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71화 (7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3. 그들의 삶(1)

3. 그들의 삶

스핑크스 연구소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고 진짜 이집트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막은 사막이었다. 네바다 주 한가운데 있는 에어리어 51 안에 스핑크스 형상으로 연구소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스핑크스에는 일반적인 연구 시설이 있었고, 더 은밀한 시설은 뒤에 있는 피라미드 안에 있었다. 그렇기에 외부로 알려진 것은 스핑크스 내부에 있는 시설뿐이었다. 스핑크스 연구소는 외부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개방하여 그 안에서 행하고 있는 다양한 실험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비록 에어리어 51 안의 시설일지라도 그 곳은 누구라도 신청만 하면 관람이 가능했다. 그 곳에서 전시하는 것 역시 다양했다. 고고학적인 내용, 가령 공룡이나 선사 시대의 다양한 생물들을 복원하여 보여주기도 했고, 사람들이 흥미로울 만한 것인 외계인과 UFO에 대한 내용도 전시했다. 또한 인간이 갖고 태어날 수 있는 유전병이너 희귀병에 대한 표본도 있었고, 심지어는 기증을 받은 신체의 장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관람을 하려면 6개월 전에 신청을 해야 했다. 물론 에어리어 51 깊숙이 있는 다른 시설들은 여전히 공개가 되지 않았지만 스핑크스 연구소의 공개만으로도 에어리어 51은 봉인해제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이전 시대의 실수를 또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 조직은 모든 체계와 감시를 일원화하였다. 연구와 결과에 대한 보존도 과거와는 달리 모두 스핑크스 연구소에서 진행을 하였다. 또한 연구에 대한 내용도 철저하게 분업화하여 상호간의 교류를 금지시켰다. 일선 병원에서는 단지 임상실험과 그와 관련된 수술만을 제한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랬기에 내부의 반발도 있었지만, 그렇게 반발을 하는 사람은 스핑크스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게 하거나 아예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하였다. 과거와 같이 경고를 한다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배반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었다. 과거보다 오히려 더욱 처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람을 그렇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죽음이 자비로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언론과 자본, 그리고 정보력을 동원해 한 인간이 다달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사람을 몰았고, 그 와중에 스스로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일부는 아예 금치산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조직의 새로운 룰을 만든 것이었다.

'협력엔 지원을, 배신엔 종말을.'

그들의 정점에서 모두에게 알려진 존재는 로라 리빙스톤이었다. 그녀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자 세계 평화 위원회 의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조직의 얼굴 마담이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인맥과 화술로 대중들에게 단체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협력 관계를 이끄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슈뢰딩거는 그녀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미국 내에서 조직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 한국의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에서 하던 모든 것을 이전하기는 힘들었다. 이미 피터 스미스가 그와 관련된 기반 시설을 한국의 모처에 마련해 놓았기에 스핑크스 연구소는 아직까지 모든 과학적 기반을 다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억 이식과 삭제와 관련된 것들은 현재 만들어진 기계가 한 대 외에는 없었다. 피터가 만들어 놓은 기계를 모방해 만들려고 온갖 기계공학자들과 의학자들이 뛰어들었지만 성공률이 고작 0.7%에 불과했다. 한국의 기계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광학 레이저를 만드는 입자가속기가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뒷산을 비롯해 그 일대 지하에 매설되어 있었기에 그 기계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동네 전체를 이전해야 했다. 그래서 에어리어 51과 같은 사막에 새롭게 설치하고자 했으나 분명 모든 조건과 상황이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슈뢰딩거는 모든 학자들과 그 차이를 찾기 위해 모든 부분을 점검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난 3년 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슈뢰딩거는 피터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기억과 관련된 내용은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둘 수밖에 없었다. 슈뢰딩거는 다른 무엇보다 그 기계의 위대함을 알고 있기에 스핑크스 연구소에만 머물 수가 없었다. 유전자와 관련된 모든 내용이야 또 다른 실험이나 연구로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기억과 관련된 것만큼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슈뢰딩거는 로라 리빙스톤을 스핑크스 연구소의 얼굴 마담으로 만들고 자신은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이유말고도 한국에서 진행하는 중요 연구가 있었기에 슈뢰딩거는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 준비는 잘 되고 있나?

