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6. 어둠의 그림자(1)
6. 어둠의 그림자
톰슨 병원은 희귀병 및 난치병 치료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미국 내의 우수한 의료진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의사들이 다수 근무하고 있었다. 고급 병원이다 보니 치료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입원 환자의 만족도나 질병에 대한 개선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특히 톰슨 병원장은 휴먼바이오 사와 제휴를 통해 줄기세포 치료를 비롯하여 유전자 치료 혹은 생체 이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더욱이 항상 새로운 기기의 개발과 도입에 아끼지 않는 투자를 하여 최첨단 시설을 유지하였다. 또한 이윤 추구 사업뿐만 아니라 동북아평화재단과의 자매결연을 통해 빈곤 가정이나 고아들에게 선천성 희귀병. 수술을 무료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희귀 질환 센터와 난치병 재활 센터를 운영하며 여러 희귀, 난치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 상담, 투약 등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톰슨 병원은 대외적으로는 대단히 훌륭한 병원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들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새 생명을 찾기도 했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톰슨 원장은 그러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이미지야 말로 요즘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가면이었기 때문이다.
- 다수의 안녕을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어.
톰슨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그리고는 이 시간이면 늘 그러하듯 지하 연구 시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연구원들과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톰슨이 문을 나설 때 그의 비서가 급하게 문 밖으로 따라 나왔다.
- 한 시간 후에 다나카 이치로님께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비서의 말을 듣자 톰슨은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는 그에게 괜히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했다고 후회를 했다. 그 때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얘기를 했지만, 자신의 패를 몽땅 보여준 것 같아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 한 시간 후? 알겠네. 그 전에 오지.
톰슨은 그렇게 말을 전하고는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연구원들과 의사들은 그에게 목례를 했고, 톰슨은 웃는 얼굴로 화답을 했다.
- 우리 원장님은 정말 외국인이지만 부처님 같아.
말단 간호사 한 명이 인사를 하고 지나치며 옆의 간호사에게 말을 했다.
- 그러게. 저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데도 지금까지 하루도 쉰 적이 없다면서?
톰슨은 그 둘의 얘기가 희미하게 들리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세간 사람들의 자신의 대한 평가가 후할수록 자신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톰슨은 아래 긴급 버튼 콘솔을 열고 지하 3층을 눌렀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았고, 톰슨은 3층 입구 앞에서 망막 인식기와 지문 인식기를 지나쳤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톰슨은 누구에게 묻는지 알 수도 없는 질문을 큰소리로 외쳤다.
- 아직 변화가 없나?
톰슨의 목소리를 듣자 한 쪽 구석에서 바이탈을 체크하고 있던 수석 연구원 하나가 냉큼 달려왔다.
- 조금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 음... 그럼 체크하는 연구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회의실로 모이도록 하게.
톰슨이 말을 하자 수석 연구원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구석에 있는 방송 시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시스템 관리자와 샘플 체크하는 연구원을 제외하고 모두 회의실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톰슨은 방송을 들으면서 회의실에 먼저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자 연구소의 핵심 연구원들이 하나 둘씩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톰슨은 수석 연구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 암 세포 연구는 어떻게 되었나?
수석 연구원은 차트를 펼치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 RNA 분석은 어느 정도 마쳤습니다. 그리고 암 세포에 있는 텔로미어와 텔로머레이스 효소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 분석을 끝냈습니다.
- 그래... 아직 적용하기는 어려운 단계인가?
톰슨의 말에 수석 연구원은 프로젝트 화면을 켰다.
- 3 집단 샘플 1번부터 10번까지 추출한 결과물을 각각 적용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8번 샘플을 제외하고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8번 샘플만 세포 분열 과정이 느려졌는데...
톰슨은 그 말에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 암 세포가 발현이 되었습니다.
- 그렇군. 딜레마로군. 암 세포에서 추출한 게 적용이 되지 않으면 빨리 노화되고, 적용이 되면 암에 걸리고... 어려운 문제로군.
톰슨이 생각에 잠기자 구석에 있던 연구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톰슨은 그가 얼마 전에 연구소에 들어온 신입 연구원이라는 걸 알았다.
