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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3화 (63/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0. 재시작(5)

- 왜? 당신은 신부잖아.

- 네. 저는 신부죠. 하느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해야죠.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당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사실 당신한테 부탁을 받고 정식으로 그 곳으로 갔었죠. 바티칸의 허락을 맡고요. 그런데 그 곳에는 없었습니다. 지하 2층은 창고로 바뀌어 있더군요.

- 지하 2층?

-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놈들을 부수고, 당신의 부인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바티칸에도 보고를 했습니다. 당분간 한국에서 있겠다고. 당신이라면, 아니 당신만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당신은 신부 아니오?

- 신부 맞습니다. 그들의 음모를 파헤치는.

그 말에 지훈은 멍하니 석호를 쳐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있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그 눈은 슬픔의 바다였다. 아니 아픔과 고통의 아비규환이었다.

- 알겠습니다. 휴... 그렇게 하죠.

석호는 고개를 한 번 끄떡이고 의사에게 다가갔다. 의사는 서류를 작성하다 석호를 보고 말했다.

- 사연이 있는 분인가요?

- 저보다 큰 사연이지요.

- 네. 신부님께서 그러하시다면...

-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되겠습니까?

- 네.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석호는 지훈을 돌아보았다. 그의 우수에 찬 얼굴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에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꼬질꼬질하고, 남루한 옷을 입었어도 모든 것을 삼킬 듯한 눈빛, 강한 눈매, 그리고 세상을 삼킬 듯한 저 입.

- 성형 수술이 필요합니다.

- 신부님이요?

- 아니요. 저 분.

- 어디를...

- 얼굴 전체를 고쳐야 합니다. 최대한 지금의 얼굴이 남아있지 않도록.

- 음...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힘 닫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는요. 저희 아들을 살려주신 것에 비하면 이건...

석호는 의사에게 인사를 하고 지훈에게 다가왔다.

- 이제 그 분으로 사셔야죠. 성형 수술도 부탁해 놓았습니다.

지훈은 석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 기억은 안 나지만, 내가 당신을 살려줬다면 이걸로 퉁칩시다.

지훈의 말에 석호가 난색을 표했다.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구해 준 것과 도움을 주는 것은 무게가 다르니까요. 저에게는 평생 짊어질 두 번째 짐이니까요.

- 고리타분하기는.

- 아무튼 수술 끝나면 오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뵐 것 같습니다. 저희는 같은 목적을 가졌으니까요.

석호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자 지훈이 크게 소리쳤다.

- 고맙수다.

한 달 후 지훈은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지훈은 그 한 달동안 자신이 박지훈이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다. 박지훈은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신분도, 그리고 자신의 얼굴도, 그리고 과거의 기억까지도 바꾸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 그것 하나만을 빼고. 지훈은 먼저 철구가 자신에게 부탁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새로운 삶이란 그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 성준아. 나다. 조용히 받아.

지훈의 전화를 받은 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지훈의 이름을 외치려다 멈췄다. 성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른 형사들이 모두 의아한 듯이 성준을 쳐다보았다. 성준은 낮고 조용하게 말을 했다.

- 아! 형님. 잠시만요.

성준은 전화 송화기를 막은 채 복도를 뛰어 밖으로 나갔다. 담벼락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전화를 받았다.

- 형님, 어디 계십니까? 다들 형님이 일을 당한 줄 알고 있어요.

성준은 반가우면서도 서운한 말투였다.

-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 다행이라뇨. 한동안 정말 서가.. 어휴..

- 잠깐 만날 수 있을까? 부탁이 있어서.

- 그럼요. 어디신데요?

성준이 지금이라도 뛰어나올 것처럼 대답을 했다.

- 지금은 아니고. 사람 하나만 찾아줘.

- 네? 갑자기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 누굴...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 아무튼 누군데요?

지훈은 성준에게 '두정희'라는, 지금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되는 여자를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성준은 수첩에 그 내용을 적고 지훈에게 말했다.

- 지금은 어디서 계세요?

성준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지훈은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 아직 없어. 그런데 이제 곧 생길 거야.

- 전화는 그럼 여기로 드리면 돼요?

- 응, 부탁한다. 그리고...

- 알았어요. 형님하고 통화한 거나 형님에 대한 건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요.

- 고맙다.

- 대신 저하고는 만나야 합니다. 만약 안 그러면 저도 못 도와드려요.

- 알겠어.

- 제가 빨리 알아보고 전화드릴게요.

성준은 지훈과 전화를 끊고 그를 만나려는 생각에 안으로 들어가 '두정희'를 찾았다. 그러나 경찰청 서버에는 '두정희'라는 여자 자체가 없었다. 두 씨가 희귀 성(姓)이어서 두 씨만 찾아도 그리 많지 않았다.

- 뭐지?

성준은 이번에는 사망자 명단에 입력을 해 보았다.

'두정희(1971~2001) - 세정 병원, 자궁암. OO 납골당

성준은 그 내용을 뽑았다. 그리고 퇴근하는 길에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님, 정보를 뽑긴 했는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한 번 뵙죠.

지훈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정보는 받아야 하기에 성준과 약속을 잡았다. 성준과 만나기로 한 곳은 좁은 골목이었다.

- 어! 형님!

골목은 바깥 길보다 많이 어두웠다. 지훈이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성준이 지훈의 키만 가늠하고는 손을 들었다. 지훈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성준에게 말했다.

- 내가 많이 변했다. 놀라지 마라.

- 변해봤자 저에게는 형님이에요.

지훈이 성준 앞으로 다가가자 성준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훈에게 농담을 했다.

