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72화 (7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3. 그들의 삶(2)

사실 이번에 중국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 때문이었다. 일본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내용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경찰 문서에서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과 유사한 유형과는 다소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 이거 놀라운 내용이군.

- 뭔데 그러시죠?

- 여길 보게나. 일본에서 네 건, 한국에서 두 건, 중국에서 한 건이 유사하지 않나?

최베드로가 정리한 것을 보자 석호 역시 의구심이 들었다.

-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데요?

- 그렇지? 일주일 간 납치, 정신 분열 상태로 집 앞에 버려지고 3일 후 사망. 사망자들은 모두 악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행동했고, 결정적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했는지 알 수가 없지.

- 그런데 일본에서 일어난 것은 72년, 79년, 81년, 83년이고, 한국은 82년, 94년, 중국은 95년이네요. 모두 옛날 일인데요?

- 그렇지. 파견된 신부들도 제각각이고.

- 단지 저 이유라면 뭔가 석연치 않지만, 지금 저 일을 조사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하는데요?

석호는 가장 최근 일이 11년 전이라는 것이었기에 지금은 어떤 증거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최베드로는 달랐다.

- 이걸 봐봐.

최베드로가 준 문서에는 베트남과 중국의 접경 지역인 나포현(那坡?)에 있는 비밀 교회 소속 왕 신부가 보낸 것이었다. 석호가 그 문서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최베드로를 보았다. 그 안에 보고된 내용은 앞에 일어난 일곱 건의 사건과 놀랍도록 유사했다. 단지 그 아이가 일주일 째 살아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 아직 진행형이야.

- 그럼 그 아이도 연쇄적인 일의 희생자인가요?

- 확실하진 않아. 하지만 느낌상 그럴 거라고 생각되는군.

- 그럼 가서 확인해 봐야겠군요.

- 일단 협조 공문이 왔으니까 가봐야지. 그런데 우리도 신분을 바꿔야 하네. 중국이란 나라가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한 나라니까.

- 그럼 중국 입장에서 저희는 마약 판매상이군요.

- 판매상이라.. 뭐 그럴 수도 있지. 헌금을 받으니까. 아무튼 최대한 빨리 가서 그 아이를 봐야할 것 같아. 그럼 이전 사건들도 어느 정도 맥락을 잡을 수 있으니까.

- 음.. 그런데 왜 납치했다가 돌려보내 주는 걸까요? 단지 미쳐 있는 걸 보여주려고 그런 건가요?

- 글쎄. 단순히 그렇다고 보기엔 기간이 너무 길어. 마치 무언가를 노리고 차근차근 준비한 일 같기도 하지.

- 음... 그렇다면 원한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지.

석호는 최베드로가 준 자료에서 본 희생된 아이들의 나이를 나열해 보았다. 모두 12세~15세 사이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보낸 서류에 있는 아이도 12세였다.

- 모두 청소년기의 아이들이네요.

- 그렇지. 아무래도 저 나이 때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지.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이번에 들어가면 조사를 해 봐야지.

최베드로는 자신과 가까운 야나기사와(柳?) 신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일본인 신부에게 이곳에서 일어난 네 건의 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

-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웃으면서 말했다.

- 뭐 저희가 하는 일이 잘 알고 하는 일은 없었잖아요.

- 어쩌면 그들하고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어. 이런 특이한 패턴으로 봐서는.

최베드로의 심각한 말에 석호는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한국에 있는 철구가 떠올랐다. 지난 3년 간 석호는 외국에서 자료를 조사한다고 떠돌아다녔지만, 분명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최베드로와 석호는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사건에 다가가면 어느샌가 연기처럼 사라져 있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어쩌면 이번 일도 마찬가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행위였다.

- 한국에 있는 마르티노 신부에게 연락을 해야지.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 마르티노가 한국에 있습니까?

- 음... 예전 그 일 때문에 지금 한국에 파견되어 있지.

- 오랜만에 보고 싶네요.

석호의 말에 최베드로가 석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왜? 또 수녀님이라고 놀리게?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 아.. 아니요. 그 친구가 워낙 예쁘게 생겨서...

- 하긴. 지난번에 크로아티아에서 수녀로 변장했을 땐 나도 못 알아봤으니까.

최베드로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들의 연구소의 흔적을 찾아 마르티노와 함께 침투한 적이 있었다. 여성 전문 병원이어서 금남(禁男)의 구역이었기에 내부를 조사하기 위해 마르티노가 수녀로 변장했었다. 그리고 최베드로 앞에 나타났을 때 최베드로는 마르티노가 본인임을 밝히기 전까지 크로아티아 성당에 있는 수녀로 착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마르티노에 대한 얘기 끝에 석호가 말을 꺼냈다.

- 마르티노 혼자서 가능할까요? 외국인이라서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 음... 그렇다고 지금 너나 내가 당장 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석호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다.

- 한국에서 일어난 일은 제가 아는 분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 한국에 아는 분? 누구?

- 강철구 씨라고요.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 같이 침투했던 분입니다.

- 아! 그 전직 형사?

