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3. 그들의 삶(3)
세현은 집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내렸다. 왠지 그 사람이 자신이 보는 환상과 관련이 있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현은 택시에서 내렸을 때 살짝 어지러웠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세현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세현의 사무실 안에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누군가가 환자의 카드를 뒤지고 있었다. 입에 플래시 하나만을 물고 무언가를 찾듯이 환자 카드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한 카드를 꺼내어 본다.
'김한수'
그러고는 진료 카드를 펼치더니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다시 잘 접어서 원래 있던 자리에 넣었다.
세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신의 진료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앞으로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이 밤에 여긴 어쩐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은 채 진료실 앞으로 다가갔다. 열쇠를 집어넣고 문을 열 때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 남자가 간 쪽을 쳐다보았지만, 사내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세현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나갈 때 모습 그대로였다. 세현은 간호사들이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하고 갔구나 하고 생각할 때 책상 서랍이 조금 열려있는 것을 알았다. 세현은 책상 앞으로 가서 서랍을 보았다. 환자의 진료 카드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항상 자신이 잠그고 다니기 때문에 누구든 열 수 없는 곳이었다. 세현은 서랍을 열고 진료카드를 보았다. 뜻밖에도 김한수 카드가 엉뚱한 곳에 꽂혀있었다. 세현은 그 카드를 꺼냈다. 진료 기록이라고 해서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단지 자신만 알 수 있는 표시로 관심 환자를 표시한 것 외에는 그냥 평범한 진료 기록지였다. 세현은 진료 카드를 찾아서 전화번호를 확인하였다.
철구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탁자 위에 서류 봉투를 툭 던졌다. '턱'하는 소리와 함께 소장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던 한수가 벌떡 일어났다.
- 뭐... 뭐야?
그런 한수를 한심스럽게 철구는 쳐다보았다. 철구를 보자 한수는 인상을 쓰며 트림을 꺼억하고 하더니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 아, 요즘에는 왜 이리 잠만 느는지 모르겠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이번 일만 잘 되면 보약이나 한 재 먹어야겠다.
그러더니 철구가 가져온 서류봉투에 눈을 돌렸다.
- 그건 뭐냐? 그 여자 건이냐?
- 하여간 일은 안하면서 눈치만 있어 가지구...
- 야, 내가 그래도 경찰 밥이 몇 년인데... 뭐 좀 있냐?
내용물을 꺼내는 철구를 보며 한수가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 별거 없어요. 부모는 생존 여부를 모르고, 졸업한 학교랑, 현재 직장 정도?
- 정보원 좀 가동해 봐.
철구가 피식 웃으며 한수를 보며 말했다.
- 도청까지 했수.
- 그래? 웬일이래, 그런 거 질색하는 사람이?
- 학교 졸업하고 바로 정신과 개업을 시작했고, 병력 사항도 없고, 애인도 있고, 신용도 좋고...
한수가 슬쩍 다가와 사진을 보며 말했다.
- 인물도 좋고.
- 한수 형!
철구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한수가 움찔하며 빠르게 말했다.
- 야! 자꾸 소리 좀 지르지 마. 가뜩이나 심장도 안 좋은데... 나이 먹으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돼. 얼른 해결하고 전세금 내자 응..
철구는 한수와 티격태격하다가 휴대폰에 뜬 낯선 번호에 갸우뚱하다가 전화 받았다.
- 여보세요?
철구는 서류를 주섬주섬 정리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이내 아는 목소리인 듯 고개를 끄떡였다.
- 김한수 씨 맞나요?
- 네, 그렇습니다.
- 안녕하세요? 일전에 오셨던 ZEN 심리 치료 센터인데요. 다녀가신 뒤로 좀 어떤가 해서요? 아직 불편하시다면 상담과 최면 치료를 한 번 해볼까 해서요. 그렇게 해서 완치가 되신 분들도 꽤 되시거든요?
