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81화 (8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5. 비밀(3)

- 그런데 어떻게 그 때와 관련된 열흘의 기억만 사라졌을까요?

- 글쎄요. 그 병원에서는 제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변화시키는 해마에 손상을 입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것도 그 놈들 말이니까 잘은 모르겠습니다.

- 어쩌면 그 놈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 네?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워요? 그게 말이 되나요?

철구는 석호의 뚱딴지같은 말에 놀란 표정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제가 알기론 그런 기술을 연구하고 있기는 하죠. 기억을 주입하거나 삭제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임상 실험 단계라서 동물 실험 중이라고...

그 말에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임상 실험 단계인데... 글쎄요. 저는 아직 기억을 지웠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가네요. 그렇다면 신부님도 지웠어야죠.

- 음..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 철구 씨의 기억을 지우는 게 그들에겐 급선무였을지도 모르죠.

- 음... 아무튼 그 여자가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랑 관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군요.

-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 그럼 한번 확인해 보면 되죠.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철구의 말에 석호는 놀란 눈으로 철구를 보았다. 철구는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한 시간정도면 됩니다. 기다리실 수 있으세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놀란 반응을 보였다.

- 무슨 일을 하시려고...

- 물어봐야죠. 진짜인지 아닌지.

- 이 밤에요?

철구는 석호를 보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

- 밤에 물어봐야 대답을 더 잘 하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철구는 석호에게 그렇게 얘기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를 했다.

- 어. 형. 심문 준비 좀 해줘.

그런 후 차에 시동을 걸고 세현의 집 쪽으로 향하며 세현과 통화를 했다. 세현이 집 앞에 나와 있는 것을 본 철구는 세현 앞에 차를 세웠다. 세현은 낡은 차가 자신의 앞에서 멈추고 창문이 열리는 걸 보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 타슈.

철구가 창밖으로 세현에게 말하자 세현은 놀란 눈으로 철구를 보며 물었다.

- 기억에 대한 중요한 일이 뭐죠?

- 일단 타고 가면서 얘기하죠.

세현은 왠지 꺼림칙했지만, 철구의 됨됨이를 믿고 차에 올라탔다. 철구는 세현이 차에 올라타자 거칠게 출발을 했다.

- 꽉 잡아요.

세현은 차 안에 몹시 지저분한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철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 어딜가는 거죠?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철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차가 지난 번 그 건물 앞에 서자 세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여기는 왜?

- 당신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서.

철구는 문을 거칠게 열고 세현을 끌어내렸다. 세현은 철구의 완력에 차에서 끌려내리다시피 내렸다.

- 이게 무슨 짓이에요?

- 글쎄. 당신이 한 짓보다는 착한 짓일지도.

철구는 인상을 쓰며 세현을 끌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세현은 완강하게 거부하려 했지만, 철구의 힘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내려왔다.

- 앉아.

철구는 지난 번 그 노래방 의자에 세현을 끌어앉혔다. 그리고는 세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당신 날 속였어. 안 그래?

철구의 말에 세현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철구를 쳐다보았다.

- 당신은 내 꿈속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야. 당신은 나랑 만난 적이 있어. 안 그래?

철구의 말에 세현은 크게 도리질을 했다.

-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 모르는 일이라. 정치인 같군. 훗.

철구는 옆에 놓여 있던 로프로 세현을 묶었다.

-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세현이 날카롭게 소리쳤지만, 철구는 힘을 주어 세현을 묶었다.

-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구.

철구는 세현의 머리와 목에 전기 자극판을 붙였다. 그리고 손끝에도 전기 자극판을 연결하였다.

- 거짓말 탐지기?

- 알고 있군. 당신이 말하는 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기 위한 방법이야.

- 이.. 이러지 않아도...

그러나 철구는 세현의 말을 무시한 채 세현의 얼굴을 부여잡고 자신을 쳐다보게 하였다.

- 뭐... 뭐야!

