톰슨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이 인간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톰슨의 입장에선 다나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제안이 고맙기까지 했다.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연구는 현재 수석 연구원과 핵심 연구원들만 참여시켜서 진행하도록 하죠.

그 말에 다나카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이 일은 어쩌면 인류가 진정한 진보로 나가는, 위대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성공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나카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바쁘신 분의 시간을 더 이상 빼앗으면 안 되지요. 그럼 저는 샘플을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나카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톰슨은 내선 전화를 들어 수석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행동을 멈추게. 우리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네.

톰슨은 전화를 끊고 의자에 등을 푹 묻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톰슨은 어차피 이 연구의 본질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나카가 지금 이렇게 머리를 숙이며 들어오는 이유도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우습군. 천하의 다나카 이치로가...

톰슨은 자신도 모르게 미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한편 밖으로 나온 다나카 이치로는 퉁명스럽게 구석에 서 있던 앤더슨과 만났다.

- 삼촌. 이건 정말...

다나카는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 그 입 다물어. 밖으로 따라 나와!

다나카의 말에 앤더슨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나카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지하 주차장에 있는 다나카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 넌 다른 연구소로 발령이 날 거야.

다나카의 말에 앤더슨은 등받이에 몸을 뉘인 채 말을 했다.

- 제 연기가 통했나 보군요. 훗. 단순한 인간이라니까요.

다나카는 의자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젖은 듯이 잠시 말을 멈췄다.

- 그 수석 연구원과 핵심 연구들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고 물러나야 된다.

다나카의 말에 앤더슨은 허리를 다시 세우며 말했다.

- 걱정마세요. 그 녀석들도 공부만 한 녀석들이라 그런지 쉽게 먹혀들더라구요. 아무튼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이 톰슨 병원을 저한테 넘겨주시는 거죠?

앤더슨의 말에 다나카는 고개를 끄떡였다.

- 굳이 폭탄을 안고 갈 필요는 없지. 너도 앞으로 행동 조심해라.

다나카의 말에 앤더슨은 거수경례를 하고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 그럼 전 잠시 스위스에서 보드나 타고 있을 게요. 연락 주세요.

앤더슨이 차에서 내리자 다나카는 표정을 굳히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 재단 사무실로 가세나.

차가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떠났다.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차창 밖으로 쳐다보는 다카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오늘은 할 일이 많을 거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혼자 중얼거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준비해라. 샘플을 수거해야 하니까.

아침에 눈을 뜬 석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여행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철구과 헤어지고 나오는 길에 석호는 자신의 차에 세현을 태웠다. 그리고는 명동 성당 쪽으로 향해 가며 말을 했다.

- 아까 말씀하신 잘생긴 그 외국인 신부는 벨기에 사람입니다.

어색하게 차 안의 침묵이 흐르다 갑작스러운 석호의 말에 세현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철구의 심문과 신부의 등장, 그리고 정태에 대한 의심 등으로 인해 세현은 머리가 복잡했기에 그냥 창밖만 쳐다보며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왜 이 차 안에 앉아 있는지를 생각하며 오늘 하루 동안 이해가 되지 않는 자신의 행동에 피식 웃었다. 그 때 석호가 뜬금없이 외국인 신부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 네? 그 외국인 신부님이요?

- 네. 그 친구는 마르티노 신부라고 하죠. 마르티노는 원래 이탈리아 이름인데, 그 녀석 본명도 마르티노죠. 저랑 아주 비슷한 처지죠. 하하하.

석호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주절거리며 떠들었다. 세현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제가 알고 있는 신부님들은 다들 나이 드신 분들이셨는데, 최근에는 젊은 신부님들이 많아지셨나 봐요.

세현의 말에 석호는 농담처럼 말을 했다.

- 세계적인 불경기니까요. 청년 실업이 많아서 그런가 보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자 석호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 웃으세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야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석호를 쳐다보았다.

- 그 외국인 신부님하고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러자 석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그 녀석이 먼저 선수를 쳤군요. 하긴 같은 선생님께 배웠으니까 비슷하겠죠.

석호의 말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다.

- 같은 선생님께 여자를 꼬시는 법을 배우셨군요.

그러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여자를 꼬시는 법을 성당에서 가르쳐주진 않습니다. 그저 같은 본능을 가진 것일지도 모르죠. 예쁜 여자를 보면 그 친구나 저나 같으니까요. 하하하.

