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2. 의뢰(3)
한편 병원 정문에 도착한 세현은 이 병원이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정태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종종 오기는 했지만, 오늘은 다른 때와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그곳에서 자신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순간 스쳐지나갔다. 안으로 들어가는 병원 입구의 정원에 서 있는 조각상을 지나칠 때, 웃음 띤 얼굴로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 뭐... 뭐지?
그리고 로비 안으로 들어설 때는 의사들과 함께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번개처럼 떠오르다가 사라졌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세현은 몹시 당황하였다. 사라졌던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현기증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챙기며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많이 불안해 보였고, 몸도 좋지 않아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지 세현은 몇 사람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탔다.
세현은 3층에서 내린 후 옆에 있는 가이드 바를 붙잡고 섰다. 아까보다 어지럼증이 더 심해졌다. 세현은 정태의 사무실 쪽으로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세현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세현은 간호사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눈에 지나가는 간호사와 의사들이 인사하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비디오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한참 후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세현이 눈을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자 책상에 앉아 있는 정태가 보였다.
- 정태 씨. 여기는?
차트를 정리하던 정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 어, 그래. 정신이 좀 들어? 진료실이야.
- 아, 그렇구나. 정태 씨 만나러 왔었지.
정태는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따라서 세현에게 내밀었다.
- 마셔.
세현은 정태가 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목 안으로 시원한 물이 들어가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 많이 긴장했었나봐.
빙그레 웃으며 정태는 세현에게서 컵을 받았다.
- 응, 그러게.
세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정태는 그런 세현은 제지하며 말했다.
- 오늘 진료 끝났어. 좀 더 누워있어도 돼.
- 아니야. 이제 괜찮아
세현은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정태는 그런 세현을 보며 컴퓨터에서 CT 사진을 클릭했다.
- 그게 뭐야?
- 지난 번 찍은 MRI.
세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모니터를 응시했다.
- 심각해?
세현의 말에 정태는 어깨를 으쓱 한 번 하고는 대답했다.
- 아니. 많이 좋아졌어.
- 정태씨, 나도 의사야.
정태의 표정을 살핀 세현이 심각한 듯 물었다.
- 지금은 내 환자이자, 피보호자야.
- 풋.
- 왜 웃어?
- 피보호자라니. 담당 의사가 보호자야?
- 아니. 담당 의사 따로, 보호자 따로야.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 말하면 되는 거야.
- 심각하다는 얘기네. 보호자한테만 말해야 되니.
- 후훗. 아니 보호자에게 감사 인사 받아야지.
정태는 자신에게 '고맙습니다, 선생님'하고 말하더니 활짝 웃었다.
- 환자의 상태가 지난 번 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정태는 원맨쇼를 하듯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더니, 또다시 '고맙습니다, 선생님'하고 자신에게 인사를 했다. 이 모습을 본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 그래, 그렇게 웃어. 그렇게 웃어야지 더 빨리 호전되지.
- 근데 진짜 괜찮아졌어?
- 글쎄 정신과 의사 아니랄까봐 의심이 많아.
정태는 세현의 머리를, 찍은 MRI를 모니터에 띄웠다. 그리고 다른 MRI 사진을 하나 다른 모니터에 띄웠다.
- 자기는 환자라서...
정태가 입을 열었지만, 세현은 모니터를 자신 쪽으로 돌려놓고 보고 있었다.
- 담당 의사 얘기를 들어야지.
- MRI는 내가 정태씨보다 더 잘 보는 거 몰라? 학회에서...
- 알겠습니다. 스캐너님. 직접 보시지요.
- 그 별명 얘기하지 말랬지!
정태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자를 뒤로 빼고, 세현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 음... 멈춘 건 아니네.
MRI를 한동안 보던 세현이 말하자, 정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 단번에 멈추진 않을 거야. 그 약도 아직 확실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지난번보다 진행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어.
- 그건 전에도 그런 적이 있잖아.
