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1. 악몽(2)
고려 호텔 입구는 여느 호텔보다 화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초의 6성급 호텔로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개 부유층 아니면 고급 관료들 혹은 유명 연예인들이었다.
출입 역시 VIP 회원권을 끊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철저한 관리로 유명인들 사이에서 이곳은 은밀한 사생활부터 중요한 회의까지 다 할 수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곳의 사방 50m 이내는 사설 경호원들이 은밀하게 돌아다니며 수상한 사람을 색출했고, 이곳에 들어오는 입구 역시 정문이 아닌 곳으로 들어올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다른 건물의 지하 입구부터 이어진 곳도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정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정상적 업무'를 위한 사람들뿐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그 호텔 정문으로 BMW가 들어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로비에 있던 벨보이가 얼른 달려와 발레 파킹을 하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 찰칵! 찰칵!
구석 화단에 숨어서 이 모습을 사진 찍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마치 차에서 내린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지 연신 사진기를 눌러댔다. 그런데 그의 앞에 검은 바지가 우뚝 섰다.
- 어?
사진을 찍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쓴 건장한 남자가 빙긋이 웃으며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사진을 찍던 남자는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옷을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건장한 남자를 쓰윽 한 번 보았다. 그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사진을 찍은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씨익 한 번 웃더니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 너무 노골적인데.. 흐흐흐..
남자가 손 위에 이만 원을 올려놓자 선글라스 남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었다.
- 뭐하시는 겁니까?
- 모자라요? 에이... 사진으로 먹고 사는 놈한테 너무하는군.
사진기를 든 남자는 지갑을 꺼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더 꺼내고 남자를 보았다.
- 에잇.. 기분이다. 자 삼 만원 더! 더는 안 돼요!
남자의 손에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놓였다. 그러나 선글라스 남자는 만 원짜리를 땅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 카메라 내 놓으시라구요!
사진기를 든 남자는 돈을 집어 던지자 얼른 땅에 엎드려 돈을 줍고 있었는데, 위에서 되지도 않는 소리가 들렸다.
- 안 돼! 이 사진기가 얼마짜린데. 눈감아주는 데 사진기는... 이거 순 도둑놈이네.
사진기를 든 남자가 카메라를 품에 안자 선글라스 사내는 완력으로 그의 품에서 카메라를 빼앗았다. 그러더니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뽑고는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 여기는 사진 촬영 금지 구역입니다.
남자의 말에 사진기를 든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화를 내며 말했다.
- 금지 구역? 법으로 정해졌어?
남자의 말에 선글라스의 사내는 그의 옆에 있는 간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 여기 읽어보시면 나옵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가 선글라스 사내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 아! 여기 있군. 그런데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사진기 사내는 비굴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러나 선글라스 사내는 완강하게 거부하며 말했다.
- 안 됩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시죠.
- 일 주일만에 찍은 거에요. 팬들도 그 분 소식을 궁금해한다구요.
- 아무튼 여기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 아 참. 빡빡하시네.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잖아요?
- 저희 호텔 정문을 통과하시는 순간부터 저희 고객이시기 때문에 저희는 그 분의 프라이버시를 지켜드려야 합니다.
그러자 사진기를 든 남자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 나도 정문을 통과했는데, 손님 아니오!
선글라스 사내는 비웃듯이 말했다.
- 회원권이 없으신 분은 불청객입니다. 이제 나가 주십시오.
사진기의 남자는 툴툴거리며 정문 쪽으로 걸었다.
- 나 참. 더러워서. 뭔 호텔이 이리 거만해. 호텔에 금칠이라도 해 놨다.
사진기의 남자는 큰 소리로 떠들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 젠장. 호텔에서 하는 짓이야 붕가붕가밖에 더 있어? 붕가붕가하는 곳이 뭐 이렇게 거만해.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자 선글라스 사내의 얼굴이 빨개졌다.