철구는 세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깊은 두 눈에 공포가 어려 있었다. 철구는 그 눈을 한참을 보다가 말을 했다.

- 당신이 맞아. 꿈이 아니었어. 당신도 나를 만난 게 꿈이 아니었어. 우린 분명히 만난 적이 있어.

세현은 여전히 도리질을 하며 우물거렸다.

- 나.. 난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

그러나 철구는 인상을 버럭 쓰면서 세현에게 윽박질렀다.

- 내가 당신을 기억 못할 줄 알았나보지? 잘도 속였어. 그리고 그 보라색 나비 핀. 그건 내가 꿈에서 본 게 아니었어. 내가 가장 긴박한 순간에 본 거였어. 왜 당신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 무슨 말이야. 긴박한 순간이라니.. 난 그런 경험 없어.

그러자 철구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미. 래. 생. 명. 공. 학. 연. 구. 소. 이래도 모르겠어!

철구는 세현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옆에 있던 의자를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세현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가 말했다.

- 자.. 잘 모르는 곳이에요. 아니 정태.. 애인이 근무하는 병원 부속 연구소 이름이에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철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계속해서 발뺌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짜 분노를 느꼈다.

- 거짓말! 계속 모른다고만 하면 나도 더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어.

-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거에요.

세현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철구가 입에 침을 튀기며 외쳤다.

- 난 그 곳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나왔어! DNA 검산가 뭔가 한다고 갔다가 아내가 납치당했지. 그리고 그 건물 지하실에서 하얀 머리의 남자랑 노인네들, 그리고 당신! 당신은 내가 그 곳을 빠져나올 때 인질이었잖아! 그 때 내가 인질로 잡았던 사람이 최세현, 당신이라는 걸. 이래도 계속 모른다고 잡아뗄 거야?

- 아뇨. 뭔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 뭐.. 뭐라고요? 그... 그게 사실이에요? 나를... 하늘색 실린더... 미래생명공학 연구소..

세현은 까무룩 의식을 잃어갔다. 철구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쳤다.

- 이봐. 정신줄 놓는 척 하지마!

그러나 세현은 마치 온몸이 아픈 사람처럼 몸을 뒤틀었다.

- 아... 악...

철구는 세현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의자에서 줄을 풀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옆에 있는 소파에 눕혔다. 10분쯤 흐르자 세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철구는 그런 그녀에게 시원한 물을 한 잔 건넸다. 세현은 그 물을 받아 마시면서 말했다.

- 이건 수면제인가요?

세현의 의심에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 그냥 물이야!

철구는 소파에 기대서 세현을 쳐다보았다. 세현이 기절한 사이에 거짓말 탐지기를 보던 한수에게 결과를 물었다.

- 목소리 톤, 호흡 모두 진실이야. 그리고 뇌파도 전혀 변화가 없어.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 거참, 신기한 노릇이군.

철구는 석호를 쳐다보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호 역시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현이 눈을 뜨자 철구는 세현에게 사과를 했다.

- 미안하게 됐수다.

철구의 말에 세현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철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러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 서럽기도 했고,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 이제 됐나요? 가 봐도 되는 건가요?

- 아니.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그럼 지금까지는 진심이 아니었나요?

- 물론 진심이었지. 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진심이니까 잘 생각해 봐.

철구의 무심한 말투에 세현은 방금 전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철구는 의자를 끌어다가 세현 앞에 앉으며 말했다.

- 난 당신의 꿈 마지막 퍼즐을 알아냈어. 이제부터 당신한테 그 퍼즐 조각을 말해 줄 거야. 그럼 당신이 떠오르는 걸 말해줘.

철구의 말에 세현은 다소 냉정하게 말을 했다.

- 내가 왜 그래야 하죠?

