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5. 비밀(1)
5. 비밀(?密)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석호는 지난밤에 읽었던 서류들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았다.
'리세르그산다이에틸아마이드(lysergic acid diethylamide)'
이름도 어려운 이것은 향정신성의약품이었다. 물체가 비뚤어져 보이고 사람의 얼굴은 만화화된 것처럼 과장되고, 채색감은 높아지고 음각(音覺)은 초자연적인 감흥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심경에 빠져들게 만드는 이은 흔히 'LSD'라고 불리는 마약이었다.
- 아이의 몸에서 이게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석호는 최베드로와 자신이 '트라우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마약 중독으로 인한 행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추측을 해보건대 다른 아이들도 모두 마약을 다량 투여하여 며칠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 어린 아이에게 마약이라니..
석호는 누가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이에게 그렇게 많은 양의 마약을 투여하였고, 또 집으로 보냈는지 의문스러웠다. 대개 유괴라면 금품을 요구하거나 어떤 요구 사항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또한 아동성애자의 짓이라면 당연히 강간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깨끗했다. 그리고 살인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시체는 아무도 모르게 유기하는 것이 당연한 처사였다. 석호가 생각하기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연결되는 것이 없어보였다. 단순히 생체 실험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아이를 돌려보내는 짓 따위는 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일이었다. 결국 석호가 결론을 내린 것은 '그러한 아이를 가족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 목적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왜 아무 죄도 없는 그 아이들과 부모들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석호는 머리가 아팠다. 어느 것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단지 이 일은 그들과 크게 관련이 없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추측일 뿐이라고 생각하고는 석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라면 어떤 일도 저지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석호는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 존재인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 일을 계기로 석호 역시 인간의 오만함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년 전 석호가 스위스 베른 대학교에서 만난 생물학자 메리 스컬리 박사는 대단히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석호는 자신이 신부가 아니었다면 그녀와 진지하게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외모가 뛰어난 것도 있었지만, 무엇에도 자신만만하던 석호에게 큰 깨달음을 준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나온 석호는 생물학자인 스컬리 박사와 천문학자인 호치슨 교수와 함께 식당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석호는 오늘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며 이야기를 주도했다.
- 신에게 권능을 받은 것은 인간뿐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이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석호의 당당한 말에 호치슨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 글쎄요. 신학적으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천문학자가 되어 우주를 본다면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드넓은 우주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본다면 인간은 정말 아주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죠. 현재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가 약 9000해km입니다. 고작 12700k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행성 안에 사는 생물체에게 '권능'이 모두 있다는 것은 과분한 일이지요.
하지만 석호는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 그것은 우주를 창조하신 신의 위대한 권능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는 만물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이지요. 결국 그것 역시도 인간이 발견하고 알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봅니다.
석호와 호치슨 교수의 대화를 흥미 있게 지켜보던 스컬리 박사가 입을 열었다.
- 신부님, 혹시 타디그레이드(Tardigrade)라고 아세요?
- 타디그레이드요? 그게 뭐죠?
- 물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아주 작은 생물체죠. 다 자란 성체의 크기가 1.5mm이고, 작은 것은 0.1 mm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생물이에요. 8개의 발이 있어 곰처럼 걷는 모습처럼 보여서 물곰이라고 지었구요.
- 작은 생물체요?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로 왔군요.
- 이 신기한 생물체는 현재까지 750종이 발견되었는데요. 타디그레이드는 히말라야 산맥 정상에서 깊은 심해까지, 극 지방에서 적도까지 지구 전체에 걸쳐 퍼져 있어서 우리가 살 수 없는 곳에도 살고 있지요.
- 흥미롭긴 한데, 그건 대화의 주제랑 조금 먼 얘기 같은데요?
- 그럴까요? 타디그레이드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자면 타디그레이드는 물 없이도 10년을 살 수 있죠. 진공상태에서도 살 수 있고, 놀라운 것은 섭씨 151도로 끓여도 살고 -272도에서도 견디죠. 그리고 평균 수명은 약 150년 정도 되죠.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휴면 상태를 취할 수 있어서 거의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보면 되죠. 그리고 방사선에도 매우 강하답니다. 인간은 5 그레이의 방사선에도 취약하지만, 타디그레이드는 5700 그레이의 X선도 견딜 수도 있답니다.
- 타디그레이드에 대한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석호는 스컬리 박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스컬리 박사는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아까 말씀하신 것 중에 우리를 만물의 모범이 될 수 있게 하느님께서 만드셨다고 하셨는데, 엄밀히 따지면 인간은 발달된 '이성'을 제외하고는 지구의 삶에 있어서 아주 취약한 개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그것을 '이성'으로 극복하고 있지만요.
-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타디그레이드가 오히려 인간보다 뛰어나다는 말씀이신지요?
- '뛰어나다, 아니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에 누가 잘 적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결국 그러한 과정이라면 인간도 결국은 적응을 한 개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생물학을 연구하면서 가끔 아주 놀랄 때가 있답니다.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결국 생물체는 모두 같은 수준의 권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지만 다른 것이 취약하고, 타디그레이드는 '이성'은 없지만 인간보다 더 강인한 적응력이 있으니까요.
- 음. 결국은 신은 모든 생명에게 동등한 권능을 부여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 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 말에 호치슨 교수가 말을 이었다.
