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축계(逐界)-쫓겨난 이들의 세계-61화 (61/309)

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0. 재시작(3)

피터의 말에 학자들은 모두 경탄성을 질렀다. 슈뢰딩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피터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지식이 집중되어 있어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어차피 피터가 '그 분'이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의 본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피터보다는 빈약한 논리이지만, 슈뢰딩거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 피터, 아주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자네는 '그 분'이 되어서는 안 돼. 이것이 전철(前轍)이 되어서 또다시 조직 내에서 피바람이 몰아치게 될 테니까.

슈뢰딩거의 말에 피터가 비웃음을 흘렸다.

- 더 나은 자가 나타나면 전 물러날 것입니다. 아니 깨끗하게 넘겨줄 것입니다. 어차피 저 역시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이 아이가 필요한 것입니다.

피터는 실린더를 가리키며 말했다.

- 열성 유전자 발현체의 자손. 마치 사자와 호랑이 사이에서 나온 라이거가 생명을 잉태한 것과 같은. 그리고 다들 스펜서 박사의 보고서를 보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가 태어나서 정말 뛰어난 아이가 된다면 저는 아낌없이 그에게 모든 것을 줄 예정입니다.

슈뢰딩거는 비웃으며 말했다.

- 저 아이가 자네 말처럼 뛰어나게 태어날 확률은 1%미만이야.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네가 계속... 자네는 99%의 확률로 남겠지.

슈뢰딩거의 말에 피터가 말했다.

- 1% 확률을 100%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 헛소리! 자네는 조직을 장악하고 싶은 마음뿐이란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처음부터 그랬지. 처음부터.

슈뢰딩거의 말에 피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누구를 위한 희생이란 말이죠? 누구를 위해서?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인간? 우리의 꿈이 무엇입니까? 저는 우리의 꿈을 빨리 실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미래를 위해 우리가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슈뢰딩거는 피터의 말에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고 말했다.

- 나도 자네처럼 생각했지. 우리는 무엇인가하고 말야.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보니 알겠더군. 우리는 절대 과정이 아니야. 우리도 결과일 뿐이지. 우리의 결과를 다음 세대가 이어받아 또 다른 결과를 만드는 것이지. 그게 과정이라면 과정이겠지. 하지만 모두 과정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못된 생각이었지. 우리 모두는 결과로 살고 있지. 하지만 자네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본다면 이제 우리가 저질렀던 과오보다 더 큰 과오를 저지르게 될 지도 몰라. 현실을 도외시하고 더 빠른 결과만을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진정한 결과가 아니라 파멸의 길이 될 것이라네.

피터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 끝까지 선생님 노릇이군요. 제가 슈뢰딩거 교수님보다 더 지식이 많은데도요.

- 지식과 경험은 다르지. 그게 자네의 한계였던 거야.

슈뢰딩거는 옆에 서 있던 괴한에게 명령을 내렸다.

- 끝내게.

그러자 그의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그리고 피터의 머리를 제외한 모든 곳에 총알이 박혔다.

- 어.. 억...

피터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학자들도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 슈뢰딩거를 쳐다보았다.

- 이것이 결론입니다. 피터의 뇌는 따로 보관할 것입니다. 어떤 기억도 다운로드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 아이...

슈뢰딩거는 실린더를 쳐다보았다.

- 저 아이는 폐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다들 명령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슈뢰딩거 옆에 서 있던 의사는 재빨리 움직였다. 죽어 있는 피터의 시신을 끌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슈뢰딩거 옆에 서 있던 운전사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1층 다 비웠습니다. 수술은 모두 마쳤다고 합니다. 형사들도 모두 내보냈고, 보호자로 한 명만 3층 회복실 앞에 있게 했습니다.

- 수고했네.

슈뢰딩거는 거기 모인 사람들을 모두 1층으로 옮겨가 한 명씩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든 상태에서 슈뢰딩거는 수술실 안에 있던 의사에게 말을 했다.

- 기억은 잘 지운 것인가?

- 100%는 아니지만, 아마도 오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며칠간의 기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해마에 영향을 더 받았다면 일주일, 길면 열흘 정도의 기억이 없어졌을 것입니다.

- 그래. 고생했네.

슈뢰딩거의 말이 끝나자 수술실 의사가 침대에 누웠다.

-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슈뢰딩거는 그 의사를 쳐다보았다. 대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그를 보고 자신의 옛날이 떠올랐다. 모든 일에 열정적이던 자신의 모습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의 성취감을.

- 그 마음 잊지 말게나.

슈뢰딩거는 버튼을 눌렀다. 슈뢰딩거는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주사약을 투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쪽지를 하나씩 놓아두었다.

'아마도 잠에서 깨어나시면 어리둥절하실 겁니다. 그 분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의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로 하여금 여러분들에게 ATP 비활성제를 투여하였습니다. 물론 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활성제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이젠 의심받지 않도록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훈이 눈을 떴을 때, 지훈은 머리가 깨지는 듯이 아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지훈이 깨어나자 옆에 있던 성준이 말을 걸었다.

- 형님, 괜찮으세요?

- 응. 그런데 왜 내가 병원에 있지?

지훈의 반응에 성준은 무슨 말인가 싶어 말했다.

