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8화 (68/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2. 의뢰(1)

2. 의뢰(依賴)

철구는 ZEN 정신과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최세현. 의뢰를 받자마자 지난 밤 동안 그녀에 대한 정보를 찾았지만, 너무 평범했다. 도대체 뒷조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철구는 그런 그녀가 의심스러웠다. 삼 일이라는 시간동안 평소 같았으면 책 한권 분량의 정보를 모았겠지만, 이번에는 고작 A4지 열 장 분량 외에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그것도 정보라고 하기에도 무색한 출신 학교, 주소, 전화번호, 가족 관계, 은행 계좌 정보 등이었다. 채무 관계나 대인 관계는 전무(全無) 했고, 병적 기록조차 깨끗했다. 새마음 병원에 통원 치료를 하고 있긴 했지만, 워낙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철구는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철구는 뭔가 큰 것이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컴퓨터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기까지라면 이제 직접 부딪쳐 보는 것 외에는 없었다.

아내의 실종 때문에 치료를 받기 위해 대학 병원 정신과에 강제로 가보긴 했지만, 막상 정신과 앞에 오니 철구는 다른 때와 달리 조금 떨렸다. 철구가 가 본 대학 병원 정신과는 병원 특유의 포르말린 냄새가 배어 있었고, 분위기도 다소 음산했었는데, 여기는 마치 아이들 방처럼 밝고 화사했다. 여기가 정신과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깨끗하고 아늑했다.

- 진료 받으러 오셨나요?

프론트에 앉은 간호사가 철구에게 물었다.

- 네.

- 여기 인적 사항을 적으시고, 저기 대기실에 앉아 계세요.

철구는 인적 사항을 적는 용지를 보면서 멈칫 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일에는 철구는 꺼림칙했다. 철구가 쓰기를 주저하자 간호사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적기 곤란하시면 이따 들어가셔서 선생님께 말씀해 주셔도 되요.

간호사는 정신과라는 특수한 병원이기에 이런 환자들이 많았는지 철구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철구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철구가 앞에 놓인 신문을 펼쳤다. 의미 없이 신문을 보고 있을 때 아까 그 간호사가 철구 앞으로 와서 들어가라고 말을 했다. 철구가 문을 열자 잡지에서 보았던 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이쪽으로 앉으세요.

최세현은 엉덩이가 깊숙이 들어가는 편한 소파로 철구를 앉혔다. 철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 인적 사항을 안 적으셨네요?

철구는 갈등을 했다. 어차피 지금은 신분이 바뀐 상태이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왠지 그녀를 직접 보는 순간 자신을 꿰뚫는 듯한 눈동자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김한수입니다.

- 네. 나머지 사항은 직접 쓰셔도 되고, 아니면 지금 말씀하셔도 되는데요.

- 나갈 때 쓰겠습니다.

- 네. 그러도록 하세요.

최세현은 이런 부류의 환자들을 자주 보았는지 익숙하게 넘어갔다. 그녀는 새로운 차트를 펼치며 철구에게 물었다.

- 어디가 불편하시지요?

하지만 푹신한 소파와 최세현의 목소리로 인해 어느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듣기 좋게 낭랑했고, 믿음이 가는 청량함이 있었다.

- 악몽을 자주 꿉니다.

철구는 그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이러한 진료로 그녀에 대해 얼마나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정말 그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오늘밤이었기 때문이다.

- 악몽이요? 어떤 종류의 악몽을 꾸시지요?

철구는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겨우 두 가지 질문을 했음에도 그는 왠지 자신의 비밀이 벌써 밝혀지고,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예전에 박 형사와 함께 있을 때의 기분이었다. 지금 거짓말을 하면 그녀가 다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딱히 무섭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 무섭지 않은데 악몽이라니 조금 이상한데요?

- 그냥 그런 분위기를 싫어해서 악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주 반복해서 나오고.

- 반복된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내용이죠?

-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세현의 전화벨이 울렸다.

-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 휴대폰 액정에 정태 씨라고 떠 있었다. 세현은 철구에게 잠깐 눈짓을 하고는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보며 통화를 했다.