-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답니다. 빅뱅이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 우리까지를. 어차피 우리 역시 빅뱅에서 나온 개체라고 본다면 결국 태초의 '빅뱅'을 통해 뻗어 나온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우리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 하늘의 별도 우리와 같이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지구 역시 '인류'를 비롯해 수많은 생명체가 태동했던 것처럼 우주 안에서 의식적으로 자라고, 만들어지고, 어쩌면 지금도 생각하고, 발전하고,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개체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지구 생명체설같은 황당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근원을 따진다면 우주는 모두 같은 곳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석호는 스컬리 박사와 호치슨 교수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스컬리 교수였다.
- 인간이 이렇게 생각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성'과 '정신'을 인도해 준 것이 종교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 과정을 앞서 진행하고, 학자들이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르죠.
석호는 스컬리 박사에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를 혼돈에서 끌어내 주셨네요.
스컬리 박사는 매력적인 웃음을 띠고 석호를 쳐다보았다. 석호는 그녀의 환한 미소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 오늘 좋은 얘기 감사합니다. 제가 생각이 많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남자들끼리 갇혀 있으니까 편협해 진 것 같네요.
석호의 농담에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석호의 마음은 표정과 달리 무거웠다. 어쩌면 신의 권능이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하거나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이 우주의 창조자이시자 계획자이신 그 분의 의도를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을 하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석호는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비행기 시트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지금 복잡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한국에 도착해 더 알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석호가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곧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석호는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든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공중에 떠 있는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숙면을 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불면증이 있는 석호는 오히려 이렇게 폐쇄되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비행기가 더 마음이 편했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 똑바로 앉았을 때 주변에서 석호를 보며 스튜어디스들이 하는 말이 들렸다.
- 자고 일어나도 잘생겼네.
- 아까 음료수 가져다 드리러 잠깐 갔을 때...
석호는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말하고 있는 그녀들의 말에 괜히 무안해졌다. 시선을 끌면 안 되는 일을 하면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외모 때문에 가끔은 가당찮은 투정을 부리곤 했다. 남들이 들으면 돌 던질 일이었지만, 사제인 석호에게는 오히려 불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석호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수속을 했다. 출국 게이트에 나왔을 때, 석호는 또 한 번 자신의 이마를 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마중 나온 마르티노 신부 때문이었다. 석호와 비견할 만한, 아니 어쩌면 석호보다 더 뛰어난 외모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마르티노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마르티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지 출국 게이트만 쳐다보다가 석호가 나오자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석호 역시 마르티노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고, 다가가서 마르티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사제의 전통에 따라 서로 볼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본 다른 이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 둘을 쳐다보았다. 기가 막히게 잘생긴 두 사람이 보자마자 서로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하는 모습을 보더니 다들 한 마디씩 수근거렸다.
- 게이인가봐. 둘 다 정말 잘생겼는데..
- 저 외국인 완전 내 스타일인데...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탄식과 말소리가 들렸을 때 석호는 괜히 또 무안해졌다. 하지만 해결책은 어기서 빨리 나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마르티노도 석호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피해 얼른 밖으로 나왔다.
- JFK 공항에서도 그러더니 또.. 이거야 원..
마르티노의 말에 석호는 빙긋이 웃었다.
- 그거야 네가 워낙 예쁘게...
석호가 말하려 하자 마르티노가 곱지 않은 눈초리로 석호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석호는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 아니. 뭐 그렇다는 말이지. 아무튼 반갑다. 잘 지냈어?
석호의 장난스러운 표정에 마르티노는 격하게 반응했다.
- 잘 지냈지. 한국 사람들, 아주 적극적이야. 나 팬클럽도 생겼거든. 그리고 성당에 신자가 두 배는 늘었다고 주임 신부님께 아주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
석호는 그 말에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한국 여자들'로 바꾸어주고 싶었다. 남자인 자신이 봐도 눈을 뗄 수 없는 외모에 유창한 한국말 실력, 그리고 매너 있는 행동까지 사실 신부가 아니라면 어떤 여자든지 그에게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건강한 거 보니 다행이다.
마르티노는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 선생님은 잘 계시지? 왜 같이 안 왔어? 오랜만에 뵙고 싶었는데.
석호는 달리는 차 안에서 최베드로가 같이 오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을 하자 마르티노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 무섭군. 그 녀석들 바티칸에까지 손을 뻗칠 줄은 몰랐는데...
마르티노의 말에 석호가 의미심장하게 대답을 했다.
- Greed has no limits.(탐욕은 끝이 없다.)
석호의 말에 마르티노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가 마르티노가 다시 말을 꺼냈다.
- 일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 조사해 봤는데... 뭐 크게 중요한 일은 없었어. 납치된 아이가 15세. 발생년도는 1982년하고 1994년. 둘 다 워낙 오래 전 기록이야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어. 그 사건을 조사하신 박범현 신부님도 돌아가셨고. 아이들도 모두 사망 상태고. 더 구할 수 있는 자료는 경찰에 있는데, 내가 그걸 파악하긴 좀 힘들더라구.
석호는 이해한다는 듯이 마르티노에게 말을 했다.
- 하긴 경찰 자료까지 구하기는 힘들지. 그 자료는 내가 어떻게 구해 볼게.
- 그런데 자료들을 보는데 이상한 게 하나 있더라구.
- 이상한 거?
- 응. 일단 성당으로 가서 얘기하자구. 정리된 게 거기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