- 형님, 벌써 3일이나 누워 있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성준의 말을 듣고 지훈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 글쎄... 내가 술집에 들어가서... 정보원... 혹시 그 새끼가 날?

지훈의 뜬금없는 말에 성준이 말을 했다.

- 아뇨. 그게 아니라 형님께서 3일 전에 여기 발칵 뒤집어 놓으신 거 모르세요?

- 뒤집어 놓다니? 여기가 어딘데?

성준은 지훈의 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조용히 물러나 임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임 박사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 무슨 일이지?

성준은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왔다. 지훈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누워만 있었다.

- 괜찮으세요?

- 응. 그런데 어딘가 공허한 것 같아. 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아.

성준은 다른 형사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모두들 한 달음에 달려왔다. 병실 입구에 성준이 서서 형사들에게 말을 했다.

- 뭐? 기억을 잃어?

조 반장이 말을 하자 성준이 대답을 했다.

- 네. 의사말로는 총격을 당했을 때 충격으로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변환하는 해마가 영향을 받아서 일시적인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 어려운 소린 하지 말고. 아무튼 그럼 여기서 인질극 벌인 걸 모른단 말야?

- 네. 일주일, 3일간 의식이 없었으니까 열흘 전 일만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 귀신 곡하겠구만. 임 박사님은?

- 글쎄요. 저도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어서 임 박사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구요.

- 어허... 그러실 분이 아닌데...

- 아무튼 안에 들어가셔서는 그냥 병문안만 하세요. 의사 말로는 충격을 주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 쩝... 근데 이 녀석들 말을 어떻게 믿어?

조 반장은 이 내용이 의심스러웠지만, 안에 들어가서 만난 지훈을 보고는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정말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형사들은 지훈에게 몸조리 잘 하라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후에 지훈이 퇴원을 하자 경찰청에서는 상벌 위원회가 열렸다. 충격을 받으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서를 제출했고, 조 반장 역시 지훈이 일시적인 감정으로 그러했을 것이라는 동정론을 펼쳤다. 일단은 두 계급 강등과 정신과 치료 명령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지훈은 어차피 그만둘 경찰 일이었기에 그런 것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편 그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임 박사가 국과수 시신 안치소에서 질식사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형사들은 지훈이 큰 충격을 받을까봐 지훈에게는 임 박사가 미국 CSI로 가게 되었다고만 말해 주었다. 지훈은 자신의 아내를 찾는 일을 버려두고 떠나버린 임 박사를 원망하긴 했지만, 박 형사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 싶어 이해했다. 지훈은 그 날 이후로 삶의 의욕이 상실되었다. 기댈 곳도 없었고, 정신과 치료 역시 자신을 미친놈으로 만드는 데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마저 포기하면 아내와 아이는 영영 사라지게 될 것같은 불안감이 더 컸다. 차라리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자신도 미련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먼저 떠나고 그 둘만 이 세상에 남는다면... 지훈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박 형사를 그렇게 보낸 놈들이라면 그 두 사람도 편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훈은 3개월 의무 치료가 끝나자 미련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형사들이 만류를 했지만, 지훈은 그런 것에 미련을 갖지 않았다. 숨어서 은밀하게 그들을 찾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지훈이 짐을 챙길 때 비록 다른 계에 있었지만, 동료들이 모두 지훈의 사직을 안타까워 하며 모였다.

- 이렇게 그만 두면 어떻게 하라고...

조 반장이 서운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지훈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다 잊고 살고 싶어서요.

지훈의 말에 성준이 물었다.

- 출국이 언제에요? 인도로 가시면 안 오실 거에요?

지훈은 성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 내일 모레. 한국에 오면 괴로울 것 같아서.

지훈이 동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형사들은 지훈을 배웅하러 밖으로 따라 나왔다.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임철환 박사 사건 용의자가 잡혔습니다.

그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지훈 역시 고개를 돌려 그 말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지훈은 그 말에 조 반장에게 물었다.

- 임철환이면 임 박사님 아닙니까? 용의자라뇨?

조 반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그게 말야...

조 반장은 지훈에게 임 박사의 죽음을 알렸다. 분노할 것 같았던 지훈은 오히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 제가 한국에 오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요.

지훈은 그렇게 말을 하고 경찰청 밖으로 빠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죽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지훈 하나뿐이었다. 지훈은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첩보 작전처럼 택시를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 여기는 세타. 목표물이 사라졌다.

- 멍청이들! 일단 모레 인도로 출국하니까 공항에서 대기하도록.

- 굿.

지훈은 지하철 코인 락커에서 가방을 하나 꺼냈다.

- 이제 시작이야. 너희들은 용서 못해.

지훈은 가방을 챙기고 모텔로 숨어들었다. 지훈은 경찰서에 있는 동안 인도에서 성형 수술을 받을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인도 병원에 돈을 입금하였다. 출국하는 날 지훈은 당당하게 공항에 나타났다. 지훈을 발견한 그들이 서로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지훈은 입국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지훈이 안으로 들어가자 무전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 탑승 확인. 인도행 에어 에미레이트 노선.

얼마 후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비행기는 순항하여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기체 이상이 발생했다.

- 메이데이. 메이데이. 기체가 심하게 떨린다.

그 교신을 마지막으로 인도행 비행기는 남중국해상으로 추락하였다.

형사들은 그날 저녁 TV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행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서 지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