- 응, 정태 씨. 언제쯤? 그래. 그날 이후로는 꾸지 않았어. 그래도 늘 시간이야. 그리고 꿈도 같은 게 불안하고 찜찜하고 그렇지. 응, 지금 진료중이야. 조금 연락할게. 응 끊어.

철구는 세현의 길지 않은 통화 사이에 날카로운 눈매로 상담실을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앉아 있는 환자 의자 아래에 도청기를 잽싸게 붙여 놓았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세현이 동료 의사들과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아래에는 '1996 국제 학술회의'라고 쓰여 있었다. 철구가 보았을 때 세현은 10년 전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어떤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 죄송합니다. 좀 급한 전화여서요.

세현이 사과를 하며 의자에 앉자 철구는 자기의 귀에 얼핏 들렸던 내용을 물었다.

- 선생님도 무슨 꿈을 꾸시나 봐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세현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 네?

- 아니요. 제가 일부러 들은 건 아니구요. 들려서... 그냥...

- 아, 네... 제가 하는 일이 마음이 피곤한 분들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저도 마음이 피곤해 질 때가 있나 봐요. 그럴 때는 같은 계통의 동료들이나 선후배에게 진료를 받아요.

-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저처럼 같은 꿈을 계속 꾸기도 하나요?

- 뭐 저도 좀 그런 편이죠. 사람마다 다르지만 과거에 충격적인 일이 있거나, 무엇엔가 깊이 각인이 되면 무의식에서 꿈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기도 하니까요. 물론 아닐 수도 있구요. 흔히 말하는 개꿈이 우연히 반복 되는 걸 수 있지요.

- 하하. 의사선생님이 개꿈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어쩐지 우습네요. 하하.

- 개꿈은 개꿈이죠 뭐. 호호. 그런데 아까 꿈 얘기였나요? 이어서 계속 해 보세요.

세현의 말에 철구는 자신의 꿈 얘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솔직히 말한다고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철구는 사무실 주변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부드러운 진흙에 몸이 빠지는 것 같은 아늑함이 느껴졌다. 푹신한 의자가 자신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기분이었다.

-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한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말을 하고 있어요.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가운데에는...

여기까지 얘기를 하다가 철구는 말을 멈췄다. 그 때의 기억이 갑자기 너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모두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동자들이 가득 찼다. 그 가운데에 선명한 보라색 나비 핀을 꽂은 뒷모습이 보였다. 보라색 나비 핀의 여인이 자신을 돌아보자 철구는 깜짝 놀랐다.

- 헉....

철구는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세현을 보았다. 세현은 알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철구를 보고 있었다.

- 지독한 악몽이네요. 혹시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으세요?

세현은 마치 그의 꿈의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 저는 아직 다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그러자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다 말씀하셨어요. 최면 요법을 사용했거든요. 한수 씨는 최면에 아주 쉽게 걸리는 체질이신 것 같네요.

철구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시계를 보았다. 자신이 들어온 지 벌써 30분이나 흘러 있었다. 철구는 얼굴을 굳혔다.

- 최면 요법이요? 왜 말씀 안 하셨지요?

- 네? 저희 병원은 최면 요법 전문 진료 기관인데요? 들어오실 때 입구에서 보셨을 텐데요.

철구는 최면 요법 전문이라는 내용을 이미 보았다. 그리고 들어오면서 이미 최면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먹고 들어왔다.

-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 병원은 한수 씨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신답니다. 대개 그런 분들이 마음속의 병을 더 갖고 계시지요.

철구는 언제 자신이 최면에 걸렸었는지, 그리고 세현에게 어디까지 얘기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세현은 말을 이었다.

- 저는 악몽의 내용을 통해 그 사람의 심리 상태와 현재의 불안 요인을 찾는 일을 하죠. 최면의 상태에서 그 외의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한수 씨의 경우에는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겪은 일을 바탕으로 꿈을 꾸시는 것 같은데요? 그 악몽의 내용을 본인도 알고 계시겠지만, 무서웠던 경험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스트레스입니다.

- 경험이라뇨?

- 네. 본인의 경험이요.