- 네. 저도 계속 외국에 나와 있어서 한 번 연락한다는 게 아직까지 연락을 못 했었네요.

- 음... 위험할 수도 있는데...

- 어차피 저희와 목적이 같은 분이죠. 일단 마르티노와 연계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부탁해 보겠습니다.

- 그래. 항상 몸조심하라고 말씀 드리게. 위험하면 무조건 빠지라고.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최베드로라는 신부의 심성을 느꼈다. 자신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일수록 적극적으로 달려들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무조건 '안전'이 담보되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어도 빠지게 했다. 그게 다른 신부들이 최베드로를 믿고 따르는 이유이자, 목숨을 거는 이유이기도 했다.

- 네. 알겠습니다.

- 이 일만 해결이 되면 우리도 조만간 한국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그 쪽 낌새가 심상치 않아.

도서관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두 사람은 지체없이 베트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두운 방 안에는 노트북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트북에는 MRI 사진이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붉게 칠해진 부분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는 소견서라고 쓴 내용이 보였다. 노트북 화면에서 비치는 불빛에 손이 떨리는 모습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검은 눈은 노트북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노트북에서 나오는 모든 장면을 눈에 담기라도 하려는 듯이 집중해서 화면을 쳐다보았다. MRI 사진이 사라지나 다음에는 뇌파의 파동 그래프 화면이 나타났다. 뇌파는 처음에는 안정적인 알파파(심신이 안정을 취하고 있을 때의 뇌파)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베타파(불안, 긴장 등의 활동파)가 활성화되더니 마지막에는 감마파(극도의 각성과 흥분시)의 수치가 극도로 높아졌다. 이런 뇌의 불안정성이라면 조울증도 아주 심한 증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감마파 수치가 높아진 후에 다시 알파파 수치가 높아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래에 있는 소견서에는 '뇌의 과도한 활성화'라는 구절이 있었다. 검은 손은 화면의 창을 닫았다. 그리고 새로운 명령어를 넣자 화면은 마치 예전 텔넷 시절의 텍스트 스크롤만이 가득한 화면이 보였다. 검은 손은 화면 아래 커서가 깜빡거리는 곳에 'mail'이라는 명령어를 쳤다. 그러자 화면은 아주 단순한 텍스트 화면만이 나타났다. 제목 쓰는 곳도 없이 그저 내용 쓰는 곳과 발송(S), 취소(C)라는 글자만 보였다. 검은 손은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나 이내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듯이 키보드를 눌렀다.

"각성 중. 연락 바람."

그런 후 S키를 눌러 메일을 발송하였다. 그러자 이내 텔넷 화면은 사라지고 화면에 숫자가 5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검은 손은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았다. 숫자가 0까지 줄어들자 컴퓨터에 연결된 디가우저가 작동하며 하드디스크 물리 포맷이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이내 원래 프로그램들이 깔리기 시작했다.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검은 손은 낮은 한숨을 쉬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컴퓨터는 자동 종료가 되었고, 방은 어둠에 휩싸였다. 방에 있던 사람은 어둠 속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서 까치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 뚜르르르...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혼자만 빛을 발하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기계음이 들렸다.

- 각성을 했다고?

- 데이터로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약간의 각성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 음... 다른 이상 징후는?

- 현재까지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다만...

- 다만?

- 현실을 환상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음... 현실 부정 상황이라...

상대방은 침묵을 했다. 기계음은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 감시자는 믿을만 한가?

- 아직 쓸 만 합니다만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되어서 문제의 여지는 있습니다.

기계음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말을 했다.

- 앞으로 잘 지켜보게.

- 네. 알겠습니다.

어둠 속의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창가로 가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그 때 또 다시 핸드폰 벨이 울렸다. 남자는 핸드폰을 보더니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전화를 받았다. ARS에 녹음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 사람은 조용히 나오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 목소리가 끝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마치 주변을 살피면서 천천히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주차장에 서 있는 검은색 차에 몸을 실었다. 그 사람이 차에 올라타자 차는 지체없이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차는 어둠을 뚫고 확 트인 도로를 달리다가 아치형으로 지어진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차는 어둠의 한 편에 있는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가 내렸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연결된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보안 설비를 통과하자 커다란 연구실이 하나 나타났다. 남자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띤 몇 줄의 대형 실린더를 쳐다보았다. 한 줄에는 똑같이 생긴 남자 아이들이 들어 있었고, 다른 한 줄에는 똑같이 생긴 여자 아이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줄에는 각종 장기들이 실린더 안에서 배양되고 있었다. 그 때 옆에서 톰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떤가?

그러자 남자는 실린더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했다.

- 놀랍군요.

남자의 말에 톰슨이 고개를 끄떡였다. 톰슨 역시 실린더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놀랍지. 놀라운 일이지. 참으로...

톰슨은 그러다가 입을 꾹 다물고 길게 숨을 쉬었다. 그러자 남자가 톰슨을 쳐다보았다. 톰슨은 그러다가 무언가를 다짐한 듯이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 내가 자네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를 아나?

