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계(逐界) - 쫓겨난 이들의 세계 - 1장 - 9. 비밀의 끝(6)
지하 2층 계단을 오를 때까지 총으로 지훈을 겨누며 따라왔다. 지훈은 최대한 침착하게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너무 쉽게 그들이 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밝은 지하 1층으로 올라오자 경비원들이 석호 앞에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총이 아니었다. 경비봉과 전기 충격기 등이었다. 그리고 지하 1층으로 올라오자 총을 든 사내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지훈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여의사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1층으로 올라왔다. 1층에서는 방송이 계속 나왔다.
- 아래층에 테러범이 들어와서 인질극을 벌이고 있으니 1층에 남아 계신 분들께서는 신속히 안전한 밖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아래층에서...
지훈과 석호가 1층에 올라오자 경비원들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제압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그 순간 밖에서 스피커 목소리가 들렸다.
- 박지훈 형사! 어서 인질을 풀어주고, 경찰에 자수해라. 다시 한 번 말한다. 박지훈 형사! 어서 나와라.
그러나 그 다음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조 반장의 목소리였다.
- 어이, 작은 박! 사고치지 말고 나와. 지금 나오면 정상참작이 되니까.
석호는 지훈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 아까 내가 들어온 길로 가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요. 화장실 환기구가 건물 뒤쪽까지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요. 같이 가시죠.
지훈은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석호를 보았다. 다리의 출혈은 덜해졌지만, 아직 뛸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나는 됐으니까 당신은 꼭 나가야 돼.
지훈이 석호에게 말했다. 석호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지훈을 보았다.
- 당신이 내 유일한 희망이니까. 당신은 여기서 아무 일 없이 나가야 돼.
그리고 지훈은 울먹이며 말했다.
- 부.. 불쌍한 혜민이하고 내 아들하고 살려주시오. 제.. 제발.
지훈의 눈은 퉁퉁 부었다.
- 알았으면 내 말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런 후 지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여기 있는 경비원들을 모두 내보내라!
지훈이 소리를 치자 1층 로비에 있던 경비원들이 밖으로 나갔다.
-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일단 나와서 얘기하자!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모르는 척 하고 가까이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 꼭... 꼭 부탁합니다.
석호는 잘생긴 얼굴을 굳혔다. 자신만 살아나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강인한 저 사람의 내면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석호는 환기구 위로 올라갔다. 지훈은 그가 빠져나갈 시간을 주기 위해 화장실 앞에 잠시 멈춰서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지훈을 회유하는 말이 나왔다. 지훈은 석호가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정문 쪽으로 나왔다. 앞에는 특수기동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뒤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지훈을 향해 하던 말이나 기자들의 멘트들이 지훈이 밖으로 나오자 조금씩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지훈은 멀리서 자신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는 조 반장과 성준이, 고 형사, 김 형사, 최 형사를 보았다. 지훈은 그 순간 여의사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여의사는 지훈의 품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지훈은 그런 여의사의 모습이 나비같아 보였다.
- 혜민아...
그 때 여의사가 경찰과 지훈 사이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들린 한 발의 총성.
- 안 돼!
조 반장과 다른 형사들이 크게 소리를 쳤지만, 총알은 소리보다 빨랐다. 정문에 서 있던 지훈에게 곧장 날아가 지훈은 그 충격으로 뒤로 쓰러졌다.
- 미안해...
지훈은 총알이 날아와 자신의 몸에 박히는 순간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혜민을 구하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에 마음이 더 아팠다. 지훈은 혜민과의 과거 속으로 피를 흘리며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임 박사 사무실에는 슈뢰딩거와 임 박사가 마주보고 앉았다. 슈뢰딩거는 임 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 당신 말이 다 맞소. 홈즈 스미스도 샘 에드워드도 모두 그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피터의 짓이요. 그리고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은 나와 샘의 작품이요. 그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한 것이요. 그 분을 위해서...
- 그 분이 누굽니까?
임 박사의 노골적인 질문에 슈뢰딩거가 대답했다.
- 그 분은 그레고리 버밍험 2세의 직계 자손이요.
- 그레고리 버밍험 2세? 혹시 영국에 유명했던 고고학자 말씀이십니까?
- 고고학자라...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건 얘기가 길어지니 추후에 우리가 같이 얘기를 할 수 있을 때 하도록 합시다.
슈뢰딩거가 말을 돌리자 임 박사는 단독직입적으로 물었다.
- 임혜민은 왜 납치한 것이죠? 실험체였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암시로 부르면 되지 않소?
- 임혜민.. 아, CS2를 말하는 것이군요. CS2는 우리 것이 아니오. 피터의 것이지.
슈뢰딩거는 임 박사에게 홈즈 스미스의 양자인 피터 스미스가 자신들과 같이 복제 인간을 만들었고, 그것은 의학적 차원에서 연구한다면서 자신의 유전자와 결합하여 CS1, CS2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 그 분의 난자를 사용할 줄은 몰랐소. 그 분의 난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녀들에게 그 분의 훼손된 장기를 이식한 것이죠.
슈뢰딩거의 말에 임 박사는 분노했다.
- 인간이 장난감이오? 만들고, 없애고, 부수고...
- 휴... 나나 샘은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소. 정말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연구하고자 했지. 그 분의 기억을 받은 인도 아이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악마의 집단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오.
- 난 지금 당신을 없애버리고 싶어!
임 박사의 말에 슈뢰딩거는 고개를 끄떡였다.
- 이해하오. 하지만 지금은 피터의 폭주를 막는 것이 중요하오. 그 놈은 지금 그동안 연구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인류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간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것이 축복일지 재앙일지는 훗날 밝혀지겠지만...
- 당신도 그 계획에 동조하니까 지금까지..
임 박사가 말을 할 때, 슈뢰딩거의 핸드폰이 울렸다. 슈뢰딩거는 임 박사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 뭐? 인질극?
슈뢰딩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임 박사와 떨어진 곳으로 간 슈뢰딩거는 조용히 말했다.
- 작전을 시작하게.
슈뢰딩거는 임 박사 앞으로 와서 말을 했다.
-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에서 어떤 형사 하나가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더군요. TV에서도 나온다고 하던데...
그 말에 임 박사는 용수철이 튀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미래 생명 과학 연구소 정문을 비추고 있는 카메라와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임 박사는 초조한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 다... 다음에 봅시다.
임 박사가 밖으로 나가자 밖에 있던 연구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슈뢰딩거는 그 연구원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인간은 더 발전해야 하오. 지금처럼 가면...