- 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는데요.

철구는 딱 잘라서 말했다.

- 그렇다면 해리성 장애를 앓고 계신 것 같네요.

- 해리성 장애라뇨?

- 해리성 장애는 망각 장애라고도 하는데요, 본인이 잊고 싶은 기억을 잊는 거죠.

- 그 꿈이 제 경험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시지요?

- 음.. 그건.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만약 다른 기억에 의해 왜곡된 꿈이나 망상과 같은 경우에는 인물이 교차되거나 기억의 역전 등이 일어나 인과성이 많이 결여되지요. 그런데 한수 씨의 경우에는 어떤 서사 과정도 없이 한 부분만 극대화되어서 나타나는 경험에 의한 악몽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음... 제가 잊고 있던 경험이 꿈에서 나타나는 겁니까?

- 그럴 수 있어요. 대개 꿈이라는 것이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표출하기도 하지만, 본인은 잊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 그렇다면...

- 해결책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에요. 그 원인을 제거한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악몽은 자신의 기억이 억압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억압을 제거해야 되요.

- 네. 그렇군요.

-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보고요.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에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시겠어요?

철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 별 말씀을요.

철구는 세현에게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철구가 나가자 세현은 차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누구지? 왠지 낯익은 모습인데?

세현은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꿈에서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세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철구가 나간 문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얼굴과는 사뭇 달랐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몸집 등이 자신의 꿈의 남자와 아주 흡사했다. 세현은 차트에 오늘 상담내용을 기록하면서 철구가 마지막에 외친 말을 떠올렸다.

'너희들 다 부숴버리겠어.'

세현은 차트에 '관심대상' 환자 표시인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룬 문자의 '?(만나즈(mannaz))'를 표기했다. 그리고는 서랍 안에 차트를 넣었다.

밖으로 나온 철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벽에 붙어 있는 세현의 사진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 별 특이한 것도 없구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긴 게 어째 똑같네. 성형 수술이 무섭긴 무섭구나. 하나도 안 늙었네.

옆에 같이 탔던 여자는 철구를 흘끗흘끗 보더니 철구의 말을 들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엘리베이터 입구 쪽으로 옮겨갔다.

-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안 늙냐. 참 세월 좋구나.

철구의 중얼거림에 여자는 갑자기 뒤를 돌아 자신의 팔짱을 끼며 철구를 째려보았다.

- 내가 수술을 하건, 젊어지건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녀의 뜬금없는 반응에 철구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철구를 째려보며 말했다. 얼굴은 아직 수술 부기가 빠지지 않아서인지 약간 부어있었다.

- 네? 그게 무슨 말이죠?

- 뒤에서 나보고 늙었는데 수술을 해서 젊어졌느니 어쨌느니 그랬잖아요!

- 네?

- 당신 나 알아요?

- 모르죠.

- 그런데 왜 뒤다마 까고 지랄이에요?

철구는 어이없어 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옆의 간판에 12층에 있는 성형외과가 보였다.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변명을 하려 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여자가 먼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 별 개소리를 다 듣겠네. 이상한 놈한테.

철구는 무언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휙 가버리는 바람에 혼자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다 받아야 했다. 철구는 그러한 상황이 어색해서인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 나 참. 살다보니 별 거지같은 꼴을 다 당하는군.

철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하 주차장에 세운 차에 올라타서 시트에 등을 기댔다.

- 어이가 없어서... 참나. 고쳐도 못 생겼구만. 뭐.

철구는 그 여자를 잊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헤드폰을 끼고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도청기 수신 장치의 전원을 올렸다. '위잉'하는 잡음이 잠깐 들리더니 안에서 하는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철구는 능숙하게 증폭기를 조절하면서 소리를 녹취하기 시작했다.

- 성적(性的)으로 학대를 당한 과거의 기억이 오히려 본인의 성 정체성을 바꾸게 만든 것일는지도 몰라요.

처음 들린 소리는 세현이 누군가를 상담하는 내용이었다.

- 저는 그럼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철구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뭐라고 특정할 수 없는, 하지만 왠지 굉장히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였다.

