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完] - 10. 재시작(6)
- 강철구라고 합니다. 박상철 형사님께서 예전부터 여기 가서 일해보라고 하셨는데, 이제야 오게 됐습니다.
지훈은 한수가 운영하는 심부름센터로 갔다. 한수는 지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바짝 마른 것이 이 일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한수는 귀를 후비다가 귓밥을 파 툭 던지며 말했다.
- 뭐 죽은 상철이가 이제 와서 누굴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뭐.. 그럼 한 달만 먼저 해 보자구.
지훈은 그 날부터 한수의 심부름센터에서 일을 했다. 한수가 주는 일이라면 돈의 문제를 떠나서, 그리고 일의 난이도를 떠나서 닥치는 대로 해치웠다. 한수는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지훈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중에는 같이 하자고 매달릴 정도였다.
- 박 형사가 물건 하나 선물해 주고 갔네.
지훈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한수는 박 형사를 추억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지훈 역시 그 말에 박 형사가 몹시 그리워졌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보내야 했던 그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 이제 솔직히 말해 보셔. 무슨 사연이 있길래 상철이를 팔아먹었는지.
지훈은 한수의 인물됨이 가볍기는 하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일을 하기에 어느 정도 비열함과 냉정함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아직 그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 그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 그 녀석하고 가까운 사람이라... 워낙 성격이 거지같은 녀석이어서 나같은 성격 파탄자 아니면 가까워지기 힘든데... 아무튼 나야 뭐 좋지. 하하하.
- 네. 감사합니다.
- 아무튼, 철구 씨! 우리 한 번 잘 해 봅시다.
지훈은 아직 자신을 철구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꾸준히 자신은 더 이상 지훈이 아니라 철구라는 것을 암시했다.
'나는 강철구다. 이제 세상에 박지훈은 없는 거야!'
지훈은 소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으며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다짐했다.
톰슨 병원의 원장인 조나단 톰슨은 어제 일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슈뢰딩거가 기억 이식 레이저로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조나단 톰슨은 보통 사람들과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이 달랐다. 어린 시절 자폐를 앓았던 조나단 톰슨은 보통 사람들처럼 자극을 통해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면과 공간을 통해 모든 것을 지각하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을 갖고 있었다. 조나단 톰슨은 초인적인 힘으로 정상적인 사람의 수준까지 자폐를 고쳤고, 서번트 증후군 덕분에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깨우치고 알게 되었다. 톰슨은 피터 스미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 내가 먼저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갖는 건대하고 말입니다.'
톰슨은 슈뢰딩거를 믿을 수 없었다. 그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톰슨이 보기엔 슈뢰딩거의 눈에도 야심과 욕망이 가득 차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에게 조직을 맡기는 건, 아니 '그 분'의 기억을 맡기는 건 더 큰 위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톰슨은 은밀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피터가 죽었소.
톰슨의 말에 상대방은 경악성을 터트렸다.
- 누.. 누가 죽였소? 아니 어떻게?
- 슈뢰딩거 박사.
- 슈뢰딩거? 그 사람은...
- 샘 에드워드의 동료 박사지요. 홈즈 스미스의 지원을 받던 세인트 조지 연구소에 숨은 실력자라 하오.
- 그.. 그럼 피터는 어떻게 되는 것이오.
- 뇌를 제외하곤 폐기될 것이오. 피터가 그레고리님의 뇌를 폐기했다고 했으니,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갖고 있는 유일한 뇌는 피터 외에는 없을 테니까.
- 아... 이럴 수가...
톰슨과 전화를 하던 사람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괴로워했다.
-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시오.
- 그 시신을 찾아와야겠소.
- 이미 폐기되었을 텐데요.
- 뇌라도 찾아와야겠소.
- 아! 사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드린 것이라오. 우리가 그 뇌를 가져와서 기억을 다운로드하는 것이 어떨까 해서..
그 말에 그는 버럭 화를 냈다.
- 그는 내 유일한 손자요! 기억보다 더 중요한 내 유일한 혈육이란 말이오!
톰슨은 그의 뜻밖의 말에 놀랐다. 평소 피터의 핵심 측근이었던 동북아 평화재단의 다나카 이치로가 피터의 생물학적 할아버지라는 말에 톰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 그는 고아였소. 그리고 일본인도 아니고.
