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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2화 (62/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0. 재시작(4)

그러나 지훈은 그 날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 지훈의 생각으로는 그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인도로 가는 것, 인도 병원에 예약을 한 것까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행기를 타는 척하며 갑자기 복통이 찾아와 탑승할 수 없다고 하고는 플랫폼에서 내려버렸다. 지훈은 그들이 비행기를 추락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잔혹무도한 놈들이라도 무고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었던 것이었다. 지훈은 마음속으로 그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다. 지훈이 먼저 계획한 것은 신분 세탁이었다. 지훈은 자연스럽게 노숙자들이 많은 곳으로 들어갔다. 노숙자들과 어울리며 자신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았다. 그 곳에서 지훈은 자신의 사연만큼이나 기구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인생을 듣다보니 어느 순간엔가 자신의 슬픔이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 서너 달을 지내다 보니 그들의 동태와 상황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되었다. 지훈은 그러다가 폐암에 걸린 남자를 하나 만났다. 그는 술만 마시면 습관적으로 주폭을 일삼는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 사이코라고 불렀다. 지훈은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을 했다. 그는 자신과 덩치도 비슷했고, 목소리 톤마저 비슷했다. 지훈이 그에게 접근을 했을 때 그는 지훈을 극도로 거부하였다. 하지만 지훈은 그에게 술도 사주고, 그가 주폭으로 날뛸 때 그를 위해 방어도 해주고, 제압도 해 주었다.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흐르자 그는 지훈에게 자신이 왜 술만 마시면 분노를 하게 되는지 말을 해 주었다.

- 어이.. 내가 지금은 이렇게 봬도 한 때는 기가 막히게 잘 나갔던 놈이야.

- 그렇겠죠. 말씀하시는 걸로 보니 가방 끈이 짧아 보이지는 않아 보이던데요.

- 그렇지?

그는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해댔다. 입가에 피가 묻었지만, 그런 건 이미 일상이 되어서 두 사람 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 쿨럭쿨럭... 내가 프랑스 투르(Tour)에서 미술을 공부했거든. 루아르 강(La Loire)에 있는 나폴레옹 다리를 건너가면 씨몽 섬(De Simon)이 있지. 거기서 루아르 강을 바라보면... 쿨럭쿨럭..

그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지훈은 그의 기침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 지훈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맞았다. 지훈은 무적자(無籍者) 신세인데다가 그의 병세 역시 병원에 간다고 해서 나을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 거기서 내가 그 년을 만난 게... 난 사랑했는데...

그의 말은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이제 외울 정도였다. 씨몽 섬에서 루아르 강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한국인 유학생이라며 한 여자가 접근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두정희. 본명인지 가명인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고 한다. 지훈도 그 사진을 보아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여자 사진을 아직도 보물처럼 그는 가슴에 품고 다녔다. 스스로는 복수를 위해서 가지고 다닌다고 했지만, 지훈이 보기에는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 그 년은 내가 꼭 잡아 죽일 거야.

그는 이야기의 말미에는 항상 그녀를 죽인다는 말을 했다. 그가 그녀를 죽이고자 하는 요지는 단순했다. 프랑스에서 자신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갖고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난한 화가였던 그가 한국에 오기 위해 모으고 모은 돈을 그녀가 가지고 도망을 쳤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돈을 다시 벌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도망간 한국에 다시 오기 위해 프랑스에서 도둑질 빼고는 다 해봤다고 했다. 심지어는 몸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훈은 그가 술에 취해 잠이 들자 한 쪽 구석으로 가서 누웠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온몸으로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닥에 박스도 깔고 모포도 깔았지만,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훈은 이가 닥닥 부딪쳤지만 이불을 하나 덮고 누웠다. 이불 안에 온기가 어느 정도 돌자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그 때 멀리서 죽을 듯이 숨넘어가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예의 그가 하는 기침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기침은 멈출 줄을 몰랐다. 먼저 잠이 든 노숙자들조차도 잠에서 깨어 그에게 한 마디씩 해댔다.

- 뒈질려면 딴 데가서 뒈져. 여기서 그러지 말고.

