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76화 (76/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4. 의혹(2)

새롭게 조성된 신도시인 송도는 아직 여기저기가 공사장이었다. 저 멀리는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설 예정이었고, 넓고 길게 닦이고 있는 도로 양 옆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설 자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갯벌을 간척해서 만든 도시라 바닷바람에서 짠내가 났다. 멀리로 보이는 바닷물만 이곳이 예전에 바다였음을 말해주는 지표 같았다. 하지만 현재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이 바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창 공사 중인 이곳에 이미 지어진 건물이 하나 있었다. 겉에서 보기엔 전면이 유리로 된 7층 짜리 건물이었다. 건물 입구에는 거대한 사자상 조각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고, 입구에서부터 최첨단 검문 시설이 보였다. 로비까지는 누구든 입장할 수 있었지만, 건물의 주요 시설에 들어갈 때는 안구 인식과 지문 인식을 동시에 해야 했다. 건물에는 사방이 CCTV가 설치되어 사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건물의 주요 기반 시설은 지하에 있었다. 바다를 매립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 건물에 지하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특수한 보안 장치를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지하 시설이 있었고, 그 지하 시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10여 명 남짓이었다. 이 건물의 실소유자인 톰슨은 건물의 내부에 매우 만족했다. 특히나 지하 시설은 그간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실험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피터의 기억을 이식받지 못한 톰슨에게는 이 비밀 실험실이 자신의 무기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톰슨이 피터의 기억을 이식받지 못한 이유는 그의 특이한 뇌구조 때문이었다. 톰슨은 이치로가 새마음 병원에서 기억을 이식 받던 날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이제 피터의 기억 중 30%가 뇌에 기록되었습니다.

별실에 누워있는 이치로에게 톰슨이 얘기를 했을 대 이치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 왜 30%만 한 것이오? 지난번에는 100% 이식이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톰슨은 고개를 저었다.

- 30%만으로도 아주 위험했습니다. 뇌압이 정상치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더 이상 진행하면 뇌사(腦死)에 빠질 수도 있어요.

톰슨의 말을 들은 이치로는 실망했다. 물론 지금 받은 것만으로도 이치로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듯 했다. 이게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그레고리의 기억이구나 하는 생각에 이치로는 저절로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왜 홈즈와 샘이 이 기억의 유출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단지 30%의 기억 이식으로도 이런 느낌을 받는데 만약 100% 이식을 받는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상상하자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물론 이치로는 톰슨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재 새마음 병원에 있는 기억 주입기에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톰슨이었기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톰슨은 이치로의 기억 주입이 끝나자 그를 조금은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 기분은 어떠십니까?

- 음.. 머리가 약간 어지럽군요. 두통도 조금 있구요.

- 아마 그럴 겁니다. 갑작스럽게 뉴런과 시냅스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니까요.

이치로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톰슨에게 물었다.

- 톰슨 병원장님은 기억의 몇 %를 이식하셨습니까?

이치로의 말에 톰슨은 고개를 저었다.

- 저는 이식이 불가능합니다.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쇼크로 기절만 했을 뿐입니다.

- 네? 그게 어떻게...

톰슨은 자신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것을 말하면서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기억을 이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해 주었다.

-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서번트 증후군이 있었습니다. 기억을 보통 사람들처럼 해마를 거쳐 장기 기억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를 머릿속에 각인하지요. 그런데 기억 이식술은 다운로드받은 피터의 기억을 해마를 통해 장기 기억으로 레이저로 각인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이치로는 고개를 끄떡였다. 톰슨의 그러한 상황이 자신에게는 오히려 유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톰슨이 자신보다 더 많은 기억을 이식했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은 그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톰슨은 피터의 기억을 하나도 받지 못했고, 자신만이 비록 30%일지라도 받았으니 자신이 '그 분'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피터의 기억을 또다시 이식을 받기 전에 폐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많은 기억을 이식받게 된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의 하부 조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축하드립니다. 이제 지상에 남은 유일한 '그 분'이십니다.

- 고맙습니다. 이게 다 톰슨 원장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저와 함께 영원히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톰슨은 내심 자신도 기억을 이식했으면 했으나 그게 여의치 않다는 걸 알게 된 후 최대한 이치로를 이용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송도에 새로운 병원을 설립하고 그 안에 연구실을 차린 것이었다.

- 이제 여기를 나갑시다. 왠지 여기만 오면 누군가 우리를 엿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이치로의 말에 톰슨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 슈뢰딩거가 지금은 미국에 가 있기 때문에 그의 눈을 속인 것이지요. 돌아온다면 발각되기 십상이죠.

- 여기 사용 기록은 지우셨죠?

- 네. 저희와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치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그나저나 여기는 대단한 곳이군요. 미국에서도 이와 똑같은 시설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실패작이라지요?

- 저도 이 시설을 따라서 만들려고 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 그렇군요. 기억을 이식하거나 지우기 위해선 이곳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군요.

- 네. 일단 여기서 나가십시다.