슈뢰딩거는 책상 위에 있는 서류철을 덮으며 연구원인 듯 싶은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나 연구원은 다소 확신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 아직 정확한 데이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 아니. 3년일세. 3년 동안이나 데이터를 뽑아내지 못하다니 그게 말이 되나?

- 그게 데이터보다 생체 반응이 워낙 들쭉날쭉해서 그렇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 지난 3년 동안 뇌파, 뇌압, 뉴런의 반응, 중추 신경계까지 모두 체크를 했지만, 어떤 날은 거의 렘(REM) 수면에 빠진 것처럼 나오고, 어떤 날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도파민을 분출하기도 합니다. 아니 그보다 뇌압이 과도하게 높아 거의 뇌출혈 직전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어서 함부로 무언가를 시도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평상시에는 정상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데이터를 다운받으려고만 하면 그렇게 변했습니다.

- 뭐?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뇌의 상태를 조절한단 말인가?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라...

- 하긴 지난 3년 동안 말이 되는 일이 있긴 했나.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헛된 것에 집착을 했는지도 모르지.

- 그럼 다운로드는 어떻게 할까요?

- 시도는 해 봐야겠지만,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지 않은가?

- 그렇긴 합니다만...

- 어쩌면 그게 운명일는지 모르지.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태도이기에 그런 말 자체를 금기시했기에 슈뢰딩거의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그런 연구원을 보고 웃었다.

- 자네도 내 나이쯤 되면 이성이 갖고 있는 한계를 느낄 것이라네. 당장 저것만 해도...

슈뢰딩거의 시선이 돌아가자 연구원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돌았다. 그 앞에는 하늘색 불빛이 희미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대형 실런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한 9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한 명이 있었다. 그 아이는 실린더 안에서 눈을 감은 채 온갖 자극판을 붙인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깊은 상념에 빠진 듯 보였지만, 그의 입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아빠와 함께 놀이동산에서 뛰놀던 기억을 떠올리는 듯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슈뢰딩거는 고개를 돌려 연구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 생체 반응만 체크하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알 수 있겠지.

슈뢰딩거의 말에 연구원은 고개를 끄떡였다. 연구원은 그러고는 다시 실린더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지식으로,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을 그는 괴물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이었기에 연구원은 마음속의 이율배반을 느꼈다. 슈뢰딩거는 옆에 있는 대형 실린더를 쳐다보았다. 결심만으로는 이미 수백 번도 넘게 폐기하고 싶었던 샘플 앞에서 슈뢰딩거는 그윽한 눈길이 되었다. 다른 샘플과는 다르게 이상하게도 마음을 끄는 모습이었다.

- 어쩌면 폐기하는 것이...

슈뢰딩거는 또다시 마음속으로 폐기하고자 생각을 했으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 샘플 앞에서는 나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분명 대의를 위해서나, 앞으로의 상황을 위해서도 폐기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선뜻 그렇게 하지 못고 있었던 것이었다.

- 운명이라... 우습군. 내 입에서 운명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주 나올 줄은 몰랐는데...

슈뢰딩거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석호는 최베드로와 함께 중국의 한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작은 구릉을 배경으로 한 50여 채의 가옥이 모여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적으로 빈곤했으며 딱히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집은 없었다. 아니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모든 집의 형태가 비슷하여 단지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더욱이 이 지역의 생계의 기반은 고작해야 구릉 아래 있는 논과 밭, 그리고 무얼 키우는지 모르지만 뒷쪽 비닐 하우스가 전부였다. 이런 시골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맣지만 단단해보이는 성당이 하나 있었다. 그 성당은 산촌의 성당이라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고 있는 중국에 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다. 아니 중국에 있기 때문에 그런 산촌에 숨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베드로와 석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이곳 신부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성당의 신부는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중국인 신부였다. 그는 중국 국가의 허락을 받은 애국회 소속이었으나 진정한 신앙을 품고자 그 곳에서 탈퇴하여 대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본토로 들어와 지하 교회를 세웠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산촌에 사는 사람 전부는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 동네에 최베드로와 석호가 온 이유는 그를 응원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물론 그 신부의 요청으로 오긴 했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한 아이의 특이한 행동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의 말로는 보름 전에 실종되어 공안에 신고를 했는데, 흔적도 찾지 못했다가 일주일 전에 집 앞에서 아이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공안들에게 이 마을의 정체가 발각되었지만 적당한 뇌물로 눈감아 주었고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진심으로 감사해 했다. 그러나 아이가 깨어난 후에 보인 이상한 행동은 부모를 경악케 하였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을 들썩이는가 하면, 비명을 지르며 이상 행동을 하였다. 칼로 자해를 한다든가, 먹은 것을 토한 후에 다시 먹는다든가, 아니면 눈이 돌아가며 양 볼을 씹어 피를 뱉어내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만 했다. 이에 아이의 부모는 평소에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께 이러한 사실을 말했고, 그 신부는 그 아이를 데리고 몇 차례 도시에 있는 병원으로 갔지만, 도시 의사들 중 산촌에서 온 가난한 아이에게 누구도 성의껏 진료를 하지 않았다. 진통제 몇 알 던져주고는 처방의 끝이었다. 치료는 커녕. 병명조차 알려주지 않기에 신부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산촌으로 온 후 바티칸에 연락을 해 석호와 최베드로를 불러온 것이었다.