- 잘 생기게 성형을 하는 사람은 봤어도 형님처럼 못 생기게 성형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성준의 농담에 지훈은 조금 기분이 풀렸다. 성준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준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또 다시 성준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조력자가 필요했기에 성준에게만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하지만 성준은 지훈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 형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 알아도 저는 다행입니다.

- 고맙다. 자식.

- 그리고 필요하신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릴 게요.

성준은 지훈의 손을 잡고 조금은 감격스러운 듯이 말을 했다. 지훈은 그런 성준이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 오늘은 형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니까 다음 주 정도에 소주나 한 잔 하죠.

- 그래. 그러자.

지훈은 성준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시렸다. 성준 역시 지훈을 보고 너무나 안쓰러웠다. 어쩌면 대한민국 최고의 형사, 아니 역사에 남을 만한 경찰이 될 수도 있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또 얼굴까지 바꾸고, 그 좋았던 체격이 깡마른 사람으로 변한 것이 성준은 너무 서글펐다. 성준은 지훈에게 보이지 않게 뒤돌아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 이제 죽으려면 말하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냥은 두 번 다시 안 보냅니다.

- 고맙다.

- 그리고 저 보호한답시고 필요한 거 말 안하고 그러면 가만히 안 둘 겁니다.

지훈은 성준의 뒷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 잡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고. 복수를 마치고, 원없이, 한없이 울 거라고.

- 그런데 정보는...

- 아 참! 내 정신 좀 봐.

성준은 주머니에서 A4지를 꺼냈다.

- 죽은 여자를 왜 찾습니까? 이 여자도 혹시 거기랑 관련 있습니까?

성준이 건네 준 종이를 보았다. 어두워서 그런지 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좀 더 밝은 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품 안의 사진을 꺼내 얼굴을 비교해 보았다.

- 맞군. 사망자라...

- 무슨 일이시죠?

- 부탁을 받은 게 있어서.

- 형님 코가 석 자인 것 같은데, 부탁은요.

- 아무튼 고맙다. 그리고...

지훈은 A4지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 내 이름은 강철구다. 이제. 강.철.구.

그러자 성준이 대답했다.

- 아뇨. 형님은 그냥 형님입니다. 강철구고 박지훈이고 간에 저한테는 그냥 형님입니다.

- 새끼.. 안 보는 사이에 멋있어졌네.

- 짬을 조금 먹으니까 알겠더라구요. 하하.

- 하하.

지훈은 성준을 만나 오랜만에 웃었다. 아니 지훈은 자신의 몸에서 웃음, 기쁨, 행복, 사랑과 같은 좋은 것들은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라지게끔 혼자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성준과 만나자 그런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다른 형사들이 보고 싶어졌다.

- 다른 형사님들은 안녕하시고, 조 반장님은?

- 뭐 다들 여전하시죠. 다만 박 형사님하고 형님하고 다 그렇게 된 줄 알고 예전만큼 힘이 넘치진 않구요.

- 그래. 너도 몸 조심하고.

- 네. 형님은 '생명' 조심하시구요.

지훈은 성준과 헤어진 후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철구의 부탁을 한시라고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면 마음의 빚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훈은 밤새 달려 여수에 있는 납골당으로 갔다. 여관을 하나 잡아 방에 누웠다.

-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장석호 신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었다. 다만 그 생각만 하면 아련하게 보라색 나비가 기억 속에서 아른거렸다.

- 보라색 나비... 이게 뭐지?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기 때문이다. 지훈은 꿈에서 저 멀리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한 여인을 보았다.

'혜... 혜민아'

지훈이 그 쪽을 향해 달려가려하는데 마치 발이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느리게 움직였다. 그 여인은 점점 멀어져 갔다. 지훈은 안타까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 혜민아!

눈을 뜬 곳은 구형 텔레비전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여관방이었다. 작은 창으로는 어느 새 아침이 밝았는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기억, 꿈, 모든 것이 이 물에 씻겨가기를 바라면서.

지훈은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성준이 준 종이에 적힌 납골당으로 갔다. 납골당 안에서 본 여인은 붉은 색 원피스를 입고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대상이 철구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지훈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창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 뭐 이미 하늘에서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부탁해서 하는 말이니 잘 들으쇼. 강철구, 그 사람이 미안하답니다. 100만 원을 해 주지 못해서. 그 이유야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그 일을 마음에 품고 하늘로 갔다면 이젠 다 잊으쇼. 철구 그 사람도 당신 따라 하늘로 갔으니까.

지훈은 그렇게 얘기를 하고 돌아서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여자의 사진 앞에 섰다.

- 사랑했답니다. 아니 사랑을 하고 있더라구요. 그것만 알아주면 됩니다.

지훈은 그렇게 말하고 나가는 길에 납골당 사무실에 가서 그녀의 납골당 기간 연장을 위해 100만 원을 냈다. 그러다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냈다. 200만 원 정도 되는 돈이 있었다. 지훈은 그 돈도 사무실에 내고 말했다.

- 잘 돌봐 주쇼.

지훈은 납골당 연장 비용 이름 난에 '죽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적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가족, 그녀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아니 그녀가 왜 그를 떠났는지 그런 것은 그와 그녀의 죽음 앞에서 하찮은 일에 불과해 보였다. 지훈에게는 '죽을 때까지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사랑한 한 사람과 그녀'에 대한 기억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자신과 혜민도 그런 존재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용할 수 있는 여인과 그녀의 남편. 철구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그녀의 사랑을 놓지 않았다. 자신 역시 죽을 때까지 혜민과 자신의 아이를 놓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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