- 이 사람아, 희망을 줘도 환자가 뭘 그리 부정적이야.
- 부정적인 게 아니라, 객관적인 거야.
- 니 몸에 객관적이지 마. 환자는 의사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거니까.
- 훗...
정태의 말에 세현은 마음이 편해졌다. 결과를 확인할 때면 항상 정태는 세현에게 희밍을 주는 말을 하곤 했지만, 오늘처럼 자신에게 정이 가득한 말을 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 넵. 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 알았으면 치료비를 내셔야죠.
- 치료비?
- 어허. 의사 선생님께 고마우면 치료비를 듬뿍 내는 거야.
- 뭐?
- 자 여기에 치료비 내.
그러더니 정태가 입술을 쓱 내밀었다.
- 왜 그래? 남사스럽게.
- 어? 환자가 치료비 안내려고 하네.
세현은 둘밖에 없는 진료실을 두리번거리다가 정태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 헤헤.
정태는 실없이 웃었다.
- 이거 좋은데? 치료할 만 한대.
- 다른 환자한테는 이런 진료비 받으면 안 돼.
- 오호라.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 뭐라고?
세현은 정태를 노려보았다. 정태는 느물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 다른 환자한테 이런 진료비 받으면 구속될 걸.
- 하긴. 그럴 넉살이나 있으면 벌써 장가갔겠지.
- 장가? 지금이라도 가면 되지. 우리 언제 결혼할까?
세현은 그 말이 떨리면서도 왠지 두려웠다. 정태가 장난으로 한 말인 건 알지만 왠지 언젠가는 헤어지고 서로의 기억에서 잊힐 것 같았다. 물론 잊는 것은 자신이 먼저가 되겠지만.
- 무슨 프러포즈를 이렇게 성의 없이 하냐? 무드도 없이 진료실에서.
- 그런가? 그럼 다음에 근사하게 하지.
- 그럴 수 있을까?
정태의 마지막 말에 세현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태는 세현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이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 괜찮아지고 있어. 금방 나을 거야. 잊히는 건 과거면 충분해. 현재와 미래가 잊히게 두진 않을 거야.
- 그런데...
세현은 정태의 품에서 나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 왜 또 꿈을 꾸지? 전에 말했던 그 꿈 있잖아. 이상한 곳에 가서 흉측한 실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봤다는 꿈. 그 꿈이 다시 시작된 것도 힘든데, 그 꿈속에서 봤던 남자랑 비슷한 남자가 어제 상담 받으러 왔었어.
정태는 세현이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 내 생각엔 단순한 착각이 아닐까? 데자뷰같은.
세현은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착각이 아니야. 정말 그 남자 같았어. 그리고...
정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현에게 말을 해 보라는 눈짓을 했다.
-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은 여기서 근무했던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 내가 여기 사람들과 인사하는 모습도 자꾸 보이고. 그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어.
정태는 세현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 여기서? 음. 어쩌면 현재 상태가 완전히 멈춘 건 아니니까 그 사이에 약간 진행되어서 그런 거 같은데. 내가 약 처방해 줄 테니까 먹고 푹 쉬어. 주말에 같이 바람이나 좀 쐬자.
세현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 오늘은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내가 아는 현실이 뒤죽박죽 엉킨 것 같아.
정태는 세현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 일단 내가 데려다 줄게. 집에서 좀 쉬어. 약은 내가 주말에 가져다줄게.
- 고마워. 정태 씨.
- 잠깐만. 이것만 하고.
세현은 소파에 앉아서 정태가 차트 정리하는 것을 보았다. 정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자 세현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느덧 정리를 다 끝냈는지 정태는 가운을 벗고 걸려 있던 자신의 웃옷을 입었다.
- 나갑시다.
정태와 같이 밖으로 나온 세현은 복도를 보자 다시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세현은 정태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정태는 세현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세현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놀라서 말했다.
- 괜찮아?
- 응. 괜찮아. 찬바람 쐬면 나아질 거야.