- 조용히 가주십시오.
선글라스 사내의 말에 사진기 사내는 버럭 화를 냈다.
- 내 입으로 내가 떠들겠다는 데 뭐가 잘못이야? 나 참 더러워서. 호텔에서는 붕가붕가 소리만 나야 되나? 그럼 나도 끙끙거리며 나가지. 끙... 끙..
그의 말에 선글라스 사내는 사진기 사내를 뒤에서 살짝 밀었다. 빨리 가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가 밀자 사진기 사내는 앞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 어? 이제 붕가붕가하는 곳 지키는 놈이 사람도 치네? 아이고.. 나 죽네...
사진기 사내가 넘어져 죽는 소리를 하자 정문 밖을 걸어가던 사람들도 안을 넘어다보았다. 선글라스 사내는 민망해하며 사진기 사내를 부축하느라 허리를 숙였다.
- 이제 그만 하시죠.
선글라스 사내는 목소리를 낮춰 협박조로 말을 했다.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눈은 살기로 빛났다. 사진기 사내는 그 눈빛에 쫄아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아.. 네.. 그.. 그러죠.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정문 밖으로 나왔다. 정문 앞에는 안의 소란 때문인지 몇몇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그가 나오자 모두 한 번씩 웃으며 지나갔다.
사진기 사내는 그런 사람들에게 오히려 한 번 웃어주며 담벼락을 따라 부리나케 뛰었다. 그런데 그 때 안에서 선글라스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
- 야! 임마. 너 거기서. 안 서?
그 소리에 사진기 사내는 더욱 빨리 뛰었다. 그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는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달렸다. 건물들 사이로 들어갔다.
- 한수 형, 바쁘신가 보네요.
핸드폰에서는 뭔가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이 자식. 지금 약올리냐? 헉헉... 얼른.. 얼른 와서 도와줘!
사진기 사내는 헉헉거리며 뛰었다. 그러자 핸드폰에서는 또다시 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일이 우선이라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먼저 번에 주거 침입으로 유치장에 있을 때도 제 전화도 안 받으시고 일 보셨으면서... 그래도 전 그래도 전화는 드리잖아요.
사진기 사내는 숨을 헉헉거리며 서두르며 말했다.
- 헉, 헉, 야, 너 정말 이럴래?
그러자 핸드폰에서는 후후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렸다.
- 왼쪽으로 돌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오른쪽, 오른쪽으로...
- 오른쪽? 알았어...
사진기 사내는 오른쪽 골목으로 돌았다. 그런데 그 곳이 막다른 곳이었다. 사진기 사내의 뒤를 몇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따라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섰다. 선글라스 사내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사진기 사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진기 사내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 야 이 새끼! 너 정말 뒤질래?
이 말에 선글라스 사내는 얼굴이 벌게지며 사진기 사내 앞으로 다가왔다.
- 뭐? 당신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 아.. 아니요.. 그게...
- 이 자식... 넘어지는 척하면서 주머니에서 메모리를 빼 가?
선글라스 사내는 사진기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사진기 사내는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 죄... 죄송합니다. 저.. 이.. 이것 놔주시면...
그러나 선글라스 사내는 멱살을 풀지 않은 채 주변의 사내들에게 눈짓을 했다.
-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주변의 사내들이 다가와 사진기 사내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 있는 메모리카드를 빼냈다.
그러자 선글라스 사내는 내팽개치듯 사진기 사내를 구석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땅을 향해 침을 뱉으며 말했다.
- 오늘은 이 정도만 한다.
사진기 사내는 구석에 처박히며 '아이구구'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비볐다.
- 아.. 씨발... 존나 아프네..
고려 호텔 옆문으로 한 사내가 호텔 종업원 복장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옆문을 따고 들어갔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가방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쪽 구석에 놓여 있는 카드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옆의 로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눈으로 체크했다.
