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7화 (67/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1. 악몽(3)

회백색 건물은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흔한 페인트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회백색 외벽을 그대로 드러낸 채 주변의 푸르른 녹음을 좀먹고 있었다. 그 앞에는 썩은 내가 나는 좁은 도랑이 흘렀고, 거기에는 알 수 없는 이물질들이 가득했다.

- 꺄악!

- 으... 으...

건물 안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통에 절규하는 소리와 무언가 밖으로 내뱉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목소리가 거푸 들려왔다. 좁은 통로에는 흐릿한 백열전구가 깜빡거렸고, 양쪽으로는 조그만 창살이 붙은 두꺼운 쇠 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에는 한 사람씩 들어가 있는지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멀리서 비명 소리만이 울림이 되어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한 창살 안을 들여다보니 비쩍 마른 채 머리에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는 사람이 몸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 이 놈이다.

두 명의 병사는 그 사람을 발로 툭툭 건드리다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양 옆에서 부축을 해 밖으로 끌고 나왔다.

- 이 개같은 조센징이 선동을 하여...

복도에는 일본 장교가 화가 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해 대고 있었다. 두 명의 병사는 그를 끌고 문 밖으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그 뒤에는 군인들이 총을 겨눈 채 뒤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 비쩍 마른 조선인이 운동장 한가운데로 다가오자 뒤에서 한 명의 병사를 앞으로 끌어냈다.

- 원강현!

한쪽에 서 있던 강현은 엉거주춤하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에게 옆에 있던 군인 한 명이 피가 엉겨 붙어 있는 더러운 몽둥이를 건네주었다.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다. 바닥에 누워 있는 힘없는 조선인이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등 뒤를 찌르는 날카로움을 느꼈다. 강현은 얼이 빠진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일본인 병사 하나가 비릿하게 웃으며 금방이라도 대검으로 그를 찌를 듯이 노려보았다. 강현은 어쩔 수 없이 두 손이 벌벌 떨며 몽둥이를 들어 올렸지만 쉽게 내리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느껴지는 목 뒤의 서늘함.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눈을 질끈 감고 몽둥이를 내려쳤다. 한 번, 두 번 헛손질을 하다가 결국 조선인의 머리에 명중했다. 무언가 물컹한 것이 그의 손끝에 닿자 강현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몽둥이를 내려쳤다. 으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러나 강현은 눈에 광기를 띠며 연신 조선인을 향해 몽둥이를 내려쳤다. 이미 목숨이 끊어진 조선인의 시체에 계속 몽둥이질을 하다가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강현의 눈에 뒤로 도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그녀가 뒤로 돌아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보라색 나비 핀이 눈에 들어왔다.

- 하.. 하나꼬(花子) 소..

강현의 입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것은 그녀가 아니라 보라색 나비 핀이었다. 그 나비 핀은 점점 커지면서 괴물로 변하였고, 쓰러진 강현을 향해 덤벼들었다.

- 그러지 마... 아니야. 난 아... 으.. 으악....

원강현(元康賢) 회장은 악몽에서 깨어나며 소리를 쳤다. 이미 오래 전 일임에도 꿈속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 상태였다. 이마의 땀을 닦고 심장을 부여잡고 있을 때 무영이 들어왔다.

-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원 회장은 머리맡에 있는 물을 마시며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방금 전 꿈에서 본 영상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미안하네. 자고 있었을 텐데.

- 아닙니다. 엄 박사님 부를까요?

- 아니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저기 있는 심장 약하고 수면제 좀 가져다주겠나?

무영은 탁자로 가서 약을 들고 왔다. 원 회장은 약을 먹고 누우면서 말했다.

- 한 동안 보이지 않더니 다시 시작 됐어. 그런데 전보다 더 선명해. 더 강해졌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가? 아직 죗값을 다 치르지도 못했는데... 아직은 할 일이 남았는데 말이야... 허허.

그러다가 무영을 보고 물었다.

- 내가 알아보라고 한 일은 어떻게 됐나?

- 네. 실력 있는 사람을 한 명 구해서 내일 이리로 오기로 했습니다.

- 그래. 알겠네. 나 때문에 자네가 고생이 많네. 가서 좀 쉬게.

-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잠드시면 나가겠습니다.

- 자네도 피곤할 텐데 쉬게나.

- 전 괜찮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무영은 원 회장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앞에 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잡지를 살펴보았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최세현.'

- 이 여자가 누구길래...

방무영(方無影)은 원 회장이 어릴 적부터 키워온 자식같은 존재였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원 회장은 무영을 자신의 후계자로 이미 정하고 있었다. 무영 역시 어렸을 때 고아원에 버려진 자신을 데리고 와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게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도움을 준 원 회장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원 회장은 그에게 아버지이자 후원자이자 주군이었다. 원 회장이 살인을 하라고 하면 서슴없이 저지를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의 이름인 무영(無影)은 사실 그의 본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본명보다 무영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그에게 맡겨진 어떤 일이든 흔적없이 처리했기 때문에 그를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고 하여 그를 사람들이 무영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은 '무영'이 된 것이었다.