- 그 애 엄마는 제니퍼 버밍험이오. 나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만나기로 했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했던.
톰슨은 이치로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 나는 나의 아들과의 인연을 막아서 아들을 자살로 몰았던 홈즈 일당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소.
그 동안 조직은 그레고리의 유전자로 절대로 남자는 만들지 않았다. 그 분의 유전자를 받은 남자는 곧 그레고리라는 '고전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유전자를 직접 받은 유일한 여인과 한 남자. 그리고 그의 아들. 톰슨은 이치로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피터'는 '그 분'의 기억을 가진 이가 아니라 '그 분'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 아이를 홈즈 집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로군요.
- 그렇소.
- 그렇다면 피터의 뇌를 빼와야겠군요.
톰슨은 전화를 끊고 자신의 심복 몇 명에게 은밀하게 임무를 내렸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배양액에 담긴 피터의 뇌가 톰슨의 손에 들려 있었다.
- 잘 처리했겠지?
- 네. 새로운 뇌로 바꿔놓고 왔습니다.
- 잘 했네.
톰슨은 심복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급하게 그 곳으로 온 다나카 이치로는 그 뇌 앞에서 오열을 했다.
- 이제 내가 복수를 할 차례요. 비록 힘은 없지만.
톰슨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 배양액에 든 뇌를 보면서 톰슨 역시 생각했다.
'다나카 이치로에게도, 나에게도 모두 이식을 하면 되겠구만.'
한편 경찰서에 출두하여 조사를 마치고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로 돌아온 슈뢰딩거는 지하로 내려왔다. 어두운 실험실에 낮은 조도로 불을 켰다. 그리고 배양액 안에 담긴 피터의 뇌를 보며 중얼거렸다.
- 자네의 욕심이었어. 어쩌면 적법한 과정을 거쳤다면 나도 자네를 그 분의 후계자로 인정했을지 모르지.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 자네는 뛰어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슈뢰딩거는 한숨을 내쉬었다.
- 우리의 잘못이야. 자네에게 인성(人性)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하긴 우리가 괴물인데 사람을 키울 수는 없었지. 자네 잘못이 아니지. 다 우리들 잘못이야. 모두.
슈뢰딩거는 마치 죽은 망나니 아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듯이 말을 이었다.
- 자네 말이 다 맞아. 과정이겠지. 나 역시도. 하지만 나는 후회는 없네. 그리고 후회할 필요도 없지. 나는 또 다시 그 분을 만들 것이네. 그 분이 있어야 하니까.
슈뢰딩거는 그의 기억을 다운로드 받도록 했다. 그 중 피터의 기억을 지울 수 있으면 지우라고도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 때 한 연구원이 데이터 그래프를 보며 얘기를 했다.
- 박사님. 이 뇌에는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 뭐? 기억이 없어? 피... 피터의 뇌...
순간 슈뢰딩거는 혼란스러웠다.
- 누가 가져갔을까? 이 안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은 모두 지웠는데...
슈뢰딩거는 사람들에게 시켜 어제부터 지금까지 CCTV를 확인해 보라고 시켰다. 그리고 는 밖으로 나와 CS2가 담겨 있는 대형 실린더 쪽으로 나왔다. 그는 그 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피터의 뇌가 사라진 지금 그녀를 폐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모든 일의 근원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이렇게 쉽게 폐기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슈뢰딩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물로 그녀의 아이 역시 피터의 피가 흐르는 존재들이다. 슈뢰딩거는 유전학을 공부할수록 '피'가 얼마나 진한 것인지 몸소 깨달았다.
- 다시 연구를 시작하면 돼.
슈뢰딩거는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때 무언가 섬뜩한 느낌을 뒤에서 받았다. 실체도 모르는 그 무언가가 슈뢰딩거를 감싸는 기분이었다. 마치 구석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노려보는 눈빛, 아니 그보다 거대한 해일이 자신의 눈앞에 솟아있는 느낌이었다. 슈뢰딩거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커튼이 쳐진 곳을 보았다. 그리고 커튼을 열었을 때 슈뢰딩거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CS2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CS2 다리 사이에서 실린더의 액체와 다른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CS2는 몹시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 순간 CS2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이는 검은 색 물체. 슈뢰딩거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배양액 안에서 그렇게 눈을 뜰 수는 없다. 아니 출산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CS2는 그 모든 것을 거스르고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있는 것이었다. 슈뢰딩거는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 이리로 빨리 오게. CS2의 분만이 시작됐어.