- 그건 정신 치료를 받은 후에 결정하시면 되요. 지금은 본인이 여자라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거니까요.

- 그럼 다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나요?

-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임상 사례로는 정신적인 것이 해결되면 육체적인 것도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요.

철구가 들을 때에는 세현의 목소리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쇳소리의 목소리는 잠시 훌쩍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의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치료받을 게요.

- 잘 생각하셨어요. 자세한 스케줄은 밖에 나가서 잡으시면 되요.

- 감사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 다음 환자는 20분 후에 들어오라고 하세요.

철구는 옆에 놓인, 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 때 세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정태 씨? 응. 지금 잠깐 쉬는 시간. 시간 괜찮아?

철구는 감으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 오늘 오전 진료밖에 없어. 이따 점심 때 어때? 안 돼?

세현은 한참 침묵하다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 이상한 일이 있어서 그래. 아까... 환자 중에 꿈에 나타난 사람을 본 것 같아서. 그냥 예민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그 사람인 것 같았어. 물론 정신 분석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알고 있지. 데자뷰(Deja-vu)일 수도 있고, 그냥 이미지가 비슷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아는데, 아까 진료 끝나고 문득 떠오는데 깜짝 놀랐어. 아무튼 그럼 내일 오후에 봐. 응. 끊어.

세현의 대화를 엿듣던 철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 이 여자 돌팔이 아냐? 어디서 본 게 꿈이라고? 별 희한한 여자 다 보겠네.

철구는 더 들어볼 것 없는 얘기를 한 시간이나 더 듣고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곳에 있어봤자 더 얻을 게 없어보였다. 철구는 수첩을 보고는 세현의 집 주소를 확인했다.

- 여기도 한 번 가봐야겠군.

철구는 차를 몰고 세현의 집을 향해 갔다. 세현의 아파트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아파트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가방을 하나 메고 세현이 사는 아파트 동 입구로 올라갔다. 철구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 세현의 집 앞에 섰다. 그리고는 마치 문을 고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비밀번호 자물쇠에 기기를 연결하였다. 그러자 기기에는 숫자가 바뀌다가 '띠리릭'라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 기가 막히군.

철구는 그의 정보원인 재포가 만들어준 기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재포는 옛날에 가택 침입을 했던 그를 잡았을 때, 정보원으로 삼기로 하고 풀어준 녀석인데, 자물쇠란 자물쇠는 모두 딸 수 있을 만한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놈이었다. 재포에게는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하고는 몰래 자물쇠를 딴 자신의 모습을 보자 철구는 피식 웃음이 났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철구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앞에서 철구는 복면을 뒤집어썼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가택 침입 시에는 항상 복면을 쓰라는 충고 때문이었다.

- 깨끗하군.

안으로 들어간 철구는 거실을 살펴보았다. 철구는 창가에 놓인 소파를 보고는 그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소파 바닥에 작은 도청기를 설치했다. 그리고 부엌 쪽으로 가서 식탁 아래에 도청기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거실로 나와 책장을 훑어보았다. 정신과 관련 책과 소설책 몇 권, 시집 몇 권, 그리고 상장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흔한 가족사진조차 보이지 않았다. 책장을 몇 번을 살펴보았지만 앨범 하나 보이지 않았다.

- 참 나. 고안가? 뭐 이렇게 아무 것도 없어.

침실 쪽으로 걷던 철구는 미세한 기계음을 듣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열려있는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 기계음이 다시 들렸다. 철구는 침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조그만 기계를 켰다. 잠시 깜빡거리던 기계의 화면은 침실 쪽 방향으로 화살표가 나왔다.

'침실에 몰카?'

철구는 누군가가 세현의 침실에 몰카를 설치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 뭐야?'

침실에 몰카를 설치한다는 것은 뭔가 은밀한 것을 촬영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자신이 설치했다면 변태일 것이고, 다른 사람이 설치했다면 그녀의 은밀한 사생활을 훔쳐보기 위한 것일 것이다. 몰카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섣불리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철구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발을 돌렸다. 만약 본인이 설치한 것이라면 자신의 침입 사실을 알아 챌 테고, 만약 다른 사람이 설치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침입 사실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철구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와 차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뭐지? 변태야? 아니면 스토커? 미치겠군. 혹시 노인네가?