고려 호텔 로비에서 멈춘 택시 한 대. 고려 호텔에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택시에서 내린 여인의 모습 또한 평소에는 보기 힘든 외모였다.
빨간색 스커트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쓴 채 당당히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옆문 안쪽에 있던 남자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엘리베이터에 그녀와 같이 올라탄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 역시 그와 눈이 마주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서자 여자는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잠깐 멈추고 그녀가 들어가는 방 호수를 살펴보았다.
- 708호.
남자는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708호 안에는 먼저 들어갔던 유부남 배우가 있었다. 그는 어느새 샤워를 마쳤는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 왔어?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남자는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 올라오는데 기분 나쁘게 종업원이 같이 탔어. 창피해서...
그 말을 듣자 남자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 종업원 교육이 엉망이군.
그러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여자가 얼른 제지하며 말렸다.
- 하지 마. 우리 여기 왔다는 거 다 알릴 일 있어?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알면 어때? 이제 나도 곧 이혼할 건데 뭐.
그러자 여자는 새침한 표정으로 남자를 째려보았다.
- 그 말만 벌써 1년째인 거 알아?
- 이번엔 진짜야.
- 근데 왜 정문으로 오라고 했어? 여기 뒷문 쪽이 더 안전하잖아.
- 전에 김 기자라고 말했지? 그 녀석한테 전화가 왔더라구. 전에 경주에서 파파라치가 나랑 비슷한 남자가 호텔 뒷문으로 들어가는 걸 찍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더라구.
- 경주? 아! 거기 지저분한 데?
- 응. 그리고 이 호텔 뒷문 쪽에는 사진 찍는 놈들이 많다네. 워낙 고위급들이 다니니까. 경비원들 손길도 안 닿고. 그리고 마침 이따 세 시 쯤에 영화 관계자들하고 미팅이 있어서. 타이밍도 딱이지.. 하하하.
남자는 음흉하게 웃으며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
- 나도 좀 씻고 올게.
여자가 사워실 안으로 들어가자 남자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여자는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방 호텔 가운을 입고 나왔다.
- 하! 역시 빨라.
남자는 그녀가 머리에 물을 털며 나오고 있을 때 남자가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 우리 이쁜이... 오늘 많이 예뻐해줘야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고, 여자는 그런 손길이 싫지 않은지 남자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가운을 벗기려고 할 때 벨소리가 들렸다.
- 아.. 뭐야!
하며 남자는 문 앞에 있는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밖에는 호텔 종업원이 서 있었다.
- 뭐야?
남자가 거칠게 묻자 호텔 종업원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 룸서비스입니다.
- 룸서비스? 우리 그런 거 시킨 적 없어.
남자는 짜증난다는 듯이 인터폰을 끊으려했다.
- 아! 오늘이 저희 호텔 오픈 기념일이어서 호텔 내방객들하고 투숙객들께 와인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여자가 말했다.
- 들여 보네. 와인 한 잔 하면 좋잖아.
여자의 말에 남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 그럴까? 하긴 자기는 와인 한 잔 하면 더 달아오르니까. 흐흐흐.
남자의 말에 여자는 남자의 팔을 꼬집었다. 문을 열자 호텔 종업원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여자는 침대 옆 테이블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남자는 카트를 밀고 들어온 종업원을 보며 말했다.
- 이번에 들어온 프랑스산 와인입니다.
종업원의 말에 여자는 반색을 하며 말했다. 종업원은 와인을 놓으며 능숙하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했다.
- 역시 좋은 호텔이라 달라. 서비스로 프랑스산 와인이라... 그리고 종업원 매너도 훌륭한데...
여자가 칭찬을 하자 종업원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탁자 위에 과일 안주를 같이 놓았다.
-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종업원이 돌아서 나오려고 할 때, 남자가 종업원을 불렀다.
- 저기...
남자의 부름에 종업원은 멈칫했다. 그리고 웃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자!