한 노숙자가 짜증을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화를 내며 싸웠을 사람이 기침만 할 뿐이었다. 지훈은 순간 남자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지훈이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이미 한 바가지의 피는 흘린 듯이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 괜찮으세요?

지훈이 옆에 가서 묻자 남자는 기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계속 기침을 해댔다.

- 이러다 잘못 되겠어요. 어디라도 갑시다.

지훈이 남자를 들쳐 업었다. 남자는 거부할 힘도 없는지 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누웠다. 지훈은 근처에 모텔로 향했다. 입구에서 노숙자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주머니에서 십 만원을 꺼내 카운터에 냈다.

- 아이 더러워지는데... 그럼 깨끗하게 쓰슈.

모텔 카운터에 앉아 있던 뚱뚱한 여자는 마치 선심을 쓰듯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지훈은 모텔 침대에 그를 눕혔다. 그의 가슴은 숨쉬기도 벅찬지 마구 들썩거렸다.

- 병원에라도 가는 게...

지훈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자신의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원래 하얀 봉투였지만 때가 꼬질꼬질하게 꼬여있었다.

- 내가... 쿨럭... 당신... 당신이 나한테 온 이유를 알아... 쿨럭 쿨럭..

지훈은 그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 난... 난 가망이 없으니까... 당신이 내... 내 부탁을 들어줘..

그러면서 지훈에게 봉투를 건넸다. 지훈이 말없이 그것을 받자 열어보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지훈은 봉투를 열어 안을 쳐다보았다. 안에는 네 번 접힌 편지 한 장과 그 여자의 사진 한 장, 그리고 100만 원짜리 수표가 한 장 있었다.

- 이게 뭐죠?

- 그... 그녀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 했어.. 쿨럭.. 100.. 100만 원이 없어서... 내.. 내가 100만 원만 있었어도...

지훈은 그의 말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평소에 들었던 말과는 다른 말이었다.

- 내가... 흑흑.. 내가 그녀를... 쿨럭...

지훈은 그에게 말을 그만 하라고 하고 싶었다. 이미 쏟은 피만으로도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 내일 말씀하시죠.

그러나 남자는 완강했다.

- 내일.. 쿨럭.. 내일은 없어.. 그녀한테... 전해줘.. 100만 원하고, 편지... 그리고 사... 미안했다고. 쿨럭. 쿨럭.

남자는 그 말을 마치고 마치 자신의 할 일이 끝난 사람처럼 기침을 몹시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야할 것 같았다. 지훈은 그를 들쳐 업으려 했다.

- 아냐..

그는 지훈을 밀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 내.. 내 부탁만 들어 주면... 쿨럭. 쿨럭. 다.. 당신 맘대로 해도 돼. 쿨럭...

- 그게 무슨 말씀...

- 너!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난 못 속여. 쿨럭.. 쿨럭.

그러면서 그는 꼬질꼬질한 안주머니에서 그의 신분증 하나를 꺼냈다. 지훈은 그 신분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나.. 난 강철구야.. 아부지가.. 강.. 강하게 살라고.. 흑흑... 쿨럭. 쿨럭..

-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하고 쉬세요.

- 아냐.. 쿨럭... 그냥 신분없는.. 행려병자로... 쿨럭.. 죽게 해줘. 그냥...

지훈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지훈은 그 곁에 앉았다. 방 안 공기가 따뜻하니 기침은 아까보다 덜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여전히 빠르게 오르내렸다. 멀리서 동이 터오자 지훈은 아래 카운터로 와서 돈을 더 지불했다.

- 며칠만 더 있겠습니다.

- 며칠? 거기 더러워지는데...

그러면서도 지훈이 내민 액수에 놀랐는지 한 마디 덧붙였다.

- 청소는 못해 드려. 그렇게 알아.

지훈은 알았다고 말을 하고는 근처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기침, 감기약을 사서 나오는 길에 서울역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아니면 추운 아침이라 그런지 밥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훈은 그 모습을 보고 모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 형사님!

