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5화 (65/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2장 - 1. 악몽(1)

제 2 장 죽지 못하는 자

1. 악몽(惡夢)

복도는 을씨년스러웠다. 푸른색 불빛이 냉기를 뿜고 있었고, 심해보다도 깊은 침묵이 죽음보다도 고요했다. 복도의 양 옆에는 각각의 고유번호가 새겨진 철문이 있었고 마치 교도소의 풍경처럼 서늘했다. 안에 분명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항 속 물고기들처럼 뻐금대지도 않았다. 아무도 없다면 차라리 빈 공간이 주는 적막으로 인해 오싹하겠지만 사람이 있는 공간의 적막은 괴기스러웠다. 그 때 복도를 황급하게 걸어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발자국 소리가 더욱 빨라지고 울림 또한 더욱 커졌지만, 사방의 방은 그런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는지 고요했다.

- 헉헉..

의사용 가운을 입은 한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무언가를 찾듯이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다. 창살 사이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폈다.

첫 번째 방을 본 여인은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 방 안에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며 팔, 다리에 수포가 잡힌 사람들이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그 중에는 이미 목숨이 끊어진 사람도 있었고, 온 몸의 살갗이 벗겨진 채 빨간 속살만 나온 사람도 있었다. 얼굴의 형체가 모두 무너져 내려 얼굴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 얼굴도 보였다. 여인은 뒤로 물러서며 다음 칸을 보았다. 다음 칸에는 썩어가는 손목과 발목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배에 머리보다도 큰 종양이 달린 사람도 있었다. 그 곳은 악취가 진동하여 더 이상 들여다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인은 뒤로 물러나 다음 칸을 들여다보았다. 하늘색 불빛이 새어나오는 커다란 실린더 안에 누군가가 들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시야가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다시 다른 칸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침대에 묶여 있었다. 마취를 하지 않았는지 벌거벗은 여인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하얀 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 여럿이 서 있었다. 벌거벗은 여인은 임신을 한 여인인지 배가 불룩하였다. 하얀 색 가운은 입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벌거벗은 여인 쪽으로 다가갔다. 문 밖의 여인은 문 안에서 수술을 하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발돋움을 하였다. 뜻밖에도 여의사였다. 뒷모습만으로도 냉랭함이 흐를 정도였고, 수술용 장갑을 낀 손에 들린 메스는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문 밖의 여인은 순간 자신의 입을 막았다. 메스를 들고 있는 여인은 보라색 나비 핀을 달고 있었다. 여의사는 임산부의 죽음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임산부의 배를 아주 길게 갈랐다. 임산부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문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그 안에서 아기를 꺼냈다. 아기는 밖으로 나오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꺼내든 여의사는 철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철문 밖에서 지켜보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얀 가운 앞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여의사가 마스크를 벗자 문 밖의 여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었다. 그 때 그리고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 역시 모두 자기 자신이었다. 가운 앞에 피에 젖어있는 여인이 철문 앞으로 다가와 철문을 연다. 문 밖의 여인은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도망을 간다. 무서운 눈빛으로 복도 끝에서부터 여인을 향해 다가왔다. 문 밖의 여인은 공포에 질려 반대쪽을 뛰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도 자기 자신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 사이로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양 쪽에서 다가오는 자신들과 함께 무서운 표정으로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 싫어!

세현은 침대에서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 때문에 온 몸이 떨렸다.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정확하게 새벽 네 시였다.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방으로 갔다. 정수기 컵을 대자 시원한 물이 쏟아졌다. 세현은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 거실로 갔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새벽의 찬 공기가 세현의 볼에 닿더니 머리를 흩트렸고, 그녀의 온 몸을 휘어 감았다. 세현은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 이거야 원. 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겠네.

세현은 옷을 입고 집 앞에 공원을 가로 질러 앞에 있는 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모 마리아 상 아래에서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하였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기원하듯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서자 세현 옆으로 지나치는 젊은 외국인 신부가 보였다. 그 신부는 마리아 상 앞에 서 있는 세현에게 상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얼굴을 보니 안녕하지 않으신 것 같군요.

외국인 신부의 유창한 우리말에 세현은 당황하였다.

- 네? 네. 신부님. 악몽을 꾸어서요.

외국인 신부는 세현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대개 악몽은 마음속에 일 때문에 꾸는 것이지요. 힘드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혹시라도 죄지은 게 있으셔도 언제라도 오세요. 하느님은 힘들고 죄지은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답니다.

손사래를 치며 세현은 대답했다.

- 저 나쁜 사람은 아닌데요.

외국인 신부는 손바닥을 딱 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 하하. 그런 뜻 아닙니다. 아무 일 없어도 오셔도 된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열려있는 곳, 그곳은 성당.

마지막에는 마치 노래를 부르듯이 말을 했다. 그 말에 세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 웃으세요. 악몽은 겨우 꿈에 불과하니까요. 웃으시면 현실에서는 사라진답니다. 그럼 전 이만.

외국인 신부는 세현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졌다. 세현이 얼핏 들어보니 가요였다.

- 재미있는 신부님이네. 외국인 신부님이 가요라... 훗...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는걸.

