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4. 의혹(4)
- 라울, 이젠 제법 고위직 냄새가 나는데?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웃으며 말했다.
- 자네야 말로 이제 정보국의 실질적 수장 아닌가? 언제까지 외부로 돌아다닐 겐가. 이제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바티칸으로 들어오지.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 내가 들어온다면 아마 바티칸에서 막을걸. 내가 밖으로만 도는데도 날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네.
그 말에 라울은 놀란 표정을 말했다.
- 아닐세. 만약 그런 놈들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깨부숴줄 테니까 걱정말게나.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 이 사람, 여전하군.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니까.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크게 웃었다.
- 예끼. 내가 또 속았어. 자네는 항상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해서 진담처럼 느끼게 하는 재주가 있어.
두 사람의 웃음이 잦아들자 라울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이번 콘클라베가 걱정이야.
라울의 뜬금없는 말에 최베드로는 라울의 눈을 쳐다보았다. 라울은 최베드로의 시선을 받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이 친구야. 그런 눈으로 보면 내가 감출 수가 없잖아. 자네는 정말 딱 정보부 신부야. 감찰부였으면 아마 여러 사제 곡소리 났을 거야.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피식 웃었다.
- 내가 감찰부였다면 아마 나같은 족속 먼저 잡아들였을걸. 신부의 품위를 해치고 다니니까.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정색을 했다.
- 자네같은 사람이 있어서 바티칸이 우뚝 설 수 있는 걸 누군들 모르나. 그런 소리 말게나.
그러더니 갑자기 라울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했다.
- 사실은 내 자네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네.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정치 얘기라면 난 끼어들기 싫네. 그러니까 정치 얘기 빼고 우리 얘기만 하자고.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 정치라... 뭐 이 얘기도 정치 얘기라면 정치 얘기일 수 있지만, 자네한테도 관련이 있을 수 있는 얘기니까 해야겠네.
라울은 최베드로의 선포에도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 이번 콘클라베는 자네도 알다시피 교황님께서 아직 선종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릴 것이네. 그래서 그런지 물밑 움직임이 장난 아니라네.
- 그런가?
최베드로는 라울의 말을 조금은 시큰둥하게 들었다.
- 자네는 명예나 지위 따위에 관심이 없겠지만, 이번 콘클라베의 향방에 따라 정보국의 운명이 바뀔 수 있어.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보국은 바티칸에서도 독립적인 기관이어서 어떤 누가 교황이 되건 그것과 관계없이 운영되었다. 그런데 라울의 말은 이번 콘클라베에서 어떤 사람이 교황이 되느냐에 따라 정보국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면 최베드로는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라울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정보국의 운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라울은 자신의 사무실에 두 사람 외에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사방을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더욱 낮춰서 은밀하게 말했다.
- 혹시 피오바넬리(Piovanelli) 추기경님을 아나?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물었다.
-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이야 명망있는 분이 아닌가? 예수회 출신에 금욕적인...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이 고개를 저었다.
- 자네 말이 맞아. 밖으로 알려진 건 그렇지. 하지만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은 예전부터 생명 공학에 관심이 많으셨지.
- 생명 공학? 그야 나도 그 쪽에 관심이 많지.
- 음... 하지만 그 분은 자네의 관심과는 다르지. 이걸 보게나.
최베드로는 라울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라울은 책장 사이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펼치더니 그의 앞에 펼쳐 놓았다.
- 이건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 아닌가?
최베드로의 질문에 라울은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책을 넘겨 중간을 펼쳤다. 그리고는 최베드로에게 책을 돌려 보여주었다. 최베드로는 뭔가 싶어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거기에 보이는 내용은 '태양계의 움직임'과는 전혀 관련없는 내용이었다. 최베드로는 종이의 질이나 서체가 같은 것을 보고 더 놀랐다.
- 내가 입수한 문서일세. 물론 이렇게 꾸민 건 자네도 알다시피...
최베드로는 그 문서에 집중했기 때문에 라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 안의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 이게 사실인가?
- 그 부분을 다 읽었으면 잠시 책을 주게나.
라울은 다시 책을 가져다가 꽤 많은 페이지를 넘기더니 다시 최베드로 앞에 펼쳤다. 최베드로는 그 부분을 받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 그 안에 적힌 '문서 번호'를 기록했다.
- 사실 자네가 이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내가 한 번 보자고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라네. 이 사실을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서.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고개를 끄떡였다.
- 이 문서들은 어디서 구했나?
최베드로는 그 문서들의 내용을 한 번 곱씹으면서 라울에게 물었다. 라울은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꺼냈다.
- 아우렐리오 추기경님일세.
라울의 입에서 아우렐리오 추기경 이름이 나오자 최베드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라울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 사실 이번 콘클라베는 이파전이야. 아우렐리오 추기경님과 피오바넬리 추기경님. 물론 자네는 정치를 싫어하지만 말야,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절대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이 교황이 되어서는 안 되네.
최베드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문서의 내용은 최베드로가 그동안 알아본 내용들과도 일치하는 내용이 많았다.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거짓인지 파악을 하자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콘클라베는 고작해야 한 두 달 사이에 열릴 것 같았다. 최베드로는 그 순간 난감했다.
- 자네는 아우렐리오 추기경님 쪽인가?
최베드로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라울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나야 추기경단도 아닌데 나한테 무슨 권한이 있다고 어느 쪽을 선택하겠나. 다만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나는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이 선출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일 뿐일세.