세현과의 통화 내용이 궁금하여 옆에 바짝 붙어 있는 한수를 귀찮다는 듯 밀어내며 철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그렇습니까? 그럼 받아 보죠 뭐. 시간이요? 저야 뭐 아무 때라도 좋습니다.
- 내일 어떠세요?
- 네? 마침 제가 내일 일이 있어서 근처에 있거든요. 네, 알겠습니다.
철구가 전화를 끊자 한수가 옆에서 재촉하듯 말했다.
- 왜? 뭐래? 보고 싶대?
- 어휴.. 내일 다시 검사하자고 오라네. 나도 조사할 게 있어서 내일 간다고 했고.
- 그래? 그래 가봐야지. 그래야 전세금도...
- 한수 형!
- 알았다고. 소리 좀 그만 쳐!
한수는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철구는 그런 한수를 보며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다음 날 아침 철구는 눈에 쏟아지는 아침 햇살 때문에 눈을 떴다. 지난밤까지 흐리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철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10시가 넘어 있었다. 철구는 소파에서 일어나 세면대로 가서 세수를 했다. 세면대 앞에 있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보면 낯설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러한 얼굴이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ZEN 심리 치료 센터 앞 횡단보도에 선 철구는 옆에 한 아이가 엄마와 같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를 보자 철구는 문득 혜민과 자신의 아이가 떠올랐다. 엄마는 핸드폰을 보느라 아이의 손을 놓고 있었고, 아이는 막대 사탕을 쥔 채 '빠방, 빠방.'하며 차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아이는 횡단보도 앞으로 굴러가는 풍선을 보더니 '푸.. 푸..'하며 그 앞으로 걸어갔다. 건너편 ZEN 심리 센터를 바라보던 철구는 아이를 보고 놀라서 얼른 횡단보도 쪽으로 뛰어들었다. 멀리서 차가 한 대 달려오며 '빵빵'거렸고, 아이는 그 소리에 놀랐는지 우뚝 멈춰 섰다. 철구는 재빨리 몸을 날려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도 아이를 발견했는지 '악!'하는 비명과 함께 아이 쪽으로 다가왔다. 철구는 아이를 안고 한 바퀴 굴렀다. 다가오던 차가 급제동을 했고, 철구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누워있었다. 놀란 아이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고, 철구는 품에 안은 아이가 무사한지 살펴보았다.
- 괘.. 괜찮아요?
아이의 엄마는 철구의 상태를 묻는 것인지 아이의 상태를 묻는 것인지 모를 질문을 했다. 철구는 아이를 안고 일어서며 말했다.
- 나도 괜찮고, 아이도 괜찮아요.
철구는 품에 안고 있는 우는 아이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뚝 그쳐야죠. 까꿍~!
철구는 뒤에 서 있는 차들이 빵빵대도 아이를 보며 웃기는 표정으로 말했다.
- 우루루, 까꿍, 까꿍 울지 마세요. 아저씨 보고 웃으세요.
아기는 그런 철구를 보며 잠시 웃다가 다시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철구는 아기가 울자 당황하여 얼른 아이를 안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아이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의 엄마는 철구에게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고, 철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 아기가 있을 땐, 애한테 집중하슈. 큰일 날 뻔 했으니까.
철구의 말에 아이 엄마는 머리를 조아리며 '알았다.'고 말을 하고는 아이를 안고 서둘러 가던 길을 갔다. 철구는 그런 엄마와 아이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ZEN 심리센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세현은 철구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낯모르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져 아이를 구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만난 그는 악마와 같이 자신에게 달려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창문에서 떨어져 책상 앞으로 가려다가 세현은 건물 기둥 옆에서 철구를 지켜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누군가 싶어 목을 빼고 자세히 보려고 창문 앞으로 다가가자 그 남자는 기둥 뒤로 사라졌다.
- 저 사람은 뭐지?