지난 밤 원 회장은 다급하게 한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해 오라고 했다. 그 사람이 바로 정신과 전문의 최세현.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중국에서만 살던 원 회장이 한국인이면서 30대 초반의 젊은 여의사에게 갑자기 호감이라도 생긴 걸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무영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30년 동안 원 회장 옆에 있었지만, 원 회장은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류 탤런트가 접대를 해도 원 회장은 매너 좋은 회장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오던 그가 갑자기 예쁘기는 하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은 정신과 여의사에게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원 회장은 원보(元寶)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는 것에 모든 역량을 다해왔다. 물론 그 안에서 위법과 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하긴 했지만, 무영이 곁에서 지켜본 원 회장은 전 세계 어느 기업인보다 성실하고 유능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특히 정?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나 기업인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원 회장은 신사였다. 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다 알고 있는 무영은 그를 부처가 현신(現身)한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원보 그룹같은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면서 그렇게 깨끗하게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최세현'이라는 여자를 조사해 보라고 했을 때 무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업인이나 정치인 뒷조사도 아닌 일개 정신과 여의사, 그것도 한국인을 조사하라는 것은 원 회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영은 단순히 이 여자가 원 회장의 악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을 짐작할 뿐이었다.

원 회장이 낮게 코를 골자 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잡지의 펼쳐져 있는 여의사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무영은 어지간한 일이면 자신이 나서서 조사를 하고자 했으나 미국과의 계약 문제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아는 루트를 통해 흥신소 중에서도 실력이 있는 사람을 섭외해서 붙여 놓았던 것이었다.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든 무영은 무언가에 놀라 화들짝 깨었다. 침대에서 자던 원 회장은 이미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무영은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

원 회장은 소파에 앉아서 여성 잡지의 한 페이지에 ZEN 심리 치료 센터 최세현에 대한 기사를 다시 읽고 있었다. 현대인들의 신경증과 주부 우울증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보는 것은 잡지 기사가 아니라 그 여인의 사진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한참 보다가 옆에 놓인 금고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에서 유독 한 사람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는 사진을 다시 금고에 넣었다. 원 회장은 무심히 눈을 감고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회장님. 죄송합니다.

무영이 밖으로 나와 원 회장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원 회장은 오히려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 자네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만. 미안허이.

- 아.. 아닙니다. 제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서..

- 아니야. 아니야. 이 늙은이가 욕심이 많아서 자네를 붙잡고 놔주질 못하는 거지.

원 회장의 말에 무영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원 회장은 무영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 강철구라고?

- 네, 전직 형사라고 하는데, 신원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바닥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 음.. 그렇군. 보고서 봤네. 잘 찾아냈어. 우리 일에 도움이 될 거야. 언제쯤 오지?

무영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대답했다.

- 조금 있다가 도착할 것입니다.

- 그래. 그럼 우리 아침 식사라도 하지.

두 사람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방은 초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두 명의 요리사가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식탁에 원 회장과 무영이 앉았다. 아침 식사라고 하지만 무영의 앞에는 아침 식사로는 과할 만큼 화려한 상차림이었고, 원 회장 앞에는 거친 보리밥에 간장과 김치만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모두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신경쓰지 않았다. 무영은 별 맛을 못 느끼고 먹는 듯 했다. 그러나 원 회장은 보리밥 위에 김치를 얹어가며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밥 알 하나하나가 소중한 것처럼 꼭꼭 씹어가며 먹었다. 무영은 그런 원 회장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회장님. 이제는 식사를 제대로 하셔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정도 세월이면 충분히...

그러자 원 회장은 눈빛이 돌변하면서 말했다.

- 안 될 말일세. 평생 하루 세끼를 이렇게 먹어도 다 갚지 못할 일이네. 겨우 한 끼만 이렇게 먹는 것도 죄를 더 하는 것 같아 괴로워.

원 회장의 말에 무영은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러자 원 회장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마디 툭 던졌다.

- 밥 먹자.

무영은 그런 원 회장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업보이기에 저런 분이 고행(苦行)을...'