남자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종업원에게 주었다. 종업원은 활짝 웃으면서 꾸벅 인사를 했다.
문을 닫고 나온 종업원은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혼자 중얼거렸다.
- TV로 볼 때에도 재수가 없더니 그냥 봐도 재수가 없네. 아무튼 신문에서 자주 보겠구만.
종업원은 재빨리 로비를 지나쳐 쪽문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벗어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왔다.
호텔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뒤통수 쪽이 이상해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사진기를 든 남자가 그의 뒤통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자 사진기 사내는 다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자기의 힘에 자신이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사내는 그런 그를 얼른 부여잡았다.
- 어허. 한수 형. 그러다 다쳐요.
- 강철구! 너, 인간적으루.. 한 대만 맞자, 응?
- 싫은데요. 저 한 대라도 치면 이 사진들은 지금 당장 신문사로 보냅니다.
그 말에 한수는 갑자기 반색을 하며 했다.
- 사진? 하하. 찍었구나? 잘했어. 내가 메모리칩이 망가져서 걱정했는데, 둘 다 찍었지?
그러자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망가지기는? 잡혀서 빼앗겼겠지?
- 어허.. 이 자식. 내가 그 놈들을 다 내 쪽으로 몰아서 니가 쉽게 한 거 아냐? 그리고 너는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냐? 이 형님이 그냥 준거야. 그래야 그 사람도 윗사람한테 이쁨 받지 않겠냐? 넌 휴머니즘이 없어.
철구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아, 됐구. 한수 형, 이런 일 좀 그만 합시다. 맨날 불륜 커플들 사진 찍어대기도 지겨워요. 좀 일다운 일 좀 합시다.
그러자 한수는 얼른 철구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 얌마. 그래도, 요즘은 모텔 커플은 안 찍잖냐? 호텔! 뭔가 좀 있어 보이잖아. 그리고 오늘은 연예인이잖냐. 오케이. 앞으로 모텔급은 취급 안한다. 호텔만 한다.
한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철구는 짜증난 표정으로 한수를 돌아보았다.
- 모텔이나 호텔이나 남 떡치는 걸...
그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한수는 뒤에서 궁시렁거리다가 얼른 철구 옆으로 다가가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 근데... 철구야. 메모리칩 줘봐라. 내가 최종 확인을 해봐야지.
철구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 근데 한수 형, 장비 구입비 언제 주실 거요?
그러자 한수는 당황해 했다.
- 어? 그건. 줘야지. 줘야지.
그러자 철구는 한수에게 다짐을 받듯 재차 물었다.
- 내가 구입한 장비로 실수 안하고 건수 올리면 구입비 준다고 했죠?
- 했지.
- 분명히 했죠?
- 그렇다니까. 짜식. 뙤놈 빤쓰를 입었나.
- 근데 오늘 형님이 죽 쑬 뻔한 거 내가 제대로 건수 올렸죠?
철구의 말에 한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 아... 아니, 그렇긴 한데... 사진도 확인해야 하고 의뢰인에게 잔금도 받아야 하고..
그러다가 울상을 한 채 철구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
- 철구야. 야 임마, 너 우리 수연이 알지. 걔 수학여행도 가야한다는데, 집 주인은 전세금 올린다지...
그 말에 철구는 버럭 소리를 쳤다.
- 형님! 아니 한수 형. 좀 심하시네.
- 얌마. 아무리 그래도 심하시네라니?
- 하튼 경찰서에서 잘렸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휴..
그러자 한수가 버럭 했다.
- 짜샤. 여기서 내가 짤린 게 왜 나오는데?
- 무슨 형사가 동네 노래방 뒤 봐주다가 짤려? 남들은 룸살롱에다가 안마시술소 뒤 봐주고도 안 잘리더만.. 형이랑 같이 일하는 내가 미친놈이지. 그 때 쪼잔한 거 알았어야 되는데..
