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5. 비밀(2)
차를 빠르게 명동 성당으로 향해갔다. 석호는 오랜만에 보는 한국 풍경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명동 성당에 도착한 석호와 마르티노는 주임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마르티노의 집무실로 이동을 했다.
- 추기경님께서 긴급한 일로 바티칸에 가신다고 하시던데 그 일 때문이었군.
마르티노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렇게 말을 꺼냈다. 석호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 이상하다는 게 뭐지?
- 아! 그거.
마르티노는 책꽂이 사이에 끼어있는 서류를 하나 꺼냈다. 석호는 그것을 받아들고 펼쳐보았다.
-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는데, 납치당한 아이들의 가계도를 조사해봤더니 흥미로운 것이 있어서.
석호는 가계도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할아버지가 모두 일제시대 때 일본군으로 있었다고?
- 그냥 일본군이 아니라 장교급이었지.
- 그런데...
석호는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 일제시대 때에 일본인은 모두 일본군이었잖아. 그런데 조선에도 일본에 충성을 한 일본군이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왜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만 피해를 입었지?
그러자 마르티노는 다음 장을 펼쳐보여 주었다.
- 나도 그 부분이 이상해서 더 조사해 봤더니 이 두 사람 모두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복무 기록이 없어. 물론 제대했다는 기록도 없지.
- 복무 기록이 소실되었다는 건가?
- 글쎄. 복무 기록이 소실되었다면 전체가 사라져야지 왜 일부만 없어졌을까?
- 음.. 그렇겠네. 그리고 또 특이점은 없어?
- 또 특이한 점이 있지. 이 두 사람 모두 일본에 있던 동경제대를 다녔어. 그런데 학부는 한 사람은 의학부이고, 한 사람은 생물학부였어.
- 의학부와 생물학부?
- 그런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서 한 사람은 군의관으로 복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반 장교로 근무했지.
- 뭐 그 당시에는 엘리트였겠네. 그럼 엘리트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건가?
- 엘리트 병사라기보다 동경제대 출신이어서가 아닐까?
- 음.. 학과의 일치점도 없으니까. 결국은 동경제대 출신이고 장교이면서 복무기록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둘은 아닐 거 아냐.
-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일본이나 중국에서 정보를 얻어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렇겠군. 아무튼 조사하느라 고생 많았어.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말도 마.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자료 조사할 때 얼마나 눈치가 보이던지..
- 하긴 한국에 외국인이 많지 않아서 더 그럴 거야. 물론 그냥 외국인이었다면 덜 했겠지만, 자네처럼 생겼으면... 하하하.
석호의 웃음에 마르티노는 인상을 구겼다. 평소 석호와 다른 사제들이 자신을 두고 여자 아이라고 놀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아직 수녀님이라고 놀리지는 않겠지?
마르티노의 말에 석호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 어렸을 때 일이잖아. 너도 그 때 우리 때문에 상처받았겠지만, 그 때 최베드로 신부님께 혼난 걸 생각하면... 으..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마르티노는 석호의 말에 피식 웃었다. 하루 동안 성경 전체를 옮겨 쓰기부터 정신 교육을 위해 면벽 고행 두 시간, 지겨우리만큼 반복되는 인종 차별과 성별 차별 금지 규정 교육 등 3개월간 석호를 비롯해 예비 사제들이 받은 교육은 두 번 다시 겪기 싫은 것이었다. 물론 크로아티아 병원에 침투할 때는 최베드로와 같이 마르티노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지,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놀리거나 부른 적이 없었다.
- 아무튼 자네는 신부를 하기에는... 뭐랄까... 안 어울려.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가 콧방귀를 뀌었다.
- 누가 할 소리를... 하여간 선수치는 건 여전해.
- 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네가 잘났네, 내가 못났네 하며 서로에게 칭찬 아닌 칭찬을 하다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 이런 얘기. 이젠 민망하군.
- 그러게. 어렸을 때는 그냥 그랬는데...
마르티노의 반응에 석호 역시 입맛을 다셨다.
- 아! 오느라고 피곤했을 텐데 좀 쉬어.
마르티노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석호를 배려하느라 그렇게 얘기했지만, 오히려 석호는 생생한 표정으로 말했다.
- 오랜만에 비행기에서 늘어지게 잤거든. 자네야 말로 오늘 하루 무척 피곤해 보이는데 얼른 가서 쉬어. 나는 할 일이 좀 남아서.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는 혀를 내둘렀다.
- 어떻게 점점 선생님하고 똑같아지는지 모르겠네. 체력이 대단한 건지, 정신력이 대단한 건지.
- 그럼 내일 보자구.
석호는 마르티노의 집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강철구'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자 석호가 말을 했다.
- 접니다. 장석호. 잘 지내셨어요?
그러자 건너편에서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장 신부님이시군요. 저는 또...
철구는 석호에게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해서 '장석호'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전라도에 있는 석호파의 석호를 떠올렸었다. 그 조직 보스가 철구에게 전화를 할 리도 만무했고, 설사 전화를 한다도 해도 이렇게 정중하게 걸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석호라는 이름의 신부를 떠올리자 목소리가 밝아진 것이었다.
- 잘 지내셨습니까?
철구는 석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순간 석호는 수화기 너머로 '여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한수의 안부도 물었다.
- 사장님도 안녕하시지요?
수화기 너머에서 투닥거리는 소리가 지나가자 철구는 석호에게 대답을 했다.
-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이번엔 어느 나라에 계신가요?
철구의 물음에 석호는 목소리를 낮췄다.