- 아! 앤더슨 연구원. 무슨 일인가?
앤더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했다.
- 굳이 암 세포에서 찾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앤더슨의 말에 다들 무슨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소리인가?
- 어차피 분열하는 개체를 찾는다면 오히려 생식 세포에서 찾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생식 세포들도 계속된 분열을 하니까요.
앤더슨의 말에 몇몇 연구원들이 비웃듯이 말했다.
- 생식 세포 연구는 이미 진행했지만, 별 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어. 그런 기본적인 내용도 우리가 확인하지 않고 연구를 진행하는 줄 알아?
하지만 앤더슨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 어쩌면 연구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나요?
앤더슨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는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서버에 접속을 하여 자료를 다운받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 생식 세포 중 텔로머레이즈의 활성화를 연구한 내용입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이 과정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을 한 내용입니다.
톰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이.. 이건 피...
하지만 그 이후의 말을 하진 않았다. 앤더슨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톰슨에게 말했다.
- 물론 이것 역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톰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의를 종료했다. 그리고 앤더슨을 따로 불렀다.
- 자네 정체를 밝히지.
앤더슨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다나카 다나카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기억 이식술을 시행했죠.
톰슨은 그 말에 크게 놀랐다. 다나카는 이미 톰슨의 연구 과정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톰슨은 자신만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던 내용이 이미 다나카의 레이더망에 잡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성렬의 연구나 자신의 연구 모두 다나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 그렇군. 자네는 그 부분을 좀 더 진행해 주게나.
톰슨은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다나카 이치로가 얼마 후면 병원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몸서리를 쳤다.
'무서운 인간이다.'
톰슨은 기억 이식기를 자신을 포함한 몇 명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나카라면 충분히 그의 힘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이 연구소도 그의 손아귀로 떨어진 건가?
톰슨은 회의실 밖으로 나와 연구소를 한 번 휙 돌아보았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만든 연구 시설을 한순간에 그가 가져간다는 것이 허망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왠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때 수석 연구원이 톰슨에게 다가왔다.
- 원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석 연구원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린 톰슨이 그를 쳐다보았다.
- 그.. 그래 무슨 일인가?
톰슨이 그를 쳐다보자 수석 연구원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톰슨은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채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톰슨과 수석 연구원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먼발치서 앤더슨이 지켜보고 있었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수석 연구원이 말을 꺼냈다.
- 저.. 이런 말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앤더슨 연구원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앤더슨이라는 말을 듣자 톰슨은 눈을 반짝였다. 연구원에 대한 내용이라면 수석 연구원이 모두 책임지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그래, 무슨 일인가?
- 추천으로 뽑으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왠지 저희랑은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톰슨은 앤더슨이 시카고 대학의 드레이크 교수의 추천을 받아 연구원으로 들어온 것을 기억했다. 톰슨은 자신과 30년 지기인 드레이크 교수가 다나카의 수하일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기에 선뜻 그의 입사를 허락했던 것이었다.
- 어울리지 못하다니?
- 그게 연구의 룰이라든가 아니면 패턴 따위는 무시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연구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습니다. 일부는 그가 원장님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수석 연구원의 말에 톰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음... 그런 일은 없네. 연구원들 입단속 잘 시키게.
그리고 밖으로 나가던 톰슨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 혹시...
그리고는 수석 원구원을 돌아보며 말을 했다. 수석 연구원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가 톰슨이 돌아보자 표정을 풀었다.
- 잠시만 이리로 와 보게.
수석 연구원은 톰슨이 부르자 재빨리 톰슨이 있는 자리로 옮겨갔다. 톰슨은 꺼지지 않은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보며 말했다.
- 자네는 여기에 있는 샘플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뜬금없는 톰슨의 질문에 수석 연구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톰슨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맞아. 자네는 모를 수 있어. 맞아. 논리적으로 보면 여기엔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생명은 논리가 아니니까 말이지.
톰슨의 알 수 없는 말에 수석 연구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 샘플만 있으면 돼. 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어.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톰슨은 마치 커다란 비밀을 안 것처럼 말했다.
