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10. 재시작(2)
미래 생명 공학 연구소 지하 2층은 시체들이 잔뜩 쌓였다. 대부분은 경비원들이었고, 학자들도 몇 명 있었다. 그리고 무장을 한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학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 네 놈들은 뭐지?
피터가 당당하게 나서서 물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뒤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핸드폰을 책임자인 듯한 이에게 건네주었다.
- 상황 종료. 접수 완료.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로 차를 타고 가던 슈뢰딩거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슈뢰딩거는 피터를 붙잡는 게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미 조직의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도 윤곽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일을 통해 접근한 정보가 훼손된 것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오는 그들의 시선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정확하게 슈뢰딩거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 시간만 좀 더 있었다면 그들에게 발각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컨퍼런스에 맞춰 거사를 준비했지만, 피터를 잡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적어도 홈즈와 샘의 복수를 하고 자신도 그들의 뒤를 따르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천운(天運)이 자신을 따르는지 때마침 인질극이 벌어졌고, 숨어 있던 핵심 경비원들이 모두 그 인질극을 막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상황에서 그들을 섬멸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가 난공불락의 성(城)이었던 이유는 철저한 보안시스템도 있었지만, 침입자를 누가 언제 어디서 공격하는지 모르게 공격하는 '특공대' 때문이었다. 일반 경비원처럼 위장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의사로 위장한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컨퍼런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간부급들 모임에 난데없이 침입자가 나타나자 그들이 모두 출동을 한 것이었다.
- 하늘이 도왔군. 하늘이 도왔어.
슈뢰딩거는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입구에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지금 여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슈뢰딩거의 차를 세우고 경찰 한 명이 얘기를 했다. 운전사는 능숙하게 경찰의 말을 받았다.
- 여기 연구소장님이십니다. 상황 보고를 받기 위해 지금 나오시는 길입니다.
경찰이 차 안쪽에 앉아 있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무전을 치자 뚱뚱한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 친절! 이 연구소 책임자시라구요?
- 네. 그렇습니다.
운전사가 대신 말을 하자 뚱뚱한 경찰도 안쪽을 한 번 쳐다보았다. 외국인인 것에 잠시 멈칫하더니 옆의 경찰에게 물었다.
- 너 영어 할 줄 아냐?
- 모... 모르는데요.
- 아 씨발... 책임자 조사해 오라는데 어떡하냐. 미치겠네.
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나눌 때 뒷 창문이 열리면서 목소리가 들렸다.
- 줴가 내일 경촬서로 가게씀미다.
유창하진 않지만 능숙한 한국어에 두 사람은 외국인 노인을 쳐다보았다.
- 네? 네. 그러시죠. 그럼 안으로...
슈뢰딩거가 탄 차가 안으로 들어가자 두 경찰은 입맛을 다셨다.
- 젠장, 뭔 연구소 책임자가 외국인이야.
-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이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안으로 차가 들어가자 슈뢰딩거는 트렁크에서 가방을 하나 꺼냈다. 슈뢰딩거가 안으로 들어가자 운전사는 가방을 들고 슈뢰딩거 옆으로 다가왔다. 슈뢰딩거가 로비에 들어섰을 때, 지하 2층과는 달리 로비는 무척 혼잡했다. 수술실 콜이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슈뢰딩거 옆에 있던 운전사가 경비원에게 얘기를 했다.
- 지하 2층으로 가실 겁니다.
경비원은 그 말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자 안에서 의사 한 명이 뛰어나왔다.
- 같이 가시죠.
의사는 계단 쪽으로 가면서 현재 지훈의 수술 과정과 방법에 대해 말을 했다. 슈뢰딩거는 그 말에 그냥 고개만 끄떡거렸다. 지하 2층에 도착하자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났다. 슈뢰딩거는 약간 인상을 쓰며 말했다.
- 우리 때문에 희생된 젊은이들이군. 잘 처리해 주게.
슈뢰딩거의 말에 의사가 고개를 숙였다. 슈뢰딩거와 운전사, 그리고 의사가 다들 모여 있는 곳에 들어섰다. 여전히 무장 괴한들은 사람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다.
- 다.. 당신은 구스타프 슈뢰딩거?
슈뢰딩거를 알아본 한 학자가 소리쳤다.
- 맞소이다. 슈뢰딩거이외다.
- 당신이 이 일의 주모자구만. 나쁜 인간같으니라고. 그레고리님의 영광을 욕되게...
그 학자의 말에 슈뢰딩거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 닥치시오. 저 자의 꾐에 빠져 꼭두각시놀음이나 하고...
슈뢰딩거의 말에 그 학자가 다시 소리를 쳤다.
- 꼭두각시놀음이라니. 너의 그 비열한 의도가 이렇게 드러났는데도 발뺌이냐!
그 소리에 총구 중 하나가 그 학자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슈뢰딩거가 말렸다.
- 놔두게. 알프레도 박사를 잃는 건 인류에게 커다란 슬픔일 테니.
슈뢰딩거는 뒤에서 아무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피터를 보았다. 슈뢰딩거는 피터에게 말을 걸었다.
- 피터 스미스 박사. 오랜만이야.
피터가 흰머리를 쓸어넘기며 앞으로 나왔다.
- 슈뢰딩거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솔직히 슈뢰딩거 교수님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그랬나?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었다네. 홈즈와 샘이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말이지.
- 그렇게 가다니요? 하하. 이제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돌아가신 분들까지 이용하십니까? 그냥 이 조직의 권력이 탐났다고 하시지요.