- 지금 한국입니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석호의 말에 철구는 깜짝 놀랐다. 석호가 홍길동마냥 이 나라에서 번쩍 저 나라에서 번쩍하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석호의 입국이 자신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한국을 떠날 때 철구의 손을 부여잡으며 했던 약속이 떠올랐기에 철구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들뜨게 되었다.
'그 놈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어느 정도 모이면 한국에 들어오겠습니다.'
- 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약속 장소를 잡고 곧 만났다. 철구는 멀리서 사복 차림의 석호를 금방 알아보았다.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외모는 전혀 바뀐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철구는 지난 3년 간 마음 고생도 마음 고생이었지만 불규칙하고 험난한 일을 하다 보니 예전보다 많이 늙어 보였다. 그러나 상대의 영혼이라고 털어버릴 것 같은 눈빛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더 잘 생겨지셨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멋쩍어 하며 농담을 던졌다.
- 저한테는 아무 의미 없죠. 하하하.
석호의 말에 철구 역시 피식 웃었다. 석호는 철구가 한국에서 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아팠다. 더욱이 자신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그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철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지 석호를 끌고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갔다.
- 제가 일하는 사무실인데, 여기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이 없어서요.
사무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낡은 소파에 앉았지만 말이 없었다. 서로 할 말이 너무 많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석호는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철구가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지 여기저기에 철구의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가스버너와 냄비, 그리고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사무실 안은 담배 냄새에 찌들어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그다지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 그동안 여기서 생활하신 건가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자원 봉사 온 신부님처럼 말하지 마쇼. 난 이곳에서 잘 사니까.
철구의 말에 석호는 여전한 철구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커피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보다시피 이래놔서.
철구의 말에 석호는 손사래를 쳤다.
- 아닙니다.
석호는 잠시 철구를 보고 무언가 감격스러운 듯이 말했다.
- 건강하셔서 다행입니다.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나야 바퀴벌레처럼 숨는 일은 잘 하니까 그 녀석들이 찾기 힘들 테죠. 그나저나 신부님도 참 힘들게 사네요. 지난번엔 모잠비크더니 벨기에랑 이번엔 한국인가요?
철구의 말에 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하느님의 뜻이니까요.
- 뭐 하느님의 뜻이라면야. 근데 하느님께서 좀 작게 뜻을 펼치셨으면 하고 기도나 좀 해 주쇼.
철구는 석호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 한국 일은 중요한 일인가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어쩌면 그들하고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그렇군요. 그런데...
철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석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 신부님께서는 그 날 일을 모두 기억하시죠?
철구의 말에 석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을 미뤘다.
- 같이 있는 동안이나 중요한 순간이라면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라면...
철구는 석호의 말을 끊고 말을 했다.
- 혹시 보라색 나비 핀은 기억나십니까?
- 보라색 나비 핀... 글쎄요. 그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미친 소리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하늘색 실린더, 그러니까 커다란 실린더인데 그 안에 물이 차 있고...
철구의 말에 석호는 철구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 혹시 그 부분 모두가 기억이 안 나시는 건가요?
석호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 사실 제가 어디서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은 제가 대포폰을 만들고 술을 한 잔 한 것까지 입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까 병실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더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 아! 그렇군요. 저는 일시적인 것인 줄 알고... 제가 진작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석호는 그 기간 동안의 기억을 잃은 철구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상상이 되었다. 그 기억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철구가 백방으로 뛰며 노력해왔던 것이라 생각하니 석호 역시 마음이 짠했다. 석호는 그 날 자신과 같이 겪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 ... 그 때 안에는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엑소더스를 이끌던 사람은 피터 스미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석호의 말을 놓칠세라 철구는 부지런히 그 내용을 수첩에 적어나갔다.
- 피터 스미스는 어떤 인물이죠?
철구의 물음에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영국 버밍험 그룹의 홈즈 스미스 회장의 아들이라는 것과 한국의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소장이라는 게 알려진 전부죠. 물론 외모적인 특이성 때문에 대중들이 기억하긴 쉬웠죠. 40대이지만 백발이었거든요.
- 네? 백발이요?
그 순간 철구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
- 네. 그렇습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는 낮은 신음성을 내었다.
- 그리고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죠?
- 그 안에서 철구 씨는 옆에 있던 대형 실린더를 깨려고 했었죠. 혜민 씨 이름을 부르면서...
- 실린더... 혹시 하늘색 실린더인가요?
- 네. 원래는 하늘색이 아닌데 거기에 자외선 등을 달아서 하늘색처럼 보였습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는 낮은 신음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석호의 말에 철구는 고개를 끄떡였다. 석호의 말이 끝나자 철구는 수첩의 내용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 음. 단편만 기억이 나는군요. 일부만... 아직 이 일을 제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요.
철구의 말에 석호 역시 고개를 끄떡이며 맞장구를 쳤다.
- 저도 제가 직접 겪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겁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그들의 행동들. 아니 그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자체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석호의 말에 철구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면서 철구는 왜 세현과 자신이 그러한 꿈을 공유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철구는 석호에게 자신이 받은 의뢰와 세혐에 대해 말을 했다. 석호는 그 말을 들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럼 그 최세현이란 여의사랑 제가 관련이 있다면 그 곳에서겠군요. 저야 철구 씨와 지하실 입구에서 만났으니까 그 전이나...
석호는 그러다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 혹시 인질로 잡은 여자일 수도 있겠죠.
- 그럼 두 가지로 압축되는군요. 하나는 신부님을 만나기 전에 그 여의사랑 만났거나 아니면 인질극을 벌일 때 제가 인질로 잡은 여자이거나.
- 그런데...
철구의 말을 들은 석호가 뭔가 의문이 드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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