- 악령이 든 건가요?

아이의 부모는 최베드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최베드로는 조심스러웠다. 행동은 분명 악령에 사로잡힌 것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아이는 악령에 사로잡힌 자라면 누구나 하는 방언(放言)이나 사탄 숭배 행위, 신성 모독 행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한 정신질환적인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강박적 인격 장애와 같은 행동 패턴과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었지만, 불안감과 우울감 등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 악령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강박증이나 신경증의 정도로 보아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뇨? 그게 뭐죠?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무식하여 못 알아들어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석호가 아이의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그건 어떤 사고로 인한 외상(外傷)을 입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되거나 혹은 특정 상황에 놓일 경우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행동에 장애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 그럼 우리 애가 어떤 사고가 있었다는 건가요? 몸에 보니까 상처도 하나 없던데...

순박하게 생긴 아이의 어머니가 몹시 불안한 눈을 하고 석호를 쳐다보았다.

- 겉으로 보이는 부상이 아니라 어쩌면 정신적인 것이나 아니면 신체 내부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하면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할 겁니다.

최베드로는 아이의 부모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부모들에게 안심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부모뿐만 아니라 최베드로에게도 안심되는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자해를 할 정도로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스트레스의 정도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 병... 병원은... 저희가...

아이의 아버지는 무언가 무척 마안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최베드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병원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아이와 한 분만 동행하실 수가 있어서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최베드로는 석호에게 눈짓을 했다. 석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의 아버지를 불러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석호릉 쳐다보았다. 석호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통상적인 말을 했다.

- 마을이 참 고즈넉하고 예쁘네요.

석호의 말에 아이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을 했다.

- 예. 사실 여기 전부가 숲이었는데 왕 신부님과 함께 저희 아버지 대가 여기를 살 수 있는 인가로 만든 거죠. 이제 조금 살만하니까 아이가 저렇게...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저렇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눈물을 흘렸다. 석호는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의 거친 손은 그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이며 석호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 감사합니다.

석호가 보기엔 순박하고 예의바른 이 사람의 아들이 일주일간 사라진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마을로 봐선 돈 때문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 사람을 봐서는 원한 관계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유괴한 지 일주일 후에 보낸 것으로 봐서도 어떤 수술이나 신체적인 위해는 아니었다. 단순히 정신이 나가게 하기 위해 일주일 간 데리고 있다가 집으로 보내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 혹시 아드님을 데려간 사람한테 연락 받은 건 없으신가요?

석호의 질문에 남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집에 전화가 없어서... 그리고 이 마을에 유일하게 성당에 전화기가 하나 있는데 그리로도 온 게 없었어요.

- 혹시 외람된 말씀이지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나요?

- 원한이요? 글쎄요. 제가 아버지와 같이 열 두 살 때 이리로 왔는데 여기 사람들과는 원만하게 지내서요. 아내도 이 마을에서만 살아 와서...

석호가 보기에도 이 부부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 그럼 여기로 오신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군요.

- 네. 그렇습니다.

- 그럼 아버지께서 이리로 오신 이유는 왕 신부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 그건...

아이의 아버지가 말을 하기 주저하자 석호가 부드럽게 말을 했다.