세현은 성당 앞에 주차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젯밤의 악몽이 또다시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아 가슴이 뛰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블루투스 버튼을 누른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응, 나야. 오늘 또 새벽 4시에 깼어. 한 동안 그 꿈 안 꿨는데 얼마 전부터 또 시작이야. 주기적으로 뭔가 자꾸 떠올라.

세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건너편에서는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 전에도 말했지만 특별한 일을 겪지 않았더라도 같은 패턴의 꿈을 반복적으로 꿀 수는 있어. 요즘 매일 야근하거나 과로했던 거 아니야?

- 요즘 좀 바쁘게 지내기는 했는데... 그나저나 나보다 정태 씨가 더 과로하는 거 아냐?

- 나? 나야 일상이지. 어제 오프였는데, 갑자기 콜이 와서. 아~함.

정태의 목소리를 듣자 세현은 묘하게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 일 끝났으면 들어가서 눈 좀 붙여.

세현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정태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래야겠어. 과장님이 오늘 오프 준다고 했으니까 이따 오후에 전화할게. 잠깐 보고 얘기하자.

- 피곤할 텐데...

세현이 말끝을 흐리자 정태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아직 말짱해. 이따가는 더 말짱할 거고. 다른 건 모르겠는데, 새벽 4시에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건 뭔가 있다는 얘기지.

- 그런가? 아무튼 이따 시간될 때 전화해. 나도 시간 맞춰서 나와 볼게.

- 그래. 잠을 잘 자야 예뻐지는 거니까. 하하하.

- 정태 씨 많이 피곤하구나. 헛소리를 다 하네.

- 아무튼 이따 전화해.

- 응. 끊어.

핸들에 달려있는 블루투스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끊을 때 세현은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출렁거리는 걸 느꼈다. 세현은 여전히 빨간 불인 신호등을 한 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한 번 내쉬고는 차에서 내렸다. 자신의 차 뒤꽁무니에 중형차가 붙어 있었다. 그리 심하게 들이박지는 않았지만, 뒷범퍼가 약간 찌그러져있었다. 혼잡한 출근 시간에 자신의 차를 들이박고는 차 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는 뒤차 운전자가 얄미웠다. 앞 창문으로 보니 뒤차 운전수는 핸들에 고개를 확 처박은 채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세현은 운전석 옆으로 다가가서 앞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 이봐요!

그러나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말하려던 세현은 순간적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 이봐요. 창 문 좀 열어봐요.

다시 유리창을 두드리려는데 유리창 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세현은 운전자를 보고 화를 내려다가 70대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내미는 걸 보고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 할머니, 괜찮으세요?

세현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운전석에 있는 할머니는 놀란 듯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대답했다.

- 으, 응. 괜찮당게.

세현은 할머니가 다치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하며 말했다.

- 할머니, 이렇게 바쁜 출근 시간에는 운전을 좀 조심히 하셔야지요.

세현의 부드러운 말투에 할머니는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말을 했다.

- 그랑게. 거참. 분명히 브레끼를 잘 밟았는디. 차가 앞으로 가더마. 와 거기까지 갔는지 모르갔구마.

-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조금 늦게 밟으셨나 보네요.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니까 조심히 운전해서 가세요. 앞으로는 앞에 있는 차 잘 보시구요, 거리도 충분히 두시고 운전하세요.

세현은 액땜했다는 심경으로 할머니께 말만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의 차로 와서 시동을 걸려고 룸미러를 보는데, 뒤차 할머니가 차에서 내려 자신의 차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세현은 창문을 내리고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지갑을 들고는 세현에게 다가왔다.

- 그라도 그런 게 아니랑게. 차는 내 고쳐주꾸마.

- 아니에요. 괜찮아요.

- 아녀. 다쳤으믄 으쯘당가.

그러면서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서 세현에게 건네주었다. 세현은 웃으면서 거절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하게 명함을 주었다. 세현이 명함을 받자 할머니는 세현을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세현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를 쳐다보는 할머니가 부담스러웠다.

- 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 아따. 이상하당게. 아까는 얼핏 그랬는디. 내가, 갈 때가 됐나벼. 거참...

- 네? 무슨 말씀이세요?

- 근데 처녀 나이가 올해 몇이당가?

- 네? 갑자기 제 나이는 왜요?

- 아니, 내가 사람을 좀 보는디, 처녀 나이가 나보담두 많아 보잉게 말여. 자꾸 두 명이 포개져 보이기도 하고. 그 두 명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하고... 참 희안하당게. 거참 내가 이런 적이 없었는디....

할머니의 말에 세현은 피식 웃었다.

-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어떻게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을 수 있어요?

그 말에 할머니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 그라지. 맞아. 그라지. 나가 사람들 봐주고 돈 버는 일도 이제 그만 할 때가 됐나벼. 내가 주책이여. 아이구 처녀, 어여 가던 길 가 보드라고. 그라고 처녀 차가 상한 것 같은디 꼭 연락혀. 나가 가진 돈이 지금은 얼마 없어서.

세현은 할머니의 말에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할 말만 하고 돌아갔다.

- 아마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텡게 잊지 말고 연락혀.

세현은 룸미러로 할머니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명함을 보았다. '신당동 장군보살'이라는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등이 적혀있다. 그 명함을 보고는 풋하고 웃어버렸다.

- 장군 보살? 하긴 할머니 덩치가 크긴 하지.

세현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는 사무실 쪽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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