철구가 그 말을 하고 돌아가자 한수가 달려와 얘기했다.
- 아니야, 임마... 그 노래방들이 그냥 동네 노래방이 아니고 나름 기업형이라서 룸살롱 급이었어. 그리고 내가 뭐, 그럴려구 그랬냐? 워낙에 없이 사는 사람들이니까 좀 봐준 거지?
철구는 어이없다는 듯이 한수를 쳐다보았다.
- 기업형이라며... 기업형인데, 없이 사는 사람들은 또 뭐야? 사람이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해?
- 아이 자식. 그러니까 넌 이해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거야. 학교 다닐 때 국어는 좀 했냐? 바닥이었지? 쨔샤. 기업형으로 했으나 장사가 안돼서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주면 안되겠냐?
한수는 처음에는 거만하게 얘기하다가 자신의 얘기에 자기가 꼬여서 그냥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철구가 피식 웃으면서 한수에게 말했다.
- 아, 다 됐고, 나 배고프니까 밥이나 먹읍시다.
그러자 한수는 갑자기 반색을 하며 말했다.
- 그래, 그래. 밥 먹자. 근데 뭐, 뭐 먹을래. 삼겹살, 갈비? 소주도 할 거지?
그러자 철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소갈비라도 먹게?
그러자 한수는 철구의 팔을 툭 치며 실실 웃었다.
- 이거 왜 그래? 우리가 언제부터 소를 먹었다고. 그리고 갈비는 역시 돼지지. 소는 대부분 미국산이야. 광우병 몰라? 짜식. 그리고 자꾸 소만 찾으면 돼지들이 슬퍼해... 사람들은 꿈은 돼지꿈을 좋아하면서 꼭 먹는 건 소만 찾는다고. 사람들이 일관성이 없어. 그렇지. 일관성, 좋다. 일관성!
철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일관성? 그렇게 일관성 있으셔서 기업형과 생계형이 한꺼번에 나오슈?
한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멀리 있는 돼지갈비 집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갔다.
- 야, 저기 돼지갈비 집 있다. 아! 손님도 제법 있는 게 맛있는 집인가 보네. 얼른 가자. 배가 등가죽에 붙것다.
철구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한수는 철구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수와 소주 한 잔 하고 헤어져 흥신소 사무실 쪽방에 누운 철구는 품 안에서 아내의 사진을 꺼냈다. 지난 3년 동안 흔적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인 맥컬리 병원만 죽어라고 파고 다녔지만, 맥컬리 병원은 아내와 관계없는 것들만 나왔다.
철구는 사진을 품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 누웠다. 자신의 머리 속의 일부가 비어 있다는 느낌. 그 공허함이 철구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언뜻언뜻 무언가가 떠오르곤 했지만, 결국은 보라색 나비 핀으로 귀결이 되었다. 철구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비가 새어 들었는지 천장은 눅눅하게 보였고, 누렇게 변색된 벽지 위로 검은 곰팡이도 희미하게 보였다. 자기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심부름센터에서 남의 뒤나 캐고 다니고, 남는 시간에 정보를 알아보고 다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짓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아내를 찾아볼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난 3년 간 찾은 정보란 게 너무 미약했다. 그나마도 석호에게 들은 단편적인 얘기들이었기에 철구는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철구에게 그들에 대한 정보를 주던 석호마저 그의 스승과 전 세계를 떠돌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이래저래 혼자 남은 철구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보다 분노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복수심만큼은 더욱 커졌다.
평범한 꿈을 꾸던 박 형사와 임 박사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자신을 죽이기 위해 아무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목적을 위해 사람을 납치하는 그 모든 행위가 철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느껴졌다.
특히나 아직 생사조차 불분명한 아내와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철구로 하여금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철구는 모로 누워 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게 하는 그 벽을 철구는 아내와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느끼고 있었다.
- 언젠간 다 부숴버릴거야.
철구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을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