철구는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몇 시간 남아 있었다. 철구는 ZEN 신경정신과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주차를 하고는 시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자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철구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한 번 켜고는 건물 앞으로 다가 갔다. 낮에 보았던 환하던 건물이 마치 검은 천을 휘어감은 마녀처럼 보였다. ZEN 신경정신과가 불이 꺼진 것은 고작 10분 전이었다. 세현이 문을 잠그고 나가는 모습을 철구는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 늦게도 나가는군. 오전 진료밖에 없다면서 뭘 저렇게 늦게까지 있는 거야.

세현의 뒷모습을 보고 철구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경비실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라는 걸 아까 방문 때 알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철구는 능숙하게 세현의 진료실 문을 따고 들어갔다. 그리고 세현의 문 앞에서 몰카 확인기를 켰다.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철구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아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책장과 서랍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세현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찾지 못했다.

- 참나, 어떻게 저 사진들 말고는 사진 한 장이 없는 거야.

철구는 플래시를 켜고 두 장의 사진에 사진을 찍었다. 그런 후 철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 젠장. 뭐라고 얘기해야 되는 거야?

밖으로 나온 철구는 투덜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세현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 정말 파면 팔수록 이상한 여자일세...

철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철구는 사무실 쪽으로 향해 운전대를 틀었다. 사무실이 있는 시장통 안에 있는 20년이 넘은 건물은 아주 흉물스러웠다. 시장 안 다른 건물들은 리모델링을 하거나 새로 지어서 깨끗한 것에 비해 그 건물만은 처음 지어진 그대로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건물 입구도 매우 좁았고, 계단은 빛이 들지 않아 몹시 어두웠다. 그 어두운 건물 안에서도 복도를 따라 제일 끝부분까지 가면 페인트로 대충 휘갈겨 쓴 '제일 흥신소'라는 간판이 보였다. 시장 특유의 흥청거림과는 다르게 건물 안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나 조용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 안은 바깥보다 더 흉측하였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더러웠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 그리고 낡은 소파와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치우지 않은 컵라면 용기와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재떨이가 보였다. 한 쪽 구석에는 온갖 쓰레기가 놓여 있었고, 그 너머에는 조그만 쪽문이 하나 있었다. 쪽문 안에는 허름한 행거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몇 벌 안 되는 사계절 옷이 모두 걸려 있었다. 철구는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문 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뭐 특별한 건 없더라구요. 자세한 건 서류로 보내겠지만, 살면서 이렇게 정보가 없는 사람은 처음이유. 흔한 사진 한 장도 없고. 뭐. 일단 제가 알아낸 정보로는, 뭐 이게 정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악몽을 꾸나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같은 계통의 의사한테 오늘 저녁때 상담을 받으러 갈 예정이구요.

한편 철구의 전화를 받은 무영은 스피커폰을 켠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강현은 의자 깊숙이 몸을 넣고 눈을 감은 채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 그것뿐입니까? 또 다른 사항은 없습니까?

- 저도, 돈 받고 일 하는 처지에 좀 더 말씀 드리고 싶지만 딱히 중요한 게 없네요. 특이 사항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1996년 학술대회 때 찍은 사진을 한 장 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생긴 게 똑같더군요. 얼굴에 돈을 많이 들이는 여잔가 봅니다. 하하.

철구의 말에 강현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볼을 씰룩거렸다. 무영은 강현의 표정을 보았다.

- 알겠습니다. 그런 특이사항이라도 놓치지 말고 보고해 주세요.

- 네? 뭐 그런 정보야 그냥 얻을 수 있는 건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철구와의 통화가 끝나자 무영은 강현을 향해 눈을 맞췄다. 무영을 보고 강현은 고개를 끄떡였다.

-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무영이 그렇게 대답하고 나가자 강현은 탁자 위에 놓인 잡지에 있는 세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저... 정말 당신이었소?

아무도 없는 방에서 강현은 혼자 사진을 향해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