- 네? 그럴 리가요. 배양액에서는..
- 얼른 오게.
의사들이 CS2의 실린더 앞에 섰을 때 모두 경악을 했다. CS2는 눈을 뜬 채로 이미 분만을 거의 마친 상태였다. 아이는 배양액 밖으로 다 나왔다. CS2의 자궁과 연결된 탯줄에 걸려 아래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지금 꺼내지 않으면 아이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때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마치 헤엄을 치듯 실린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모두가 모두 명확하게 볼 수 있게 입을 뻥긋거렸다.
- 엑소더스(Exodus)
- 축계(Exodus) 1장 ? 깨닫지 못한 깨달음 끝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완결 공지]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1장 완결
축계(Exodus) 1장 '깨닫지 못한 깨달음'이 완결되었습니다. 베스트리그에 올라와서 지난 2개월간 쉼없이 달려왔더니 어느새 1장이 완결되었네요. 처음 구상을 하고, 스토리 라인을 짤 때가 생각이 나네요. 뭐 이런 허접한 구성과 스토리를 누가 볼까하는 두려움에 첫 문장을 썼는데 어느새 완결이 되었네요. 물론 쓰던 도중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서 50페이지 정도 날린 걸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쓰립니다.
부랴부랴 쓰느라 오타도 많고, 문맥도 어색한 부분이 많은데 그런 걸 참고 읽어주시느라 독자님들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지금은 틈나는 대로 퇴고하고 수정 중입니다. 조만간 좀 더 다듬은 글로 올릴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굳이 다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용이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요. (아닌가???)
처음 베스트리그에 올라왔을 때 관심 작품 수가 40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회수는 5000 정도 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무려 10배가 넘는 관심 작품 수와 조회수를 보니 나름 감개가 무량합니다. (물론 다른 작품에 비해 아직 많이 허전 혹은 허접합니다.. *^^*)
이제 1장을 완결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연재해야 할지 저도 앞이 캄캄하네요.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Pilot(제 3의 눈) : 지호가 살인 사건의 누명을 벗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완결(수정 중)
1장(깨닫지 못한 깨달음) : 강철구가 왜 흥신소에서 일하며
축계(Exodus)를 추격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완결(수정 중)
2장(죽지 못하는 자) : 최세현이 왜 기억을 잃게 되었으며,
축계(Exodus)와는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 현재 집필 중(약 60% 진행)
3장(단절된 삶) : 대장과 장석호 신부의 이야기로, 이들이 왜
축계(Exodus)를 쫓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현재 집필 중(약 70% 진행)
0장(The Begins) :
축계(Exodus)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지는 이야기입니다. - 현재 보류 중(30% 진행)
그 이후에는 에피소드별로 내용이 전개될 것입니다. 현재 약 12개 정도의 에피소드 스토리라인을 구성하였고, 틈나는 대로 쓰고 있지만 영 진도는 안 나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ㅡ,.ㅡ(에피소드는 굳이 열거를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신비감도 있고 해서... 쿨럭...)
파일럿 공지 때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쓰면서도 이렇게 이야기를 크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1장은 A4지 100여장 분량으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250장을 훌쩍 넘겼네요.
2장도 현재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거의 다 완성했다고 혼자 '착각'했는데, 다시 읽고 고치다 보니 다시 분량이... 헐...
아무튼 지난 두 달간 쉼없이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리 멘탈의 글쟁이가 가끔은 투정도 부리고, 쇼도 하고, 혼자 삽질을 해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또 다른 작품에 비해 '관심 작품' 수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댓글을 달아주시고, 추천을 해 주셔서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모두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의 '열정'과 '관심'으로 믿겠습니다.
그리고 염치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부탁의 말씀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신 분, 재미없게 읽으신 분, 혹은 지적 사항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여기에 댓글을 남겨 주세요. 제가 수시로 와서 확인하고 수정할 사항은 수정하고, 지적 사항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쩌면 댓글을 바탕으로 글쓴이가 이벤트라도 기획할지도 모를 일이죠.
마지막으로 앞으로 연재될 2장의 내용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2장 연재는 2주 후에 재개할 예정입니다. 2주 후 부터는 연재일이 월, 목이 될 예정입니다만... 뭐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일이죠.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