- 자네나 나는 지금까지 텔로미어 분열을 늦출 생각만 했지. 만약 텔로미어 분열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텔로머레이즈를 생성해 내면 문제가 없는 것이지.
그 말에 수석 연구원은 고개를 끄떡였다.
- 그래서 암세포를 연구...
그 순간 수석 연구원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 아까 앤드슨이 말한 생식 세포 연구가...
- 맞아. 우리는 텔로머레이즈 그 자체를 찾아보면 되지. 계속 적용하는 것만 알아봤으니 문제가 되는 거였어.
- 그렇군요. 텔로머레이즈 자체가 사라지지 않게만 한다면 텔로미어가 빨리 소실되어도 금방 복원이 될 테니까요.
그러자 톰슨은 고개를 끄떡였다.
- 아니. 암 세포나 생식 세포보다 체세포를 연구하는 게 빠르지.
- 체세포요? 그런 체세포는...
- 그 때 봤던 이성렬 연구원의 논문. 그건 체세포였다네.
그러더니 잠시 침묵을 하다가 수석 연구원에게 말을 했다.
- 이따 직원들 톼근할 때쯤 이성렬 연구원만 남겨 주게나. 중요한 일이니까.
톰슨의 말에 수석 연구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 사람도 부릅니까?
그 말에 톰슨은 무겁게 고개를 끄떡였다.
- 하지만 먼저 나서지 말게나. 내가 부르면 그 때.
톰슨은 수석 연구원과 헤어지고 사무실로 올라오는 길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나카가 내부를 장악해 들어오면 자신은 역으로 외부로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다나카의 끄나풀인 앤더슨보다 더 빨리 연구를 마무리 지으면 되는 것이다. 연구를 마무리 짓는 대로 최종 결과만 남기고 모두 폐기하면 된다. 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조직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복도를 걸어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비서가 톰슨에게 말을 했다.
- 다나카 이치로님 오셨습니다.
- 그래? 음...
톰슨은 자신의 방문 손잡이를 열며 생각했다. 모르는 척 하자고. 어차피 앤더슨이 보고를 할 테지만 그때까지 모른 척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생각은 깨져버렸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의가...
톰슨은 너스레를 떨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때 다나카 옆에 앉아 있는 앤더슨 연구원이 보였다.
- 아! 톰슨 원장님.
톰슨은 앤더슨을 보자 무언가 꼬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 앤더슨 연구원. 자네는 왜 여기에 있나?
톰슨의 말에 다나카가 대답을 했다.
- 아! 제가 불렀습니다. 제 조카가 여기서 일을 한다기에...
톰슨은 그 순간 앤더슨과 다나카의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인종은 다르지만 묘하게 일치하는 얼굴이었다. 앤더슨을 보면서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톰슨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 아, 그렇군요. 진작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좀 더 잘 지켜보는 건데 말입니다. 하하하.
톰슨이 헛웃음을 웃자 다나카 역시 웃으며 말했다.
- 하하하. 이제라도 아셨으니 잘 해주시면 되지요. 제 조카가 부족해서 연구에 누를 끼치지나 않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톰슨은 속으론 좌불안석이었지만 여전히 여유 있는 태도로 말했다.
- 그럼요. 수석 연구원의 칭찬이 대단합니다.
- 그런가요? 잘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변죽을 울리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지 앤더슨이 입을 열었다.
- 삼촌. 어차피 해야 할 일은 하시죠. 이렇게 딴소리나 하지 말고.
앤더슨의 말에 다나카는 표정이 굳어졌다.
- 네가 어떻게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배운 건 이 방식이다. 어른들 얘기하는 데 버릇없이 끼어들지 마라.
다나카의 말에 앤드슨은 어깨를 으쓱 하고는 입을 닫았다. 다나카는 톰슨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연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조카를 보낸 것입니다.
다나카의 의뭉스러운 말에 톰슨은 빈정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렇군요. 연구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앤더슨 연구원이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톰슨의 말에 다나카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렇군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다나카의 말에 톰슨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교묘한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톰슨은 그가 어떤 제안을 해 오던 수락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계획하고 있는 다른 일을 은밀하게 수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