세현은 머릿속이 복잡한 듯 두 손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의자에 앉아 철구의 차트를 살펴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철구가 들어오자 세현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 어서 오세요. 제가 바쁘신데 괜히 오시하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아닙니다. 저도 증상이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다시 한 번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일이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습니다.
- 애기는 괜찮나요?
- 네?
- 창가에 서 있다가 봤어요. 어째 분위기가 좋지는 않아 보이던데요?
- 아, 애기요? 엄마가 아이를 놔두고 핸드폰만 보길래 한 마디 했죠. 제 얼굴이 무섭게 생겨서 그런지 애기도 울더라구요.
세현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 뭐, 썩 좋은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정의의 사도 같았어요.
- 뭐 인상이 험하다고 심성까지 험하진 않으니까요.
세현은 인터폰을 눌러 간호사에게 차를 부탁했다. 두 사람은 지난 번과 다르게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세현은 철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러자 철구는 놀라는 척 하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 네? 제가 선생님 꿈속에 나타난다구요?
철구는 속으로 그럴 리가 있나하고 생각했다. 자신은 예전보다 살도 많이 빠졌고, 생김새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 네, 기억나시나요? 제가 강철구씨를 처음 뵀을 때 어디선가 본 거 같다고 말씀 드린 거요?
- 네, 그랬죠. 기억납니다.
- 그런데 그게 꿈에서 였을 거라고는 저도 생각지 못했어요.
철구는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 신기한 일이군요.
- 물론 이미지만 비슷한 걸 수도 있어요. 제 꿈에 나타난 남자는 한수 씨보다 몸집도 크고, 뭐랄까 지금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어요. 눈도 좀 더 크고, 코는 좀 더 높았거든요. 아무튼 전체적으로 다른 인상이었는데... 느낌이 마치 한수 씨 같았어요.
세현의 말에 철구는 눈이 커졌다. 성형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알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철구는 놀란 표정으로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꺼냈다.
- 그래서 말인데요. 한수 씨와 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한수 씨의 불안감이나 불면증도 그런 맥락에서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이런 경우 보통 최면 치료를 하는데, 어떠세요? 한 번 해 보시겠어요?
- 최면 치료는 지난번에 하지 않았나요?
- 지난번엔 치료가 아니라 증상 확인이었어요. 이번엔 치료를 위해 심층적으로 들어갈 예정이구요.
철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내밀한 비밀을 다 털어놓을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그런 것을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치료처럼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본인의 치료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철구는 그녀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의 일부가 치료일지라도 절대 최면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 저는 굳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세요? 비밀 유지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장소는 한수 씨가 정한 곳에서 할 예정이에요. 저 역시 최면 치료를 받긴 했는데 정확한 인과 관계가 도출되지 않은 결론만 나와서 그래요. 저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믿어요.
그러면서 철구 앞에 보라색 나비 핀을 내밀었다. 철구는 그 나비핀을 보자 놀라서 세현을 쳐다 보았다.
- 이 핀은?
- 이 나비핀은 흔한 게 아니죠. 저도 할머니께 받았다는 기억만 있을 뿐이죠. 저도 진짜 할머니께 받은 건지 모르겠어요. 아니 이 핀 자체가 왜 저한테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한수 씨가 지난 번 최면 상태에서 말씀하신 것이죠.
철구는 그 나비핀을 보자 최면 치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이 여자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 대한 열쇠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의뢰인의 의뢰 역시 어쩌면 친구 딸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파면 팔수록 현실은 단순했고, 감춰진 것은 복잡한 기분이었다.
- 그럼 제가 있는 곳으로 가시죠. 여기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네요.
철구는 자신이 이곳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으면 세현의 방에 CCTV를 설치한 인간이라면 충분히 그 이상의 것을 설치했으리라 여겼다.
- 네. 그럼 어디서?