석호의 말에 세현이 피식 웃었다.

- 정말 신부님이 안 되셨으면 큰일날 뻔 했네요.

세현은 어느샌가 그에 대한 경계를 풀며 농담을 했다. 석호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 저야 뭐 절제력이 강하니까 괜찮지만, 아마 그 친구는 엄마가 다른 아이들이 세계 곳곳에 있었겠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아닌 것 같은데요. 신부님도... 아.. 내 정신 좀 봐. 신부님께 못하는 말이 없네.

세현은 사제와 이런 식의 농담을 하는 자신이 경박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석호는 웃으면서 말했다.

- 사제도 사람이죠. 특히나 저나 마르티노와 같은 젊은 사제들은 나이 드신 사제님들 눈을 피해서 클럽도 다니고, 술도 마시죠. 그리고 가끔, 아니 어쩌면 자주 음담패설도 한답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놀란 표정으로 말을 했다.

- 에이. 설마...

그러자 석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세상을 알아야 세상 사람들의 얘기에 공감해 줄 수 있죠. 저희 선생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죠. 마음만 바르다면 지옥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저는 클럽에서도, 술집에서도, 음담패설 안에서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은 사제인 거죠.

- 말도 안 돼요.

- 말은 되죠. 조금 어폐가 있긴 하지만.

- 하하하.

차는 어느새 명동 성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세현은 석호에게 명동 성당 앞에서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석호는 그녀에게 농담처럼 얘기했다.

- 저는 신부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려도 다른 뜻은 없을 겁니다.

석호의 말에 세현은 웃으며 말했다.

- 그렇겠네요. 그런데 여기에서 집에 가까워서 괜찮아요.

- 그런가요?

석호는 그녀가 내리려는 순간 그녀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요.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차문을 열려다가 멈췄다.

- 뭐죠?

석호는 세현를 쳐다보며 말했다. 석호의 말은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 차가워졌다.

-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조금 놀랐습니다.

- 네? 왜죠? 제가 무슨 실수라도?

세현은 갑자기 변한 석호의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 세현 씨는 오늘 환자였던 남자에게 납치를 당했고 취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 뒷조사를 묵인해 주었죠. 그리고 과거에 대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죠. 그런데 아까부터 저와 얘기를 할 때는 마치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은 태도였습니다.

- 그거야...

세현은 석호의 말에 당혹감을 느꼈다.

- 신부님께서 저를 편하게 해주시기도 했고, 농담도 하시고...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 보통 여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일을 당하면 옆사람이 아무리 농담을 해도 그렇게 쉽게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 네? 그렇긴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죠. 저도 의사이기 때문에...

- 의사이신 건 알고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시라면 이런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지 본인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세현은 석호의 말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오늘 일어난 당혹스러운 상황들에 대해 너무나도 의연하게 대처했던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세현은 석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죠?

세현 역시 석호에게 차가운 말투로 얘기를 했다.

- 기분 나쁘셨다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상황 자체의 이상함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현 씨는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 하시겠지만 몸이 어떤 위험 상황에 저절로 대처하게끔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이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지만 저같은 사람들은 알고 있죠. 저 역시 그런 식으로 몸이 만들어졌으니까요.

- 네? 그게 무슨...

석호는 다시 차근차근 말을 했다.

-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스파이들은 고문이나 최면에 의해 정보를 말하지 못하도록 일정하게 세뇌를 받았지요. 몸에 일정한 자극이 가해지면 저절로 구구단을 외운다든가 주기율표를 외운다든가 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위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죠.

세현은 당황하며 말했다.

- 저는 스파이가 아니에요. 제가 누구를 위해 무슨 정보를 모은다는 거죠?

석호는 피식 웃었다.

- 세현 씨는 현재는 스파이나 그런 게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기억을 잃으셨으니까. 하지만 기억은 그러한 걸 모두 잃었지만 몸은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것이었죠. 물론 기억을 잃기 전에 스파이였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세현 씨는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 전 그런 걸 배운 적 없어요.

하지만 석호는 단호했다.

- 아니요. 제 경험 상, 그리고 제가 아는 범주에서 따져 봐도 세현 씨는 그런 걸 배우셨습니다.

- 아.. 아니에요. 신부님 말씀으로는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스파이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이잖아요.

- 더 놀라운 사실 하나는...

석호의 다음 말에 세현은 석호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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