- 음... 물론 당신이 말할 의무는 없어. 하지만 내가 알아야 할 권리는 있어. 하지만 지금처럼 강제로 묻지는 않을 거야. 방금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철구의 말에 세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구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 당신이 기억을 하든 못 하든 그건 상관이 없어. 만약 내가 기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었으면 당신의 행동이 어떠하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얘기하게 만들었을 거야. 하지만 나도 기억을 잃은 처지이기 때문에 당신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혹시 당신 기억을 제거하는 시술... 아! 기억을 제거했으니 아무 것도 안 떠오르겠지. 이렇게 묻는 내가 바보같군.

철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때 세현이 입을 열었다.

- 저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거에요.

- 기억을 잃어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세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저는 기억 상실증처럼 순식간에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뇌의 문제로 기억을 차츰 잃어가는 거에요. 가끔은 그게 올바른 기억인지 아니면 꿈인지 모호하다가 결국은 잊어버리죠.

철구는 세현의 말을 듣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 그럼 당신은 기억을 지운 게 아냐?

- 기억을 지우다뇨?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죠?

세현의 말에 밖에서 이야기를 듣던 석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 그들이죠. 어쩌면 당신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난데없는 석호의 등장에 세현은 놀라서 석호를 쳐다보았다. 말끔하게 잘 생긴 얼굴의 사내를 보자 세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 저 사람은 누구죠? 그리고 저 사람은...

철구는 세현의 말을 끊고 말했다.

- 말하자면 길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저 사람이 우리 두 사람의 잃은 기억의 조각을 찾아줄 사람이란 거.

철구의 말에 세현이 입을 다물었다.

-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죄송하지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기억을 서서히 잃다니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 저는 원인 불명의 병 때문에 뇌세포가 증식하고 있어요. 그런데 전체적으로 증식하는 게 아니고 부분, 부분 증식하고 있어서 기억이 흩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부분은 기억이 나고, 어떤 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철구는 세현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살다보니 별 희한한 병이 다 있군. 기억이 흩어진다라...

그 때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석호가 말을 꺼냈다.

- 잊는 기억과 잊지 않는 기억이 나뉘어 있다는 건가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차분하게 말을 했다.

- 그런 것 같아요. 전문 지식이나 근래에 일어난 일 같은 경우에는 잊지 않는데, 과거와 관련된 기억들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세현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의사이시니까 아시겠지만,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이 달라서 장기 기억을 잊었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전문 지식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장기 기억 역시 문제가 없다는 건데,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석호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저도 그 부분이 이상해서 제 주치의와 같이 연구를 하고 있어요. 전 세계적으로 저와 같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원인을 규명하기 힘들지만요.

그 말에 석호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 어쩌면...

석호의 말에 철구와 세현이 석호를 쳐다보았다.

- 혹시 언제부터 기억을 잃으셨는지 기억나세요?

석호는 자신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석호가 웃자 세현 역시 석호의 표정을 보고 같이 웃었다.

- 기억을 잃었는지 기억이 날 리가 없죠.

세현의 말에 석호는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 질문이 잘못됐군요. 그럼 언제까지 기억이 나시는지 물어야겠군요.

-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2년 전 기억까지는 거의 확실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 이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 2년 전이라...

-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요?

- '전혀'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아니에요. 가끔, 전혀 엉뚱한 것들이 기억에 떠오르죠. 어떨 때는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도 떠오를 때가 있어요.

세현의 의외의 말에 석호와 철구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 그게 저도 잘 모르겠지만, 가령 아인슈타인과 만나서 얘기를 나눈 것이라든가 그런 내용들이 떠올라요.

석호는 그 말에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 아인슈타인이요? 혹시 제가 알고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 네. 그 사람이요.

- 그건 좀 이상한데요. 아인슈타인은 1955년에 죽었거든요. 물론 뇌는 보존하고 있지만, 세현 씨 나이를 아무리 많이 보아도 30대 초반인데, 태어나기도 전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 말에 철구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석호의 옷자락을 잠깐 끌었다. 석호가 철구를 보자 철구는 고갯짓으로 석호를 잠깐 불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