- 지금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철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세현은 철구를 따라 일어섰다. 세현은 이 남자에게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최면 치료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모든 내용을 다 알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자신의 기억과 조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세현은 간단한 진단표와 CD플레이어와 스피커를 챙겼다. 철구는 세현을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이 아래에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노래방으로 사용하던 곳이었지만 폐업을 하고는 지금은 문을 닫은 곳이었기에 철구는 그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특히 그 노래방은 불법으로 매매춘까지 하던 곳이었기에 안락의자나 침대 같은 것도 있었다.
- 여.. 여기는...
- 내가 아는 노래방인데 폐업을 하고 지금은 비어 있는 곳이죠.
- 노래방이요? 노래방에 왜 이런 것들이...
- 아! 그런 것들 때문에 문 닫은 거유.
- 그런데 이런 곳은 어떻게...
세현은 본인이 생각해도 오지랖 넓게 쓸데없는 것까지 말하는 기분이어서 말을 끊었다.
- 후후. 여기 주인이 우리 고객이었거든요. 결국 바람난 거 들켜서 이혼하긴 했지만.
철구의 말에 세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어차피 최면 뭔가 하면 다 알 거 아니요? 자꾸 묻지 말고 시작합시다.
- 네? 그게 무슨...
- 최면 치룐가 뭔가 그거 지난번에도 보니까 알고 있는 거 다 불게 만드는 것 같더만...
그 말에 세현은 피식 웃었다.
- 그 사건과 관련된 것만 물을 거예요. 다른 사적인 내용은 묻지도 않을 거고, 물어서도 안 되는 거죠.
그 말에 철구는 갑자기 인상을 썼다.
- 진작 말을 하던가. 난 또 내 사생활도 다 까발려지는 줄 알고 순순히 얘기했지. 에이.
철구의 말에 세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는 철구에게 가장 편한 곳에 앉거나 누으라고 했다. 철구는 둘러보다가 안락의자에 앉았다.
- 최대한 편안하게 앉으세요.
그러더니 CD플레이어를 틀었다. 그러자 조용한 명상 음악이 흘렀다. 안락의자에 앉은 철구는 음악을 들었다. 철구는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빠졌다.
- 자, 마음을 편하게 하시고요.
세현은 철구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철구의 눈동자가 감긴 눈 안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자 세현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 이제 조금씩 뒤로 갈 거예요. 하루, 이틀, 사흘...
철구의 몸이 더 늘어지는 것을 본 세현은 천천히 얘기를 진행했다.
- 1년 전이에요. 지금은 무얼 하고 있죠?
철구는 세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듯 들렸다.
- 모텔 안이에요. 사진을 찍고 있어요. 동작구청 박 주사가 바람을 피워서...
세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그럼 좀 더 과거로 가 볼게요. 점점 뒤로 가요. 한 달, 두 달, 세 달... 일 년, 이 년...
그런데 그 순간 철구는 몹시 괴로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철구가 누워 있는 안락의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철구의 몸이 심하게 요동을 친 것이었다.
- 한수 씨. 한수 씨.
세현이 철구를 흔들어 깨웠지만, 철구는 마치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 때 철구의 의식은 어떤 균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철구는 자신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옆에는 뜻밖에도 장 신부가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 신... 신부님.
그러나 석호는 철구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자신의 등 뒤에 기대어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흰 머리의 남자가 뿌옇게 보였다.
그리고 인지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손에 쥐어진 메스와 자신이 팔로 누군가의 목을 두르고 있었다.
- 보라색 나비 핀...
철구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늘색 액체.
- 혜민아...
철구는 하늘색 액체가 담겨 있는 그 곳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누군가 마치 물 속에 빠진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겨드랑이가 번쩍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하늘색 액체와는 멀어졌다.
- 혜.. 혜민아! 혜민아! 안 돼! 놔! 이 자식들아!
- 한수 씨! 일어나세요. 한수 씨!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 같은 먹먹한 소리가 들려오자 철구는 정신이 들었다.
- 헉...
철구는 마치 숨이 막혔던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 괜찮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