피터의 도발에도 슈뢰딩거 교수는 냉정하게 말했다.
- 학창 시절부터 교활하고 영악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군. 피터 스미스 군. 내가 자네 아버지에게 그렇게 타일렀건만, 결국 쯧쯧..
슈뢰딩거는 이 말을 마치고는 운전사를 시켜 가방에서 노트북을 하나 꺼내게 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켠 후 사람들에게 말을 했다.
- 자, 이제부터 이 영상을 보시고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도 여전히 피터 스미스의 행동에 동조를 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슈뢰딩거의 말은 협박에 가까웠다. 모두들 그 말에 분노한 표정이었지만, 동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모두들 놀랐다. 영상에 나타난 것은 홈즈 스미스가 나타났다.
- 이 영상을 보시는 여러분들. 아마도 이 영상을 보실 때면 저는 이미 죽어있겠지요. 피터의 전화를 받고 샘 에드워드에게 부탁해서 만든 것이니 잘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동영상은 20분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피터 스미스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피터 스미스는 그레고리 버밍험의 뇌에서 추출한 기억을 자신에게 이식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레고리의 기억을 이식받은 인도인에게 의도적으로 뇌종양을 일으켰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동영상 재상이 끝나자 모든 학자들이 피터를 돌아보았다.
- 이걸 믿으십니까?
피터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얘기를 했다. 하지만 학자들의 동요는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 뇌에 기억을 각인시키는 것은 레이저 파동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피터가 말을 할 때 슈뢰딩거가 말을 끊었다.
- 아니지. 아냐. 자네는 감추는 게 너무 많아. 자네가 만들어 놓은 아이들이 있지 않나. 졸피뎀을 통한 암시 요법과 전기 자극법 말야. 지금 위에서 그 형사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방법 말일세.
슈뢰딩거의 말에 피터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대단하신대요.
이 한마디로 피터는 자신의 모든 상황을 인정했다. 그러자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피터 스미스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레고리의 지식을 받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 그 분의 지식을 받으니까 세상이 달라보이더라구요. 아니 지금 연구하는 것 자체가 아주 하찮아 보였죠. 아! 이런 세계도 있구나하고 말이지요.
피터는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가 보이지 않는 듯 뚜벅뚜벅 걸어서 실린더 앞으로 다가갔다. 만삭의 여인이 그 안에서 약간의 경련을 하며 있었다.
- 저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아이죠. 뱃속의 있는 아이도. 아 참!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습니다. 그레고리님의 뇌는 이제 없습니다. 제가 폐기했거든요.
피터의 뻔뻔스러운 말에 모든 학자들이 경악을 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 그레고리님의 기억은 '그 분'도 가지고 계시네. 그러니까 그 분에게서..
하지만 피터는 고개를 저었다.
- '그 분'이라... 인도 거지 아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뇌종양을 앓고 있는. 혹시 의심을 해본 적은 없으십니까? 진짜 그 아이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진짜 뇌종양인지.
- 뭐.. 뭐라고?
- 그 분은 어디 계시지요?
- 그 분은 그레고리님이 거처하시던 곳에...
- 가 보셨나요? 그 분의 주치의가 누구일까요?
슈뢰딩거는 그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그레고리의 기억은 이제 피터에게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 자! 확인하러 사람을 보내보시지요.
슈뢰딩거는 떨리는 손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조하게 시간이 흘렀다. 얼마 후 슈뢰딩거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 그런가? 알겠네...
슈뢰딩거는 순간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레고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자. 그를 죽일 수는 없다. 세상에 한 명 남은 자.
- 자 선택을 하시지요. 이제 제가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갖고 있군요. 그렇다면 제가 이제 '그 분'인가요?
학자들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흐름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때 톰슨 병원장이 소리를 쳤다.
-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 말에 다른 학자가 반박을 했다.
- 저건 합의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잖소.
그러자 다른 학자가 말했다.
- 전에 인도인이었던 그 분 역시 합의에 의해 된 것은 아니었소.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슈뢰딩거 역시 이러한 전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했다.
- 조용히 하시오. 나는 피터가 우리의 '그 분'이 되는 것을 원치 않소. 우리가 아무리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스스로에게는 떳떳했소. 하지만 저 자의 행위는...
그러자 피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떳떳이라고 했습니까? 그 많은 생체 실험이 떳떳한 일이었습니까? 자유를 빙자해서 실험체를 세상에 풀어 놓고 이용하는 것이 떳떳한 일이었습니까? 아니 오로지 그레고리님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훌륭한 실험체들을 폐기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까? 아니 조직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자들에게 '경고'를 내리는 게 떳떳한 일이었습니까?
피터의 마지막 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도 피터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 가증스러운 위선의 탈을 벗어버리시죠. 제가 나쁜 놈이라구요? 다들 그러하시겠지만 저 역시 조직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항상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조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무기로 그것을 덮어버렸지요. 왜 그러셨죠? 세상의 평판을 잃을까봐? 웃기지 마시죠. 다들 같은 생각이잖아요. 목적을 위해 우리는 모두 수단이다. 어쩌면 저를 보고 이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죠. 아! 내가 먼저 그레고리님의 기억을 갖는 건대하고 말입니다.
피터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아까보다 더 한 동요가 일어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피터를 그레고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피터는 쐐기를 박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 제가 '그 분'이 된다면 제 기억을 추출하여 여러분들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혼자서 다 연구하지 못할 바에는 전문 분야별로 기억을 이식받아서 각각 발전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