지훈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가 그대로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그 쪽도 만만치 않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골목 안으로 들어와 지훈이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지훈은 습관적으로 그 사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팔을 밟았다. 말쑥하게 잘생긴 신부였다. 얼굴이 낯이 익은 것 같으면서도 도대체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 너 누구야?

아래 깔린 석호는 팔의 통증을 느끼며 말했다.

- 저 장석호 신부입니다. 기억 안 나세요?

- 장석호 신부? 글쎄 모르겠는데?

- 그 때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에서...

지훈은 머리가 멍해졌다. 지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라는 말은 듣긴 했지만, 지훈에게는 침투해야 할 곳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신분 세탁이 끝나면 꼭 그 곳에 들어가 확인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 네. 혹시... 그 때 뉴스에서...

석호는 지훈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지훈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을 했다.

- 제 말은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지훈은 왠지 그 사람이 낯설지 않았고, 그 사람이 신뢰가 가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 그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 지훈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그리고 난 지금 죽은 사람인데?

-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불러봤는데...

- 내가 널 지금 여기서 죽일 수도 있어.

- 의심이 가시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만 저에게 부인이신 혜민 씨와 아이를 부탁하셨습니다.

혜민이라는 이름을 듣자 지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혜... 혜민이를...

- 네. 그 이름과 아이는 함부로 말씀하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믿어주세요.

- 그런데 왜 날 도우려는 거지?

지훈이 눈매를 가늘게 하고 묻자 석호는 일어서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 제 생명에 은인이시니까요.

- 생명의 은인?

- 그건 차차 말씀드릴 테니까 일단은 저랑 같이 가시죠. 서울역 주차장에 제 차가 있으니까 그걸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은 안 돼. 저기 모텔에서 볼 일이 있어서.

- 모텔에서 볼 일이요?

- 이상한 생각하지 마. 거기 죽어가는... 아! 도와준다고 했지? 그 사람 병원에 데려갈 수 있어?

석호는 흔쾌히 대답을 했다.

- 그럼요. 어디죠?

지훈은 석호와 함께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모텔 방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 이봐요. 철구 씨..

철구라고 불린 남자는 피를 한 모금 토하고는 이미 눈이 뒤집혀 있었다. 석호가 다가와 심장에 손을 가져다대고 코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 미약하지만 아직 살아는 있어요. 빨리 옮기죠. 아래로 내려오시면 제가 앞에 차를 세우겠습니다.

석호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갔다. 지훈은 철구가 토해 놓은 피를 대충 닦아냈다. 그리고 방 안을 한 번 살폈다.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지훈은 철구를 등에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아줌마가 자리에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훈이 모텔 밖으로 나오자 어느샌가 석호의 차가 도착했다.

- 얼른 타세요.

석호는 지훈과 철구가 타자 빠른 속도로 병원을 향해갔다. 소형 병원 앞에 서자 지훈이 철구를 들쳐업고 뛰었다. 석호 역시 차를 내버려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 장 신부님. 어쩐 일로...

입구에서 의사인 듯한 사람을 만나자 마자 석호가 말했다.

- 응급 환자입니다.

- 응급 환자는 여기서는..

의사가 머뭇거리자 석호가 다시 말을 했다.

- 사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석호가 말을 하자 의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이고는 병실로 옮겼다. 지훈은 초조하게 그 옆에 서 있었다. 조금 있다가 의사가 밖으로 나와 말했다.

- 가망이 없습니다. 이미 목에 피가 조금씩 차오르고 있어서...

지훈은 병실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훈은 자신이 마치 그가 죽기를 바랐던 사람처럼 느껴져 자괴감이 들었다.

- 휴.. 그럼 여기서 사망신고도 가능한가요?

지훈이 말을 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 네. 신원을 안다면요.

지훈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그의 신분증을 꺼내려했다. 그 순간 석호의 손이 그를 붙잡았다.

- 아직...

석호는 의사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 행려 환자입니다. 신원 불상입니다. 그렇게 처리 가능합니까?

석호의 말에 지훈도 의사도 놀란 눈으로 석호를 쳐다보았다. 의사는 석호의 다문 입매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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