톰슨의 말에 남자는 무언가 내심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짐작이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 글쎄요.

- 음... 닥터 공, 자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제안을 하고자 해서 이렇게 비밀 시설까지 공개한 것이네.

톰슨의 말에 공성렬은 흠칫 놀랐다. 분명 자신은 다카다 이치로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톰슨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일개 수석 연구원에게 톰슨 병원장이 제안을 한다는 것도 사실은 어불성설이었다. 성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

- 그렇다면 혹시 이치로님과 관련된 것인가요?

- 글쎄. 이치로님께 아주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지. 하지만 아직 공개할 단계가 아니라서... 차차 공개할 예정이네.

- 그렇다면 이치로님께 직접 부탁드리는 것이...

그러자 톰슨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솔직하게 말하지.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파워 게임 중이지. 물론 자네처럼 아직 연구원인 경우에는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겠지만.

톰슨의 말에 성렬은 무거운 신음소리를 냈다.

- 그런데 왜 저같은 일개 연구원에게...

- 그게 궁금한가? 아니 자네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성렬은 톰슨이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알고 있노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톰슨은 그 말에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 하하. 좋은 태도야! 그런 태도야 말로 자네가 가져야 할 태도지.

그러면서 성렬 앞에 사이언스지를 펼쳤다. 'Continuing cell division(계속되는 세포 분열)'이라는 논문을 보자 성렬은 뒷골이 오싹했다. 비록 미국의 학자 데이비스 핀치 교수와 공동 작업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 그 논문은 성렬이 주도했던 연구였기 때문이었다.

- 자네 논문에서 아주 흥미로운 걸 발견했지. 뭐랄까... 나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느낌이었지.

성렬은 톰슨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 논문을 발표하고 나서 이치로의 호출을 받았었다. 그 논문에서 인용된 샘플의 출처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성렬은 눈앞이 아득했었다. 성렬은 이치로가 유전학 쪽에는 조예가 깊지 않다는 것을 알고 대충 변명을 하고 나왔다. 연구실로 돌아와서는 그 논문 이후에 준비하던 차기 논문 자료들을 모두 폐기해 버렸다. 아무리 중요한 연구일지라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논문을 지금 톰슨 박사가 펼치고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특이 사례라고 하고 발뺌할 수도 있겠지만, 톰슨 박사는 이치로와 다르게 그 분야의 권위자였던 것이다. 성렬은 명예에 눈이 멀어 목숨을 잃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 사.. 사실 그것은...

뒤에 이어지는 성렬의 말에 톰슨은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더니 아주 놀라운 제안을 하나 했다.

- 음... 자네가 갖고 있는 자료들은 모두 폐기했다면 지금 남아 있는 건 없다는 말이로군.

- 그렇습니다.

- 음... 이를 어쩐다...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톰슨은 성렬이 이미 자신의 손으로 넘어왔음을 느꼈다. 이럴 때일수록 몰아붙이기 보다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는 것은 톰슨은 이성과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 자네에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주지. 대신 그 연구의 결과는 나에게 통보해 주게나. 그리고 내가 시기 적절할 때 자네의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해 주지.

그 말에 성렬은 고개를 저었다.

- 그건 힘든 일입니다. 이치로님께서...

그러자 톰슨이 성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자네와 같은 우수한 수석 연구원을 내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고 싶다고 하면 되지 않나. 그렇게 하면 자네는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고.

톰슨의 말에 성렬은 어두운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은 성렬에게 더욱 달콤한 말이었다.

- 내가 자네 연구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하겠네. 연구비나 다른 일체의 것은 신경쓰지 말고 자네가 하던 연구를 계속하시게나.

톰슨의 말에 성렬은 내심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사실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는 여러 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돈도 많이 들었고, 또한 이치로의 엄명으로 인해 연구를 진행하기도 힘들었었다. 그러나 든든한 배경인 톰슨 병원장이 나서만 준다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톰슨의 말이 성렬의 마음에 걸렸다.

-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이치로님께는 비밀로 해 줄 수 있나? 오직 나에게만 보고한다는 약속을 해야 하네만...

성렬은 이미 이렇게까지 얘기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지금 거절을 한다는 것은 사지(死地)에서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름없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이치로는 자신이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렬의 말에 톰슨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연구에만 집중해 주게. 내가 다른 일은 다 처리해 줄 테니. 그리고 이치로님께서 맡긴 일도 있을 테니 그것도 소홀히 하지는 말게나.

성렬은 그 말에 고개를 크게 끄떡였다.

- 네. 알겠습니다.

톰슨은 성렬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비서를 불렀다.

- 나갈 때도 똑같이 나가면 되네. 주차장에 차가 있을 테니까 그걸 타고 가면 되네.

톰슨은 성렬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성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어떤 샘플인지... 그 샘플만 알면 되는데...

톰슨은 고개를 돌려 실린더를 쳐다보았다. 처음에 보았던 실린더 안의 어린아이들이 어느새 10대 후반의 청소년으로 변해 있었다. 톰슨은 고개를 저으며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