무영은 원 회장과의 아침 식사 때면 항상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난 밤 원 회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때, 처음 만난 30년 전 강인하고 의지에 넘치던 얼굴이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원 회장에게 이번 일이 어쩌면 죽음을 앞둔 마지막 거사(巨事)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해 가는 원보 그룹 회장에게 모든 일을 제치고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기업보다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원보 그룹과 관련된 계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빠져 있지만, 그 일만 마무리되면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쩐 일인지 항상 막히던 강변북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그 위를 빠르게 달리는 차들 옆으로 낡은 승합차 한 대가 골골 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여기 저기 찌그러져 있었고, 범퍼도 많이 상해 있었다. 헤드라이트 덮개는 깨진 지 오래되었는지 먼지가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긁힌 자국은 녹이 슬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낡은 점퍼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넘기고 있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까칠한 수염을 차에 연결한 전기면도기로 밀면서 달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버려진 담뱃갑이며, 햄버거 싸개, 생수병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리며 '한수 형'이라는 이름이 떴다. 철구는 전화를 면도기를 놓고 전화를 받았다.

- 지금 가고 있어. 어제 술 먹었다고 늦을까봐 전화한 거야?

- 아니, 그건 아니구. 그리구 너는 꼭 말을 해도 정 떨어지는 소리만 하냐?

- 형이랑 정들어서 뭐하게. 지금도 이렇게 재수가 없구만.

- 이 자식이. 너 장비 구입비 주려구 전화했어. 임마.

- 어? 웬일이야? 형이 먼저 장비 구입비 얘기를 꺼내고.

- 그니까. 지금 이리로 오지 말고 삼성동으로 가라. 거기 가면 누구 한 명 뒷조사 해달라고 할거야. 그것만 해주면 니 장비 구입비랑 내 전세금 해결된다.

한수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그러나 철구는 뭔가 냄새가 난다는 듯이 말했다.

- 그거 이상한데? 뒷조사 치고 너무 많이 주잖아. 찜찜해. 하지 말자.

그러자 한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야!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냐? 그리고 일단 가서 들어보고 결정해도 되잖아.

- 그럼 형님이 직접 가면 되잖수?

철구의 말에 한수는 미적거리며 말했다.

- 거기서.. 뭐랄까 직접 일할 사람 한 명만 오라고 해서...

- 에? 그럼 형은 이 일에서 빠지는 거유?

- 빠지다니. 나는 뒤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한수가 한바탕 말을 늘어놓으려 하자 철구가 말했다.

- 그럼 이 일은 나 혼자 하는 거니까 나 혼자 먹어도 되는 거군.

그러자 전화기에서 불쌍한 목소리가 들렸다.

- 내가 일을 따 왔잖아. 그리고... 우리 집 주인이 전세금 올려달라고 해서.. 나 전세금 못 올려주면... 우리 애랑.. 집사람이....

철구는 전화기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알았어. 알았어.. 거 우는 소리 좀 하지마쇼.. 맨날 수연이랑 형수 핑계만 늘어 가지구...

전화를 끊은 철구는 이번 의뢰에서 묘하게 심한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마치 예전에 박 형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철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얼굴이 굳어졌다. 수소문 끝에 알아낸 박 형사의 딸에게는 매달 생활비조로 일정한 금액을 보내주고 있었지만, 철구는 그런 것으로는 마음의 빚이 줄지 않았다. 더욱이 아직까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또 한 사람인 임 박사는 가족들마저 행방이 묘연하여 철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철구는 가속 페달을 밟아 속도를 높였다. 삼성동까지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금방이었기에 철구는 의뢰인 집 앞에 빠르게 도착했다. 도착해서 쳐다본 의뢰인의 거대한 저택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거대한 대문은 둘째 치고라도 자신이 걸어온 담벼락은 자신의 빠른 걸음으로도 2분이 넘는 길이였다. 이 정도로 넓은 집은 서울 땅에 갖고 있으려면 얼마나 부자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나 참. 집 한 번 드럽게 크네. 도대체 이런 집에는 어떤 인간들이 사는 거야?

철구는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 위에 CCTV 카메라가 움직이며 자신을 잡았다. 철구가 자신의 이름을 대자 거대한 대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철구는 안으로 들어가며 정원을 두리번거렸다.

- 그래, 뭐 까짓 거 들어 보구 아니면 말고...

철구가 안으로 들어가자 현관 문 앞에 무영이 서 있었다. 그리고 철구를 응접실을 지나쳐 원 회장의 서재로 이끌었다. 그 안에는 파이프를 문 노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철구는 그의 모습에서 위압감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철구에게 원 회장 앞의 자리로 안내한 후 무영은 원 회장 옆에 섰다. 그러자 원 회장이 무영에게 말했다.

- 자네도 앉게나.

원 회장이 말했지만, 무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서 있는 게 편합니다.

그러자 원 회장은 고개를 돌려 철구를 보았다.

- 얘기는 들으셨나요?

나이 지긋한 회장의 정중한 말에 철구는 저절로 공손한 자세가 되어 대답했다.

- 누굴 찾으라는 것만 들었습니다.

그러자 원 회장은 고개를 끄떡이더니 철구 앞에 잡지를 펼쳤다. 철구는 그 잡지에 나온 여자를 보았다.

