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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77화 (7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4. 의혹(3)

철구 일행이 도착하자 커다란 대문은 소리없이 열렸다. 무영이 먼저 내려 안으로 들어가는 갈을 안내했고 철구는 무영의 뒤를 따랐다. 미로같은 복잡한 통로를 지나자 지난번에 왔던 거실이 보였다.

- 복잡하구만.

철구는 누구에랄 것도 없이 툭 말을 던졌다. 그러나 무영은 철구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철구와 무영이 거실에 있지 조금 있다가 원 회장이 밖으로 나왔다. 철구는 뚱한 표정으로 원 회장을 쳐다보았다.

- 얘기는 들었습니다. 저의 처사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 회장은 신분과 다르게 소탈하게 말을 했다. 그러자 철구 역시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 저의 안위를 걱정해 주시는 거야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회장님이 저를 속였다는 게 문제입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무영 역시 얼굴이 굳어지며 철구를 노려보았다.

- 당신도 무섭게 째려보지만 말고 얘기를 해보라구.

철구는 무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무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원 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 우리가 초청한 손님이시다.

- 아닙니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입니다.

무영은 처음으로 회장에게 반박을 했다.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그럼 절충해서 고용한 손님 정도로 하죠.

철구의 말에 무영이 버럭 했다.

- 회장님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철구가 그 말에 귀를 파며 말했다.

- 배워먹은 게 없어서 그런 건데... 그리고 다섯 명이나 뒤에서 감시하는 게...

철구의 말에 무영이 놀라 반문했다.

- 다섯 명이라니?

- 아까 숨어있던 당신 똘마니들 있잖아.

무영은 순간 움찔했다. 분명 자신이 부른 인원은 세 명이었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한 명이 더 있다는 사실에 무영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자신이 철구와 세현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더라도 잠복한 또다른 인물을 놓쳤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무영은 그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 능력을 알고 있는 철구였기에 그의 말에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무영의 반응과 달리 원 회장은 시종일관 온화한 표정과 태도였다.

- 미안하게 됐습니다. 위험한 일이기에 제가 사람을 시켜 부탁을 한 것입니다.

- 친구의 딸을 조사하는 게 위험한 일이면 친구의 아들이었으면 난리났겠습니다.

철구가 비꼬는 말을 해도 여전히 원 회장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 부득이한 사정이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어떤 부득이한 사정인지 제가 알면 안 될까요? 어쩌면 제 목숨을 거는 일일 텐데.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낮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내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하지만 일단 선택을 해야 합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피식 웃었다.

- 무슨 선택입니까? 뭐 죽을래 살래 정도 됩니까?

그 말에 원 회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거의 그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내막을 모른 채 그냥 자료 조사만 해서 보고하는 일과 내막을 알고 목숨을 걸고 하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 내막을 아는 것이 목숨을 걸 정도라... 대단한 내막이군요.

- 위험한 일에 발을 담그게 해서 죄송합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피식 웃었다.

- 저도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이 일이 나쁜 일일 경우에는 계약금 돌려주지 않고 그만 둔다고.

- 나쁜 일이라... 생각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하지만 나쁘다면 나쁜 일일 수 있습니다.

- 딜레마로군요. 나쁜 일인지 아닌지 알려면 내막을 들어야 하고 내막을 들으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하하. 참 어처구니없게 됐군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파이프에 담배를 넣고 물었다. 철구는 파이프에서 담배 연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 내 생각엔 이미 갈 만큼 간 것 같은 데요. 내막이고 뭐고 그 최세현이라는 여자 뭔가 있는 건 확실하더군요.

철구의 말에 말없이 파이프를 빨던 원 회장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물렸다. 무영마저도 밖으로 내보냈다.

- 회장님 이 자는...

무영의 말에 원 회장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원 회장은 무심한 듯 말을 했다.

-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내가 사람을 볼 때는 눈과 입을 보지. 눈은 그 사람의 심성과 마음이 드러나고 입에는 그 사람의 의지가 나타나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이 분은 내가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 많은 일을 담고 있는 눈이야. 그리고 저 입매는 비록 칼을 댄 흔적이 있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지. 어쩌면 저 사람이 내 악몽을 치료해 줄 수도 있을 거라 믿네. 이 정도면 되겠나?

무영은 원 회장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저렇게 단번에 신뢰를 하거나 믿은 적을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도 저 정도로 극찬에 가깝게 평가한 적도 없었다. 원 회장은 자신을 평가할 때도 냉정했다. 세계적인 기업가였지만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명확하게 말했다. 그건 누구를 평가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철구는 마치 그런 것과 관계없는 것처럼 칭찬만 늘어놓았다.

- 세계적인 회장님께 칭찬인지 아부인지 모르겠지만 들으니 부끄럽군요.

철구의 말에 무영은 갑자기 빈정이 상했다.

'이런 놈을 어째서...'

그러나 원 회장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자리를 피했다. 무영마저 밖으로 나가자 철구는 무영이 있을 때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 무례라니요. 연기가 어설프시더군요.

- 티가 났군요. 하지만 아무도 몰랐으니 괜찮겠지요.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원 회장은 철구의 말에 눈을 감았다.

- 지난번에 물었던 것부터 답하지요. 우선 그 여자 방에 카메라를 설치한 건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 놓았는데 감시만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 보호요?

- 나의 의심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 그렇군요. 그럼 저는?

-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까 다섯 명이라고 하셨습니까?

- 네. 저 무영이라는 친구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더군요.

- 이상하군요. 제가 보고 받기엔 무영을 제외하고 세 명이라고 들었는데...

- 그런가요?

- 확실히 다섯 명이었습니까?

철구는 그 상황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 네. 분명 다섯이었습니다. 누군가..