복도를 걷는 동안 세현은 또 다시 머릿속에 환상이 스쳐지나갔다. 복도 끝 부분을 쳐다보자 자신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정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세현은 고개를 돌려 정태를 보았다. 분명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정태였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병원 로비로 내려오자 바깥에서 들어온 찬바람에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세현의 눈앞에 손에서 피를 흘리는 정태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람들과 싸우는 모습, 칼에 맞은 건지, 총에 맞은 건지 모르지만, 왼손에서 엄청난 피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세현은 고개를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 괜찮아? 이거 집에 보내기 두려운데?
정태의 말에 세현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왼손을 보았다. 놀랍게도 정태의 손등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손이 관통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세현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지?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로비 밖으로 나오자 세현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에 본 모든 것이 마치 악몽과 같은 느낌이었다. 세현이 옆을 돌아보자 병원 간판과 안내도가 보였다.
'새마음 병원,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그 순간 간판 앞에서 정태를 비롯한 여러 의사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세현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 정태 씨. 오늘은 그냥 혼자 들어갈게.
- 왜? 몸도 안 좋은데, 내가 데려다 줄게.
- 아니. 괜찮아. 내가 조심조심 갈게.
- 왜 그래. 차는 어디 있는데?
- 몸이 안 좋아서 택시 타고 왔어.
- 그럼 더더욱 내가 데려다줘야지.
세현은 뭐라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정태와 같이 있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믿고 싶었고,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단상들은 정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환상으로 정태를 의심하는 자신이 몹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냥. 오늘은 혼자 들어갈게. 미안해.
세현이 고집을 부리자 정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세현에게 말했다.
- 고집은. 아픈 사람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 도착하면 전화 줄 거지?
- 응. 미안해.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기분도 오락가락하고.
- 뭐 그런 날도 있지. 조심해서 가.
세현은 정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콜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오기 전까지 정태는 세현의 상태를 걱정했지만, 세현은 괜찮다고 정태를 안심시켰다.
- 도착하자마자 전화해!
정태가 택시 문을 닫아주며 말했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가 출발하자 정태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차가 아닌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태가 건물 안으로 사라지자 멀리 있는 차의 시동이 켜지면서 택시의 뒤를 따라 출발했다.
철구는 그 허름한 건물에서 나왔다. 괴기스럽게 잔해물만 남은 건물에서 벗어나자 철구의 두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뭐야, 여기. 귀신이라도 사는 거야?
철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건물을 쳐다보다가 시계를 한 번 보았다. 벌써 이곳으로 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철구는 서둘러 병원 앞에 있는 정원으로 갔다. 그녀가 여기서 나갔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에 철구는 인상을 쓰며 돌아섰다.
- 젠장. 왜 그 건물에 들어가서...
혼자 툴툴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나다. 그래. 거기서 보자구.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선술집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에서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술 주문하는 소리와 '이모'를 찾는 소리가 섞여 몹시 소란스러웠다. 석쇠 위에는 돼지갈비가 구워지고 있었고, 철구는 후배 성준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철구는 성준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자식. 요즘 어때? 여전하지?
성준은 손사래를 치며 소주 한 잔 마셨다.
- 형님도. 참. 아시잖아요. 저희야 늘 똑 같죠. 사무실이 집이고, 경찰서 앞 해장국집 아줌마가 마누라잖아요.
- 그래도 이번에 좋은 곳으로 발령 난다면서?
- 에이. 형님도 참. 형사가 몸으로 뛰어야지. 사무실에 처박혀서 정보나 모으고. 제 체질에 안 맞아서 안 간다고 했시다.
- 자식. 니 와이프도 좋아했을 거 아냐.
- 제 와이프는 터프한 남자 좋아합니다. 저처럼.
성준은 소주 한 잔을 벌컥 마시더니 철구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철구는 예전 사건 이후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성준이 주는 술잔을 받아서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소주 맛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철구는 다시 그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 술이나 마셔 임마, 안 본 사이에 말만 많아져 가지구.