- 저의 오랜 친구의 딸이랍니다. 그 아이가 어찌 사는지 좀 알아봐 주십시오. 친구가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그 아이에 대해서 좀 알고 난 후에 내가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러고는 무영을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 자세한 얘기는 이 친구가 해 줄 겁니다.

철구는 원 회장을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굳이 저한테 이런 일을 의뢰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말에 원 회장은 잠시 침묵을 하다가 대답했다.

- 그냥, 직접 나서기 곤란한 일이라고만 알아주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철구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불순한 의도로 시작하신 일이라면 중간에라도 그만 두겠습니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의뢰인 측에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받은 금액은 돌려드리지 않습니다.

철구의 말에 원 회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러시죠. 결코 불순한 의도는 아니니 걱정 마시오.

- 알겠습니다.

철구는 무영과 정원을 같이 걸었다. 무영은 정원으로 나올 때까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 무영 옆에서 철구는 어색하게 같이 걸을 뿐이었다. 무영은 정원 구석에 있는 나무 아래 정자에 앉았다. 철구가 자리에 앉자 무영은 입을 열었다.

- 조사하실 내용은 현재 최세현 씨와 관련된 모든 것입니다. 누굴 만나는지,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병'을 앓고 있는지 말입니다.

무영의 말에 철구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 홀딱 까발려 드리죠.

무영은 철구의 말투가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다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 착수금입니다.

철구는 금액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말한 금액이 맞는지 궁금했지만, 무영이란 사람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일을 마무리하면 그 금액의 두 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즉시 보고해 주십시오. 정기적으로는 매일 한 번씩 저녁 6시에 보고해 주십시오.

철구는 한 쪽 귀를 파며 귀찮은 듯이 말했다.

- 그러시죠.

철구는 전화기에 무영의 전화번호를 입력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택에서 나온 철구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돈 봉투를 꺼내 보았다. 삼천만 원짜리 수표를 보고 철구는 깜짝 놀랐다.

- 뭔가 냄새가 나는데. 아무리 돈이 많아 돈지랄을 해도 이런 일에 이정도 돈은 수상해.

철구는 휴대폰을 꺼내 한수에게 전화를 했다.

- 어이 한수 형!

- 어떻게 하기로 했어?

한수는 다짜고짜 철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철구는 그 말을 무시하고 자기 말을 먼저 했다.

- 근데, 이 일 어떻게 맡은 거야?

철구의 말에 한수는 머뭇머뭇 거리다가 말을 했다.

- 그게 말이지. 그건... 내가 워낙 인맥이 넓잖냐!

- 헛소리 말고.

- 어허. 이 자식이.

- 빨리 말해.

- 그게.. 에라 모르겠다. 어젯밤에 전화가 한 통 왔었어. 단도직입적으로 널 찾더라구.

- 나를? 나를 어떻게 알고?

- 그야 나도 모르지. 아무튼 일 맡기로 했어?

- 나를 어떻게 알았지?

철구가 곰곰이 생각에 잠기자 한수는 안달이 나서 재차 물었다.

- 그래서 그 일 맡기로 했냐구?

한수의 말에 철구는 가타부타 대답없이 말했다.

- 일 끝나면 두 배 더 준다는데 어째 찜찜하네..

- 맡기로 했구나?

철구의 반응에 한수는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 착수금은 너 써.

한수는 금액이 얼마인지도 묻지 않은 채 '두 배'를 더 받는다는 말에 착수금을 순순히 넘겼다. 그리고 나서 죽는 소리를 시작했다.

- 그 일 성공해야 된다. 나 전세금도 오르고, 우리 딸 학원비도....

한수의 말에 철구는 짜증이 나서 대답했다.

-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돈 벌면 형, 집부터 사준다. 그놈의 전세금 타령은 아주 평생이야.

무영이 서재로 들어오자 원 회장은 골똘히 잠겨 있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 갔냐?

- 네.

- 무영아, 네가 저 사람을 좀 도와줘야겠다.

- 네. 알겠습니다. 미국과의 일이 끝나는 대로 바로 저도 착수하겠습니다.

원 회장은 입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 내 생각이 맞는다면 저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면 알수록 저자의 목숨 줄도 위험할 거야. 저자가 일을 끝낼 수 있게 네가 잘 도와야 한다.

- 알겠습니다.

- 필요하면 중국에 연락을 넣어서 몇 명 불러다 쓰도록 해.

- 이 일에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러나 원 회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 이 일은 어려운 일일 거야.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일들의 끝이거나 진정한 시작일 수도 있지. 중국에는 내가 연락을 넣으마. 그쪽 사람들이 오면 함께 움직이도록 해.

- 네. 회장님.

- 각별히 몸 조심해야한다.

원 회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눈꺼풀이 떨리며 눈꼬리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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