라울의 말은 진실해 보였다. 최베드로는 문서의 정보가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아우렐리오 추기경에게서 이 정보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럽긴 했다. 물론 바티칸 역사상 음모와 음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거짓이라면 아우렐리오 추기경은 사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문서가 사실이라면 이번 콘클라베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자신이 파악한 정보와 지금 라울이 준 정보를 종합해 본다면 어느 누가 교황으로 선출이 되건 그것은 바티칸에 커다란 암운을 드리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면 자네는 이 정보의 원출처는 알 수가 없겠군.
- 그렇긴 하지만... 나도 안에서 조금 조사를 해 보았네만, 두오모 성당에 있는 수녀들에게서 사실을 확인했지. 그 때 받은 충격을 생각하면...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서의 내용은 피오바넬리 추기경은 젊은 수녀와 내통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마피아를 통해 입양을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아동 성추행뿐만 아니라 마피아 연루까지 추한 모습이 열거되어 있었다. 더욱이 아프리카에 방문했을 때에는 부족장과 더불어 마약을 하고, 미성년 아동들과 섹스 파티를 벌였다는 추악한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출처와 증거 자료들은 라울이 펼친 페이지에 간략한 내용과 '문서 번호'로 남아 있었다.
-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사제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마피아와 연루되었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네. IOR(바티칸은행 (Istituto per le Opere di Religione)) 스캔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꺼냈다.
- 음... 아무튼 이번 일이 외부로 밝혀지는 날엔 바티칸이 시끄러울 거야.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라울에게 다시 물었다.
- 자네가 말한 정보국의 위기가 여기에서 온다는 말인가?
최베드로의 질문에 라울은 고개를 끄떡였다.
-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이 정보부를 없애겠다는 내용도 있지 않았나. 감찰부에서 맡아서 정보도 처리하게금...
최베드로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자신의 심복들이 있는 감찰부로 돌리겠다는 말은 이해가 가네만 굳이 왜 그런 무모한 일을 할까? 사실 정보부야 내부 사정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곳인데.
그러자 라울은 은밀하게 말을 했다.
- 사실 이 내용이 자네한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네. 피오바넬리 추기경님이 마피아뿐만 아니라 엑소더스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고 그러네.
라울의 말을 듣자 최베드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 그게 무슨...
- 마피아 조직 중에 칼라브리아주 일대를 주름잡고 있는 은드란게타(´Ndrangheta)가 있는데, 그들의 자금줄 중 대부분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Italia Trieste) 병원과 연결되어 있어.
최베드로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병원이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병원은 엑소더스의 이탈리아 거점과도 같은 병원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자선 병원의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생체 실험이나 다수의 비윤리적인 시술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럼 피오바넬리 추기경이 은드란게타와 관련이 있고, 그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건가?
- 맞아. 내가 아우렐리오 추기경님에게 받은 자료로 조사한 내용이라네.
- 그렇다면 정보부를 없애려고 한다는 말이 맞겠군.
최베드로가 자신의 말에 수긍을 하자 라울은 힘을 주어 말을 했다.
- 피오바넬리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막아주게나.
최베드로는 라울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진실함과 절실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최베드로가 보기에는 피오바넬리 추기경에 대한 내용이 모두 사실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의 출처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최베드로는 어떻게 자신이나 정보국에서 파악하지 못한 정보를 정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아우렐리오 추기경이나 라울과 같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이었다. 비록 그 안에는 자신이 파악한 피오바넬리 추기경의 비위 사실이 약간은 포함되어 있었지만, 전체 내용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라울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울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충실한 사제'였기에 그러한 부정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만약 라울 역시 아우렐리오 추기경과 같은 부류라면 연기력이 대단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베드로가 알고 있는 라울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라울이 변했다고 하더라도 최베드로는 라울이 보내는 눈빛, 그것만큼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라울의 눈빛은 정말 바티칸을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최베드로는 라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 그동안 힘들었겠구만. 나같은 부류도 아닌 사람이.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이번에 알았지. 자네가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지 말야. 난 그냥 조사만 하는 데도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 그럴 거야. 아무튼 자네 얘기는 잘 들었네. 나도 한 번 조사하고 진실을 파악해 보지.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바티칸의 운명과 관련된 일이라네. 자네 아니면 말할 사람도 없었고, 그리고 자네가 이 일에 적임자 아닌가!
최베드로는 라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라울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 정치에는 휩쓸리지 말게나. 진심이네.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조금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 알겠네. 자네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 이번 콘클라베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절대 개입하지 말게나. 이건 친구로서 하는 말이야.
최베드로의 말에 라울은 고개를 끄떡였다. 라울은 자신이 이미 아우렐리오 추기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최베드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열렬한 지지는 아니었지만, 그가 교황이 되기를 진심을 바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콘클라베가 가까울수록 물밑의 움직임이나 풍문들은 라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섭고 위력이 강했다. 자신도 그 격랑에 휩쓸릴 것 같았는데, 최베드로를 만나 자신의 짐을 벗어던지게 된 것이었다.
- 난 상부에 보고하고 피정(避靜)이나 가야겠네.
라울의 말에 최베드로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빙고! 아주 좋은 생각일세!
최베드로는 라울과 헤어지고 나오면서 라울의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기도를 올렸다.
'저 순진한 친구를 이 강한 바람에서 구원하소서.'
그리고는 최베드로는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 때 계단 뒤에 숨어 있던 젊은 사제 하나가 최베드로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