성준은 철구가 준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 미안해서 그렇죠. 미안해서요. 형님.
- 이 자식 몇 잔 안 마셨는데 취했냐?
- 취하긴요.
성준은 자신의 잔을 홀짝 마시고는 철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형님, 무슨 일이에요?
그 말에 철구는 성준의 눈을 외면하며 사이다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 일은 무슨. 그냥 너 보고 싶어서 한 잔 하자는 거지.
성준은 철구를 보며 피식 웃었다.
- 형님은 범인은 못하겠시다. 얼굴에 나 용건 있소하고 써 있구만. 나 같은 애송이한테도 걸리면 막장 아니오.
약간 취기가 오르는지 성준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들떠 있었다.
- 알았다. 알았어... 짜식 좀 있다가 얘기하려구 했더니만..
- 제가 형님을 모르겠습니까?
- 응, 별건 아니구..
철구는 안주머니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성준에게 말했다.
- 여기 이 사람들 한 번 따봐.
성준은 사진을 보며 물었다.
- 누구에요? 의사들인데... 뒷조사 건이에요?
-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고... 이틀이면 되지?
사진과 명함을 자신의 지갑에 챙겨 넣은 성준은 철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 술 한 잔 더 사야 돼요.
- 그래 임마. 알았어.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성준은 갑자기 넋두리처럼 얘기를 늘어놓았다.
- 선배 사라지고 나서 형사님들이 많이 미안해 했어요. 뱃속에 아기까지 있는 경찰 부인이 실종됐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선배도 칼 들고 거기 어디야? 아무튼 거기서 인질까지 잡고서 휘저었잖아요. 미래 생명 뭐인가? 아무튼...
성준의 말에 철구는 무슨 말인지 몰라 성준을 쳐다보았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성준은 약간 풀린 눈으로 철구를 보며 자신의 일인데 뭘 다시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 형님, 그 사고 전에 거기서 뭘 봤는지 말은 하지도 않은 채 인질극까지 벌였잖아요.
- 다시 말해 봐.
철구는 성준을 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그러자 성준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철구를 보며 말했다.
- 기억 안 나요? 그 때 총 맞았을 때 없어진 기억이 아직도 안 떠오른 거예요?
- 아니. 아니. 그 전에. 어디서, 뭘 해?
- 거기서 웬 여자 의사 붙잡고 인질극 벌인 거 몰라요?
철구는 그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어렴풋하게 보라색 나비핀이 떠올랐다. 철구의 예상 외의 반응에 성준은 술이 확 깼다.
- 무슨 일 있으세요?
철구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꿈, 기억,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인질극, 여자 의사, 보라색 나비핀.'
'여자 의사'에서 철구는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 성준아. 다음에 내가 진하게 한 잔 살게. 오늘은 미안하다.
철구가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하자 성준이 따라 일어나 철구 쪽으로 와서 말리려 했다. 그러나 말릴 틈도 없이 철구가 먼저 계산을 하고는 성준에게 손을 한 번 들어보이고는 나갔다.
- 전화 할게.
철구의 뒷모습을 보고 성준은 크게 소리쳤다.
- 몸 조심하십쇼. 형님!
성준은 자리에 앉아 놓인 소주잔을 들이켜고는 혼잣말로 지껄였다.
- 에휴. 불쌍한 형님. 소주 한 잔도 맘 놓고 못 먹네.
성준은 철구가 그렇게 잽싸게 나간 게 방금 들어온 테이블의 사람들 때문으로 착각했다. 그들은 테이블에 앉아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가 사람들을 모두 훑어보기 시작했고, 성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성준은 그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 마지막 잔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성준을 몰랐지만, 성준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동서의 형사들이었다. 철구에게 말한 것과 다르게 성준은 이미 정보과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 서울시 경찰들을 한 번 훑어보아서 알게 된 것이었다. 성준은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다음번엔 다른 장소를 섭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모금 빨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