- 다 지난 일입니다. 괜찮으니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뭔가 주저하는 듯 하다가 말을 했다.

- 저도 사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안 좋은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안 좋은 일이요?

- 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항상 그 일로 괴로워하셨지요.

- 그럼 중국 정부 안에서 했던 일이었나요?

- 아버지께서는 중국 공산 정부가 세워졌을 땐 그냥 평범한 의사셨어요.

- 그럼 언제...

-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일로 알고 있습니다.

- 훨씬 전의 일이라...

아이의 아버지는 뭔가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 사실 저는 늦둥이입니다. 아버지께서 쉰 살이 넘어서 저를 낳았죠. 위로 형들과 누나들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모두 죽었습니다. 뭐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제가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이곳으로 옮기자고 하셨죠. 상해 근처에서 그리 부유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가 아무 것도 없는 이곳으로 옮기자고 했을 때 저는 무척 싫었거든요. 그런데 늙으신 아버지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 서둘러 이곳으로 옮겼죠. 나중에 돌아가실 때 유언처럼 죗값은 다 치렀다고만 하셨죠. 제가 열여덟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벌써 18년 전입니다.

아이의 아버지 얘기를 듣던 석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일은 동네 사람들께 비밀입니다. 아버지에 관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잘 모르거든요.

석호는 아이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 이 일은 제가 무덤까지 갖고 가겠습니다. 아무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 그럼 제가 생각한 대로 아버지 때문에 저희 아들이 납치를 당했던 건가요?

석호는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 만약 그랬다면 쉽게 보내주지 않았겠지요.

석호의 말에 아이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떡였다.

- 그.. 그렇겠지요. 그럼 누가..?

- 그건 저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가 그냥 실종되었다가 나타났다는 건 뭔가 이상한 거죠.

- 그렇군요.

- 아무튼 감사합니다.

-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한 일이죠. 저희 아들까지 치료를 해 주신다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석호는 아이의 아버지와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아이의 어머니가 짐을 사고 있었다. 최베드로는 아이의 용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 다행히 진통제가 있어서 베트남까지 가는 데는 지장이 없겠어.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의 어머니가 싸놓은 짐을 들어 차에 실었다. 짐이 다 챙겨지자 최베드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 저희가 최대한 치료를 잘 해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눈물까지 흘리며 인사를 했다. 최베드로는 왕 신부를 보며 말했다.

- 고생이 심하실 텐데..

그러나 왕 신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저는 그래도 이곳에서 따뜻하게 지내니 오히려 최 신부님과 장 신부님이 더 힘드시겠죠. 모쪼록 이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밝고 예의 바른 아이였는데.. 꼭 고쳐서 아이의 꿈인 신부가 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왕 신부는 최베드로와 석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최베드로는 그러마하고 왕 신부의 손을 같이 잡았다. 두 부부가 작별 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타자 석호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를 잡은 뒤칸이 흔들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 베트남 국경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눈이라도 붙이시죠.

석호가 최베드로에게 말을 하자 최베드로는 심각한 표정을 풀고 석호에게 말을 했다.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석호는 룸미러로 뒤칸을 흘끗 보았다. 물론 최베드로 신부가 한국어로 물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염려는 없었지만 석호는 괜히 그들이 신경을 쓰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뒤 칸에 있는 엄마와 아들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 저는 저 아이 때문에 오히려 갈피가 안 잡힙니다.

- 음.. 악령이 아니라 정신병이라면, 일주일동안 어떤 일을 겪었기에 트라우마가 그렇게 심한 걸까요?

- 음.. 보통 트라우마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 생기지. 저 아이의 행동은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군.

- 공포증이라면 트라우마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 그렇지. 하지만 저 아이의 행동은 분명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야. 어쩌면 저 아이는 집과 같은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한 것일지 모르지.

- 어떤 경험일까요?

-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다만 그게 그간 아이들을 죽인 원인일 수 있지. 하지만 다른 사망자들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저 아이를 통해 알아봐야지.

- 혹시 약물로 만든 것일까요?

- 약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끔찍한 경험일 수도 있고...

- 무섭네요.

- 아무튼 빨리 가서 조사해야 해. 그리고 저 아이도 살려야 하고.

최베드로의 말에 석호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뿌연 먼지가 이는 비포장도로였지만, 마음 급한 두 사제는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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