-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설치한 사람이겠군요.

- 그렇겠죠. 참 복잡한 여자군요. 말할 때에는 전혀 그런 걸 못 느꼈는데.

- 어쩌면 더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원 회장의 말에 철구는 손에 깍지를 끼고 원 회장을 보았다.

- 무슨 일이신지 말씀해 주시지요.

원 회장은 마치 중요한 일을 꺼내 놓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철구는 원 회장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을 뿐더러 말도 안 되는 얘기였기에 원 회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회장님 성격에 농담을 하신 건 아닐 테고. 전 전혀 믿어지지 않습니다.

- 저 역시 믿어지지 않아서 의뢰를 부탁드린 것입니다.

- 그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 저도 잡지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절대 그 여자를 잊지 못하니까요.

- 아무리 그래도.

- 하지만 철구 씨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철구는 세현이라는 여자를 조사하면 할수록 마치 밑빠진 독에 물을 붙는 것처럼 모든 정보가 허망하게 흩어져버렸다. 아니 정보랄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가 무척이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원 회장에게 들은 말은 황당하다 못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 어쩌면 정보 기관 쪽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정보를 지운 것은 아닐까요?

- 정보 기관이라... 내가 손 써서 알아볼 것은 알아볼 테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 음...

- 자 그럼 철구 씨와 그 여자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철구는 이 의뢰를 받고 세현에 대해 조사하다가 그녀가 자신과도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원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조만간 만나서 세현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고 이미 말이 통해 있던 상태였다. 철구는 자신을 감시하는 것인지 보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이가 원 회장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영의 얼굴은 특징이 없었지만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철구같은 눈썰미 좋은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낼 수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는 세현과 찻집으로 들어갈 때 찻집 유리문에 멀리서 자신과 세현을 지켜보는 무영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무영의 입장에서는 실수라고 하겠지만, 주위에 대한 신경이 어지간히 날카롭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찰라의 시간이었다. 철구는 기회가 되면 원 회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무영에 의해 막혔다. 무영은 이 일을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려고 하였고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본인 스스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이번 일의 경우에는 회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원 회장을 만났을 때는 두 사람이 은밀하게 대화를 하기 위해 철구는 일부러 무영을 자극하고 압박한 것이었다. 흥분한 상태로 대화가 불가능하게 만들어 원 회장과 둘만 얘기하려는 의도였다. 원 회장은 연기가 어설펐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무영은 흥분을 했고 두 사람만 남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들을 원 회장에게 직접 물어본 것이었다. 원 회장 역시 철구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 글쎄요. 저는 회장님처럼 명확하진 않습니다. 단지 꿈과 관련된 어떤 기억이 일치할 뿐입니다.

- 꿈과 관련된 기억이라면?

- 아직 어떤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그 여자도 그렇고 둘 다 단편적으로만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그게 아직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 음..

- 저도 좀 더 알아낸 다음 회장님께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 회장은 철구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렇게 하시죠.

원 회장의 말이 끝나자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마지막 말을 꺼냈다.

- 회장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불가사의한 일일이 있을는지도 모르죠.

-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그리고...

철구가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할 때 원 회장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무영과 그 수하들이 계속 곁을 맴돌 것이오. 그리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마시오.

철구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 걸리적거리지만 않으면 뭘 하든 자유니까요. 그리고 무영인가 하는 친구는 무술 실력이 상당한 것 같더군요. 제 보호도 필요하지만 몇 명은 최세현을 보호하는 데 보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 알았어요. 그럼 고생하시오.

철구는 밖으로 나오며 무영과 마주 치자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러나 평소 잘 웃지 않는 얼굴이라 거의 썩은 미소에 가까웠다. 무영은 철구가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 얼굴이 굳어졌지만 철구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회장님이 우리 둘이 싸우면 둘 다 염라대왕을 만나게 해주시겠다는군.

철구는 무영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밖으로 나가다 무영을 보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 그런데 너랑 회장님이랑 둘 다 중국 사람 맞아?

철구의 뜬금없는 말에 무영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철구를 쳐다보았다.

- 뭔 중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그리 잘 해. 나보다 더 표준어를 쓰네. 참나.

철구의 너스레에 무영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무영 역시 철구가 실력 좋은 인물인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의 상황을 곱씹어보니 어설픈 연기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설프게 도발한 것에 넘어간 자신도 어설펐지만 그런 연기를 한 철구도 무척이나 어설퍼 보였다.

- 당신은 배우하기엔 글렀군.

철구는 나가면서 무영을 돌아보았다.

- 보다시피 이렇게 생겨서 배우는 예전에 글렀었지. 너도 무림의 고수가 되긴 글렀어. 빠른데 그런 어설픈 도발에 쉽게 넘어가면 고수가 될 순 없지. 안 그래?

둘 다 서로의 약점을 찌르고나자 표정이 없는 무영마저도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 담부턴 걸리지 마라. 간다.

철구가 밖으로 나가자 무영이 피식 웃자 밖으로 나오던 원 회장은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좋은 형제가 될 만한 인물이더구나.

원 회장의 말에 무영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철구를 인정하게 되었다.

- 재미있는 친구입니다.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냉정한 무영의 입에서 재미있는 친구라는 말이 나오자 원 회장도 고개를 끄떡였다.

- 다음에 올 때는 술을 마셔 보자구나. 어떤 사람인지 알게.

원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무영은 원 회장이 들어가는 뒤에 인사를 하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오늘 자신이 한 실수들을 곱씹어보았다. 어쩌면 실수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적수가 없다고 자부하던 무영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실력자인 철구를 인정하는 고갯짓을 하고는 무영도 자신의 방으로 갔다. 모두가 사라진 커다란 거실은 저절로 불이 꺼지고 커튼이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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