이치로와 톰슨은 새마음 병원에서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라탔을 때 톰슨은 무언가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톰슨은 조직 안에서 일인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직을 장악하고 싶었다. 일인자이자 상징적인 위치쯤이야 이치로에게 주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조직의 실질적 권한을 갖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간 남 몰래 하던 연구들을 당당히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물론 이 실험의 성공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자신에게는 어쩌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 없는 실험은 아니었다. 특히 새마음 병원의 기억 이식기와 연결이 된다면 모든 사람이 꿈에 그리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톰슨은 자신에게 부여된 천형과도 같은 선천병에 씁쓸했다. 한 때 그것을 극복했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능력과 재능을 부러워했다. 사실 자폐를 극복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나 병원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하늘이 도와주는 행운이 겹쳐야 되는 일이었다. 평소에 톰슨은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인과에 의거하지 않는, 비록 상관관계에 영향을 받는 결과일지라도 그는 인과율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피터의 죽음과 슈뢰딩거의 등장, 이치로의 충격 발언,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 대한 일 등을 겪으면서 톰슨은 자신이 신봉해 마지않던 인과율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것 하나도 인과적인 것은 없었다. 아니 이것은 변수 그 자체가 결론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톰슨은 어떤 인과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톰슨은 자신의 방어막을 만들어야 했다. '그 분'이 계실 때에는 모두들 그 분의 영향력 아래에서 서로에 대해 신뢰를 하고 협력을 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그 분이 된다고 해도 톰슨은 그를 믿고 전적으로 모든 것을 일임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련의 사건 안에서 톰슨이 내린 결론이었다. 어떤 원인도, 이유도 없었다. 단지 톰슨은 자신의 생존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었다.

- 새로운, 아니 새롭지는 않지만 중요한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톰슨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사항이었기에 이치로에게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치로는 그런 톰슨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했다.

- 인간을 위한 새로운 길이라뇨?

- 휴우..

낮게 한숨을 쉰 톰슨은 이치로에게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을 꺼냈다.

- 어쩌면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인간의 삶이 영원히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 인간의 삶이 영원히 이어지다니요? 그렇다면 혹시...

- 네. 지금 연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 그건 부작용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일부도 성공했다는 사례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인데요.

- 그간 저희 병원에서는 유전자 복제와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해 개체를 만드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지요. 물론 아직까지 완벽하진 않습니다만 일반적인 배양까지는 성공했습니다.

- 아무리 그래도...

- 복제양 돌리 이후로 벌써 15년이 지났습니다. 물론 그건 발표만 15년 전에 했던 것이지요. 저희는 내부적으로 동물 복제는 이미 40년 전에 끝냈습니다. 그런 다음 인간 복제를 시작했지요. 물론 무수한 실패 끝에 그나마 지금과 같은 일부 성공을 이룰 수 있었지요.

- 일부 성공이라면?

- 글쎄요. 어쩌면 부작용일 수도 있지요. 세포 분열이 정상 세포보다 다소 빠르지요.

- 세포 분열이 바르다는 건...

- 정상인보다 빨리 늙는다는 것이지요.

- 얼마 빨리 늙습니까?

- 지금은 거의 신생아와 같은 분열을 보이고 있어요. 거의 텔로미어(Telomere. 말단소립) 소실이 1000배 정도 빠르다고 보시면 됩니다.

- 1000배면 하루를 살면 천 일을 늙는 것이군요. 고작 한 달을 살면 100살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 그렇습니다.

- 그 외의 부작용은 없습니까?

-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세포 분열만 늦춘다면...

- 네. 그렇습니다.

- 놀라운 연구군요.

- 지금 세포 분열을 늦추거나 재생 능력을 강화하는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 인간을 대상으로 진행 중이십니까?

이치로의 말에 톰슨은 고개를 저었다.

- 기본적으로 재생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플라나리아와 도마뱀 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결국은 그들 생물체의 능력과 결합이 된다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나겠군요.

- 아직 확실하게 결과를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조만간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겁니다.

톰슨의 말에 이치로는 시트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 이식과 기억 추출에 대한 기술은 어느 정도 완료가 되었으니 이제 체세포 복제를 통한 인체 복제만 성공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영생이었던 것이었다. 이치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톰슨은 놓치지 않았다. 톰슨은 이번 연구만 성공을 한다면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기반이 다져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톰슨은 지하 시설 안에 놓인 배양액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에 그대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자신의 어린 시절은 영양 불균형으로 인해 왜소한 모습이었지만, 배양액 안에서 자라고 있는 이의 모습은 완벽한 신체적 균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포의 분열을 늦추는 것, 그리고 분열이 계속되도록 텔로머레이스(말단소립 복제효소, telomerase) 효소를 적용하는 방법 등 아직 산재한 난관들이 있었다. 톰슨은 배양액 안의 어린 자신들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지난 5개월간의 연구로도 도저히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문제였기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성렬의 연구 자료를 받아보긴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연구의 진척이 너무나도 늦었다.

- 이제 샘플을 회수해야겠군.

톰슨은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지하 연구실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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